-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정말 미친 듯이 살았소이다. 싸움터에서 눈을 뜨고 감는 나날들이었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더군.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세월이 무상(無常) 하지는 않아서 한 지역의 패자(霸者) 소리를 들을 만치는 강해졌소. 당연히 원수(怨讎)들 중에 나보다 강한 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소이다.
그놈들은 그저 보물이 탐나 아무런 인연도 없는 가문(家門) 하나를 멸문시킨 놈들이오.
사람의 탈을 쓴 악마 같은 놈들이었지. 하지만 칼 한 자루 들고 담을 뛰어넘어가 원수의 목을 따버리는 시도는 할 수가 없었소.
한두 놈의 목을 따고 나면 그들도 어떤 일이 원인인지 알게 될 터, 오히려 내가 궁지에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소.
무림공적(武林公敵)이 되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그로 인하여 복수(復讎)를 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웠지.
열 살의 아이가 무공을 배우는데 팔 년을 바쳤소.
낭인으로 떠돌면서 대략적인 정황을 파악하는 데만 십 년의 세월이 또 걸렸지.
무공을 정립(正立)하면서 원수를 유추(類推)하는데 다시 삼 년이 걸렸소.
생의 대부분을 복수만 생각하며 살아왔으니 실패할 확률이 높은 방법은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던 거요.
원수를 추려낸 이후, 복수 자체가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더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던 것 같소. 사실 반쯤은 미쳤다고 봐야겠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모든 전투에 참가했소.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노력했지.
언제나 가장 먼저 뛰어들어 제일 치열하게 싸웠소. 하지만 세력끼리의 전투는 멸문(滅門)까지 가는 경우가 없더군.
내가 아무리 싸움을 더 유지하려 해도 저들끼리 합의를 하거나 주변의 거대 세력이 끼어들어 중재(仲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소.
원수놈들의 머리통은 하나도 따지 못하고 그저 헛된 무명(武名)만 얻었소이다.
귀(鬼)라는 호칭이 별호에 붙은 것도 그때부터였소.
귀신이라 불리게 된 이후부터는 내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사라졌소. 하지만 그딴 것은 내게 아무런 필요가 없었소이다.
아무리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도 내 칼이 닿는 것은 그저 내 가문의 멸문과는 상관없는 하수인들 뿐이었으니.
허탈했소. 지금까지의 내 모든 인생이. 결국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거란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했소. 아무리 궁리해도 모든 원수를 척결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소이다.
어느 날 술을 진탕마신 후 허리에 칼을 비껴 차고 부모님이 묻혀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했소.
엎드린 채로 모든 원수를 갚지 못한 것에 사과를 드렸지. 대신 최대한 많은 원수를 저승으로 보낼 것이라 맹세했소.
그리고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비아냥거리더군. 사내로 태어나서 겨우 그런 맹세를 하고 있느냐고.
주루(酒樓)에서 술김에 한 맹세였기에 누군가 들은 모양이었소.
그의 말도 옳았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섰소. 그리고 주루의 입구를 향해 걸었지.
세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다시 그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소.
부모에게 한 맹세를 욕되게 하는 이가 나타났는데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이가 어찌 그 맹세를 지킬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소.
그 말도 옳았기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연 자를 돌아보았소. 술이 꽤나 들어간 젊은 거한(巨漢)이더군.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는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았소.
군자(君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큰 복수는 하지도 못한 채 포기하는 맹세를 하고 바로 돌아서서 작은 복수를 하려는 것은 소인의 자세라며 비웃더군.
어차피 모든 원수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포기했고, 몰래 담을 넘어서라도 최대한 많은 원수의 목을 따려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기에 사내의 말 따위에 화가 나지는 않았소.
그가 일반인이었다면 그저 넘어갔을 것이오. 하지만 사내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소.
자고로 무림에 처음 나와 거들먹거리는 이들은 한 가락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오.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저 알량하게 세진 힘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이들이고. 그리고 그런 두 부류의 인간들은 예의를 배우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소.
그런 이들은 언제나 무림 선배들에게 줘터져 봐야 예의를 배울 수 있는 법.
예의를 배우지 못하더라도 함부로 설치다가는 칼 맞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소.
나는 한 걸음을 내디뎌 사내의 정면에 섰소. 사내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했소.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바로 무기를 잡으려 하기에 손을 뒤집어 내력(內力)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소이다.
단순히 손을 뒤집어 일행 셋을 제압하는 내 모습에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지더군. 그리고 뻔한 소리를 했소이다.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 자길 함부로 대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물러나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뻔한 소리.
헛소리를 하는 놈은 매가 약이라, 칼집으로 후릴까, 칼등으로 뼈를 몇 개 쪼갤까, 손으로 후려쳐 골병들게 할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어깨에 힘을 주고 기세가 등등해지더군.
입구 쪽을 보니 고수로 보이는 노인네 둘이 들어오더이다.
다시 사내가 뭐라고 헛소리를 하려 하기에 돌아서며 칼집으로 왼쪽 뺨을 후려쳐 날려버리고 노인들에게 내 칼이 잘 보이도록 살짝 정면에서 땅을 향해 비스듬히 들었소.
그들은 일반 도(刀)보다 두 배는 두껍고 한배 반정도 긴 도를 보고 뭔가를 알았는지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였소.
살짝 대치를 하다가 말했소이다. 선배로써 무림에서는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특히 부모에 관련된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노인들은 한숨을 쉬었고 나는 다시 한걸음을 내디뎌 나자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세운 사내의 곁으로 갔소이다.
한번 더 칼집으로 반대편 뺨을 후려치고 노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한걸음을 내디뎌 주루의 입구로 향했소.
노인들은 사내의 뺨을 후린 것에는 큰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한걸음으로 뒤를 잡힌 것에는 경악하는 눈치더군.
무림에는 정파(正派)와 사파(邪派)가 있어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강자(强者)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같소.
내가 보인 무위(武威)로 인하여 주루에서의 일은 조용히 마무리되었지.
나는 그날 밤 담을 넘어 사파 하나를 운영하던 원수 놈의 목을 땄소.
몇 가지 고문(拷問)을 통해 그날 모인 이들이 같이 작당했던 것은 아니며 자기들끼리도 칼을 맞대고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렇게 칼을 맞대었다 보니 복면을 했어도 지들끼리 예상하는 이들이 있더군.
그들의 명단을 내가 유추한 이들과 비교해 보니 거의 같았소. 하여 다음 행선지는 근처의 정파로 정했소.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놈의 멱을 따려면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하겠더군.
최대한 많은 원수를 처단하기 위해 도가 아닌 검(劍)을 쓰고 단순한 찌르기와 베기만 사용하였지만 얼마나 흔적을 남겼을지는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소.
다음 날 도시는 발칵 뒤집혔소. 실질적으로 지역을 관장하던 사파의 우두머리와 간부 몇몇이 죽어서 발견되었으니.
죽은 간부도 하필이면 유력 간부였는지 저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각자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기 시작했지.
우습게도 우두머리를 잃은 사파의 이빨에 처음 물린 것은 무림맹이었소.
무림맹에서는 각 문파(門派)의 젊은 고수들을 모아다가 단체를 만들고 경험을 쌓아주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단체 중 주작단(朱雀團)이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었소.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한 이들은 사파 놈들의 추궁에 폭발해 버렸소. 아주 화려하게.
싸움구경은 재미있는 법이지만 급한 일이 있는 나는 짐을 챙겨 길을 떠났소. 그리고 어쩌다 보니 도시 근처의 숲에 도착했을 때 주루에서 보았던 노인들과 다시 재회하게 되었지.
그들은 사파무리에게 쫓기면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보호하고 있었소. 그 무리 안에는 입방정을 떨던 덩치도 있었소. 양쪽 뺨이 거무튀튀하게 피멍이 들어 있는 게 보기 좋았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는데 노인이 의뢰를 하더군. 한데 의뢰 보상이 재밌었소.
그들을 무사히 탈출시켜 준다면 내 복수를 도와주겠다 하더군. 아마도 피멍 덩치에게 들은 것이겠지.
물끄러미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소. 그대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내 복수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노인은 자신이 보호하는 이들은 주작단이며 각문파의 유망한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이기에 이들을 도우면 각문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말했소.
솔직히 내키지 않더군. 그들 중에는 원수의 아들도 있었거든.
직접 손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 그들이 다행이라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소. 하여 고개를 저으려는데 사파의 고수 몇이 도착했소.
내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무기를 들더군. 그저 지나가는 중이며 상관이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소.
이미 저들끼리 뭔가 협약을 맺은 듯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주작단을 사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소.
이후의 일은 예상대로요. 앞뒤 분간 못하는 놈들이 나까지 공격했고 나는 되받아쳐서 그들을 쓸어버렸지. 이렇게 된 거 그냥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소.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노인들은 내가 합류해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되자 쫓기는 상황을 젊은 무사들의 경험으로 바꿔주려 했소.
절정을 넘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내 무위를 미루어 짐작한 노인들은 습격을 받을 때마다 가장 강한 자들을 내게 넘기고 위급한 젊은 무사를 돕는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갔지.
무림맹의 지부가 있는 곳에 도착할 쯤엔 주작단 무사들은 꽤나 경험을 쌓을 수 있었소.
처음의 어리숙한 모습은 벗어버리고 적당히 긴장을 유지하며 변화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지.
그들은 길을 뚫어야 할 상황을 여유롭게 걸으며 돌파할 수 있게 해 준 나를 인상 깊게 본 모양이었소. 각자의 가문으로 나를 초청하려 했지.
모두 거절하고 애초의 목적지로 떠나려는데 노인 중 하나가 내게 귀띔해 주더군. 주작단에 현 무림맹주의 딸이 포함되어 있다고.
그만한 무력으로 복수가 힘들다고 생각할 정도면 강대한 세력이 원수인 듯한데 무림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복수를 완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소. 나는 직접 내 손으로 적들의 모가지를 따야만 복수를 한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소.
그게 아니라도 적들끼리 상잔(相殘)하게 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이었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소. 몸을 쓰는 것에만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을 뿐이지.
하물며 정과 사에 모두 적이 있는 내가 누군가에게 원수의 정체를 털어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소.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으니 그저 내가 해오던 방식대로만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요.
노인의 조언은 그런 내 아집(我執)을 깨트려주었소.
무림인들의 분쟁은 결국 칼부림으로 끝이 나는 법.
그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켜준다면, 그 혼란 속에서 내 복수를 이루는 것은 조금 더 쉬워질 것이었소.
감사인사를 전하겠다며 다가온 맹주의 딸을 비로소 자세히 보았소.
무복차림의 그녀는 일반적인 남성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서 거의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더군.
당당한 체격까지 갖춰 누가 보면 남자로 오해할만했으나 얼굴에는 젖살이 그대로 남은 듯 뭔가 동글하고 귀여운 인상이었소.
이전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 몰랐으나 자세히 보니 얼굴표정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었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술을 씰룩이고 볼을 씰룩였으며 기분이 좋아지면 눈썹이 올라가고 볼이 탱탱해졌소.
미인상은 아니었으나 괜히 웃음이 나게 하는 귀여운 인상이었지. 그게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소.
무림맹을 이용해 원수들끼리 싸움을 붙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했어도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고민을 해봐야 하는 문제였소.
하여 무림맹 지부에서 손님대접을 받으며 며칠을 고민했소.
제아무리 후기지수들을 도왔다고 해도 내 복수를 위한답시고 무림맹이 대뜸 전쟁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았기에 뭔가 명분이 필요했지.
조용히 고민하는 내게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그녀는 매일 찾아와 쓸데없는 것들을 묻곤 했소.
나이는 몇이냐, 결혼은 했느냐, 무공은 언제부터 배웠느냐,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강해질 수 있느냐, 절정의 경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느냐.
내가 귀찮아서 대충 답하면 그녀는 볼을 부풀리거나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찡그렸소.
그게 조금 귀엽더구려. 끝까지 냉정하거나 귀찮아하지 못하고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소.
사실 그녀와 거리를 두려 하였으나 그것이 쉽지 않았소.
그녀가 고민할 때 코를 찡긋이는 것이 신경 쓰였고 곤란한 질문을 할 때 자신의 귓불을 만지며 망설이는 것이 눈에 밟혔소.
그래.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게지. 그래도 그녀와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했소.
밝혀진 내 원수 중에는 무림맹의 장로도 있었는데 그는 맹주의 심복이었거든. 하지만 무림맹의 고위층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그녀의 입김을 무시할 수도 없었소.
어쩌면 그런 핑계로 그녀와의 만남을 정당화하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매일 찾아오는 그녀와 대련을 하기도 하고 정원을 같이 걷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눴소.
그녀는 지금 무림맹이 돌아가고 있는 현황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녀가 왜 무복을 입고 주작단에 속해있는지 물었소.
그녀는 한 명의 무인이 되고 싶다 말했지. 어렸을 때부터 무림맹에서 자란 그녀는 정의로운 무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바라는 소망(所望)이라고 말했소.
그녀의 무공을 봐주는 것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얼마든지 찾아오라고 말해주었소. 그리고 숙소에 돌아오면 자책했지.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복수를 잊는 것에, 그저 계속 그녀와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에.
찬바닥에 누워 매일 이를 갈며 잠들고 칼을 움켜쥔 채 깨어나던 과거와 달리 그녀와 함께 걷는 꿈을 꾸고 오늘은 언제쯤 그녀가 방문할까 고민하며 깨어나는 것에.
지금까지는 겪어보지 못한 그 달콤함에. 모든 것을 잊을 것만 같아서 덜컥 겁이 났소.
그렇게 느낌에도 그녀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고 이야기할 때마다 설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소.
어느 날 밤의 호숫가 산책에서 그녀가 먼저 내게, 함께할 때마다 설레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해 주었소. 나도 같다고 답해주었지.
그녀는 남자만큼 키가 크고 기골도 장대하여 여자로서의 멋이 없는 자신에게 설렌다고 말해주어 고맙다고 말했소.
나는 복수만 꿈꾸느라 칼 휘두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게 설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소.
그녀는 그 통통한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소.
이내 고개를 들 때에는 얼굴 전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뭔가 불안한 듯 눈썹이 꿈틀대고 입술을 오물대고 있었소.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더구려.
어스름한 달빛이 호수에 겨우 비치고 전체적으로 주변이 어두웠으나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이 세세하게 살필 수 있었소.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무공을 익힌 것에 감사했네.
그 귀여운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두 바라볼 수 있었거든.
진심으로 복수를 내려놓고 그녀를 안았소.
두근대는 그녀의 심장소리가 들렸고 그에 못지않게 빠르게 뛰는 내 심장 소리도 느껴졌지.
진심으로 모두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소.
지금 이대로 언제까지나 영원하기를.
오늘이 지나지 않고 내일이 오지 않아 복수를 잊은 채로 그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었소.
하지만 어김없이 해는 뜨고 내일이 오듯이 그저 달콤함에 잠겨 과거를 모두 잊고 살아갈 수는 없었소.
현실은 다시 나와 그녀를 우리만의 세상에서 끌어내려했거든.
주작단의 탈출전은 사도련(邪道聯)의 관심을 끌었고 무림맹과 사도련을 배후에 둔 문파들의 국지전이 시작되었소.
간단한 분쟁이나 시비였으나 배후의 이들이 워낙에 커다란 이들이었고 이들은 체면이 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소.
기선을 단숨에 제압해 유리한 협상을 하길 원했지.
내가 담을 넘어 원수를 벤 것은 사도련에 의해 어느새 무림맹의 어떤 고수가 습격한 것으로 바뀌었고 주작단이 탈출한 것은 사도련의 일방적인 기습이었다는 무림맹의 판단이 있었소.
내가 열심히 굴리려던 복수의 수레바퀴는 내가 달콤함에 젖어 손을 떼는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르기 시작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