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도산검림의 미식가

-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가지

by 블랙스톤

노형(老兄). 어떻게 느낄진 몰라도 사실 본인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오.

하지만 오늘은 말을 좀 하고 싶은 날이구려.

노형이 만드는 기막힌 술과 소저(小姐)가 챙겨주는 맛있는 음식을 접하니 도저히 감탄을 멈출 수가 없소이다.


이 투명한 잔에 담긴 파란 하늘 같은 술은 처음 들이켤 때에 바람을 마시듯 청량하고 그것이 입에 머물 때는 은은하게 감도는 상쾌한 향이 그 시원함을 더하는구려.

게다가 목을 넘어갈 때는 바람이 흩어지듯이 가볍고 그 후에는 그 기억을 상기시키듯이 뜨거운 기운이 몸에 맴도니 가히 최상급의 술이라 하겠고.

이 안주는 또 어떠하오?

간단해 보이는 음식임에도 내유작고(奶油炸糕)처럼 첫맛은 바삭하며 부드럽고 달콤한데 뒷맛은 깔끔하고 담백하오.

그런 빵 위에 간단한 과일과 곁들여진 이건 우유(牛乳)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소?

이름이 치즈라고? 허허. 타락(駝酪)이나 내죽(奶粥)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라고.

지금까지 나는 우유로 죽을 만들어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렇게 짭짤하면서도 입 안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음식을 만든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소.

이 녹아내리는 식감이 담백한 뒷맛을 받쳐주고 그 위에 마지막으로 상큼한 과일맛과 향이 곁들여지니 이것을 음미하고도 어찌 처음의 그 맛을 그리지 않을 수 있겠소.

가히 술과 음식의 궁합이 천외(天外)의 것이니 이 설 아무개(某)는 다시 한번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사실 이 신비경(神秘境)에 몇 번이고 다시 오고 싶지만 아마도 그럴 수 없겠지요.

이곳의 모든 것이 내게는 생소한 것이나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의 사용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소이다.

아마도 제 앞의 진군(眞君)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겠지요.

아마도 이곳은 선계(仙界) 일 터이니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라, 그저 이 음식과 술을 그저 배부르게 먹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 규칙은 지킬 것입니다. 다시는 노형에게 굳이 신선(神仙)이니 진군이니 하고 부르지 않을 터이니 불편해하지 마시오.

그럼 무엇을 드려야 이곳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겠소이까?


하하하. 노형의 그 담백한 말솜씨와 소박한 마음씨가 이리도 깔끔한 술맛을 탄생시킨 모양이오.

이토록 귀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도 그저 본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을 뿐이라니.

좋소. 무림(武林)에서는 모두 다 아는 내 이야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소.

물론 그것만으로는 삯이 되지 않을 터이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던 이야기까지 노형에게 해드리겠소.

이 정도면 이 특별한 술과 음식의 값으로 충분하지 않겠소이까?


어쩌면 평범하다 할 수 있는 비극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오.

물론 그 비극을 겪은 내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오.

분수에 맞지 않는 보물.

변방의 작은 무가(武家)에서 너덜거리는 고서(古書)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소.

그 낡고 오래된 책은 글씨마저 흐릿해 누구의 관심을 끌기에는 어려웠으나 그 오래된 질감 덕에 서가(書架)에 두기에는 그럴듯했던 모양이오.

평생 무인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그저 책장을 장식하기 위한 책을 구하셨고 그 정리를 하는 것은 총관의 몫이었소.

책을 분류하여 정리하던 총관은 그 낡은 책이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이며 천하제일의 부자로 유명한 여불위(呂不韋)가 남긴 일지(日誌)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리고 그 일지에는 여불위가 만약을 대비하여 숨겨둔 보물의 위치가 적혀있던 모양이오.

충성심이 강하던 그 총관은 아버지에게 바로 사실을 알렸고 아버지는 모두에게 함구할 것을 명했소.

그렇지만 비밀이란 것이 비밀이기 위해서는 나만 알고 있어야 비밀이지 않겠소?

그리 멀지 않은 날에 담장을 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소이다.


처음에는 도둑 하나, 둘 정도이기에 막는 것에 문제가 없었으나 점점 도둑이 아닌 강도들이 쳐들어오기 시작했소.

다행히 한 지역을 대표하는 강자 중 하나셨던 아버지 덕에 어떠한 피해도 없었으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셨소.

처음에는 친하게 지내던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후에는 지역에서 정의롭다고 이름난 명사에게 도움을 청했소.

그래도 담을 넘거나 습격하는 이들이 줄어들지 않자,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소이다.

무림맹(武林盟)에 여불위 일지의 존재를 알리고 보호를 원하며 우리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떼어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것이었소.

그들의 입장에서도 보물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어찌 마다하겠소.

허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밖으로 내보이는 비밀은 비밀이 아닌 법.

무림맹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급하게 파견한 사람들이 도착한 그날 밤, 변방의 작은 무가 설가장은 불타올랐소.

설가장에 살고 있던 짐승들마저 살아남지 못했다오.


아직도 그날 밤의 모습이 선하오.

주변이 모두 불타올라 세상이 붉게 빛나고 사방에는 비명과 핏자국이 선명했던 밤.

어찌어찌 목숨만 붙어서는 겁에 질려 그저 도망칠 생각 밖에는 하지 못했던 밤.

아직 어려서인지 하인과 친구의 개념을 잘 모르던 어린 주인을 위해 옷을 바꿔 입고 죽음을 택했던 이와 온몸으로 가짜의 앞을 막아 적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이들.

그것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소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그 덕에 내 적이었던 이들이 수없이 죽어갔기에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설가장의 모든 이들을 살인멸구(殺人滅口)할 것처럼 굴던 이들도 설가장의 모든 핏줄을 제거했다고 생각한 이후에는 조금 느슨해졌소.

그날 밤의 추적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이들을 척살하였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소.

하루를 꼬박 정신없이 산을 내달리다가 설가장에 사냥한 짐승을 팔던 사냥꾼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소이다.

설가장에서 무인으로 있다가 은퇴하고 사냥꾼으로 지내던 그가 나를 보호해 주었지.

아마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 아니었던가 싶소.

그 눈물에는 겁쟁이 같았던 내 모습에 대한 후회와 증오와 비참함이 가득했었소이다.

사냥꾼의 판단을 따라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설가장을 가보니 타 죽은 시체가 가득하였는데 어느새 도둑들이 다녀갔는지 귀중품은 하나도 없더이다.

그리고 사냥꾼은 용케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냈소.

온몸의 뼈가 부서져 있더군.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건 고신(拷訊)의 흔적이었지.

고문으로 인해 죽음조차 편하지 않았을 부모님의 모습에 다시 한번 울었네.

너무 슬프고 화가 나니 눈물은 별로 나지 않더군.

그저 폐부의 모든 것이 밖으로 끄집어져 나오는 것처럼 악다구니만 흐르더이다.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결국은 무림(武林)이기 때문인가?

사냥꾼은 고개를 저었소이다. 인간세상이기 때문이라더군.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심이 있어 그 욕심을 제어하기 위해 양심이니 도덕이니 법이니 하며 잣대를 만드는 것인데, 무림은 그 잣대가 힘이기 때문이라더군.

무림이 아닌 세상이었더라도 분에 넘치는 보물을 가지게 되었다면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소.

그 불타버린 잿더미와 말라가는 시체들 사이에서 뼈마디가 부서진 부모님의 시체를 끌어안고 복수를 다짐했다오.

사냥꾼은 복수를 포기하길 원하는 듯했지만 그 상황에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겠지.


고수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평생을 무인으로 지내다 은퇴한 사냥꾼은 좋은 스승이었소.

조급해하는 나를 어르고 달래 가며 무공의 기초를 단단하게 잡아주었소이다.

때로는 엄하게 다그쳐가며 가르쳐준 덕에 어설프게 배운 가전무공을 다듬을 수 있었소.

사실 열 살 남짓의 어린 나이에 비급(祕笈)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으니 반쪽도 되지 않는 무공을 익힌 셈이었소이다.

그는 기초를 단단하게 잡아주고 자신이 배운 모든 무공을 내게 가르쳐주었소.

그리고 내 아버지가 익혔던 무공의 특징과 모습을 세세하게 알려주고 가전무공의 방향을 잡아주었기에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소.

사냥꾼은 끝까지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였는데 자신은 그저 기초만 잡아주었을 따름이며 강호의 은원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복수에 실패했을 때 부모님의 위패를 부탁하겠노라 말했소.

제사도 필요 없으니 그저 위패를 만들고 기억만 해달라고. 사냥꾼은 망설이다가 내 제안을 받아들였소.


내가 죽더라도 부모님을 기억해 줄 이가 생겼으니 더 이를 악물고 무공을 연마하였소.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나니 한 가지를 깨닫게 되더군.

나는 무언가를 외우고 이해하는 데에는 그저 평범하였으나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소.

이해할 수 없어도 한번 보면 따라 할 수 있었으며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바르게 힘쓰는 자세로 바꿀 수 있었소이다.

사냥꾼에게 배운 것을 숙련하고 몸을 단련하는 것을 단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소.

그리고 내 한 몸을 간수할 수 있게 되었다 느꼈을 때 나는 낭인이 되었소.

비급을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에 뛰어들었고, 온몸에 늘어가는 상처만큼 내 무공과 명성, 그리고 악명이 늘어났소이다.

설가장의 폐허와 내 기억에 남은 원수들을 찾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소.

물론 아주 은밀하게 알아봐야만 했소.

변방의 무가라도 하룻밤만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이들을 함부로 수소문하다가는 복수를 시작하기도 전에 내 정체만 알리는 꼴이 되어버릴 테니.


십 년. 그렇게 십 년을 굴렀소.

제법 유명한 무사가 되었을 즈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비급 하나를 입수하게 되었소.

안정성 따윈 개나 줘버린 비급서였소.

일부러 불안정한 기(氣)를 만들어 회복하려는 세상의 성질을 활용해 보자는 내용이었지.

그럴듯해 보이는 미친 소리였소.

기가 불안정한 이들은 보통 병자들인데 그런 이들에게 심법을 가르친다 하여 내공을 더 빨리 쌓을 수는 없지 않소?

하지만 세상이 회복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미친 소리였소.

아직도 그 당시 아버지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나는 뭔가 모험이 필요했소.

원수를 내 손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갚아주게 생겼으니까.

나이가 들어 자연사한 원수들을 보며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되든 안되든 그 묘리를 내 무공에 끌어들였소이다.


다시 삼 년 동안 낭인으로 비급을 탐하며 굴렀고 묘리를 터득하여 무공의 기틀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아버지의 경지를 뛰어넘어 한 지역의 패자(霸者) 소리를 들을 수 있었소.

내공을 몸 한쪽으로 몰아 불균형하게 만든 후에 회복하려는 기의 성질을 이용해 내공의 순환을 빠르게 하여 더 큰 내공을 모으는 심법을 만들었소.

그리고 부딪힐 때마다 내공을 흔들어 주변의 기가 상대에게 급작스럽게 많이 흐르게 하여 상대의 내공 흐름에 조그마한 균열을 가하는 무공을 만들었소.

내공으로 싸우는 무림인들에게 내공이 흐르는 감각을 교란시키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는 법이었으니 싸우는 족족 이겼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던 시기였소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대략적인 원수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오.

그 윤곽을 잡은 순간 내 무공에 대한 자부심은 답답함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소.


원수는 정사(正邪)에 걸쳐 넓게 퍼져 있었소.

그 여불위의 부(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공모한 이들은 한 두 세력이 아니었고 그들은 그때에 나눈 그 부로 각기 대단한 세력이 되었지.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소. 오직 그것만 보며 살아왔으니까.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복수를 위해 달리는 것뿐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포기하기에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복수만 보고 달려온 것이 허무해질 뿐이니까.

나의 인생은 이제 행복했던 기억보다 복수를 위해 이를 갈았던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나는 더 열심히 무공을 갈고닦으며 기회를 노렸소. 무공은 아주 차근차근.

대신 낭인으로 원수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에는 얼마든지 고용되어 날뛰어주었소이다.

덕분에 내 악명은 더 높아져만 갔지만 그런 것 따위는 내 고려사항이 아니었소.

어쩌면 복수를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쯤은 미쳐 날뛰던 시기였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