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함께는 '우리'라서(2)

- 마음만은 헐떡이지도, 지치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by 블랙스톤

마지막 축제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것도 뒤풀이라고 해야 할까? 공사 시작일을 알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벽화를 그리던 이들은 벽화를 마무리 지었고 음악을 하던 이들은 마지막 날 보여줄 공연을 준비했다. 사진 찍고 촬영하던 이들도 모여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화면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노인이 처음 걱정했던 혼란은 없었다.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덤덤하게 날짜를 확인하고 그전에 작업을 끝내기 위해 이 동네에 머무는 시간을 조금 더 늘리거나 필요한 연습을 더 할 뿐이었다.

또 하나, 각자 놀기 바쁘던 이들이 머리를 모아 마지막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현실적인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풀어놓지 못하던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노인은 이들이 현실에서 조금 밀려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했다는 듯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이들 역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현실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들 역시 향상심(向上心)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나아지는 방향이 물질적인 부분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에 더 집중되어 있을 뿐이라는 걸, 노인은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동네의 마지막을 위한 준비는 모두 기록되었다. 이들은 웃었고 서로에게 조언하고 그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분명 각자 놀 수 있는 공간을 찾아왔을 뿐임에도 놀이와 의무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그런 젊은이들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노인이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키워 낸 동네였다. 비가 오면 물이 차오르는 하수구의 위치를 알고 있으며 눈이 오면 매번 얼어버리는 자리에는 미리 연탄을 부숴놓았던 동네.

젊은 시절 배가 불러오던 아내의 손을 붙잡고 이 동네에 처음 왔을 때 아내는 노인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웃풍이 스며오는 부엌 한편에서 눈물을 닦았다.

노인이 다가가 손을 잡아주니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던 아내는 나중에 아이들이 크고 나서야 몇 번이나 언덕을 넘어 도착한 이곳이 왠지 유배지나 피난처처럼 느껴져서 서러웠다고, 곧 태어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고 털어놨다.

더 좋은 곳을 찾아서 발품을 팔았던 남편에게 이 서러운 마음을 보이는 것이 미안해서 그저 부엌 한편에서 울먹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그 모습을 들킨 것이 뭐가 그리도 미안했는지 먼저 떠나는 병원의 침상 위에서까지 아내는 그때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때도 노인은 아내의 손을 잡고 그 손등을 쓸어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매번 더 좋은 것들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목에 턱 걸려서 도저히 뱉어낼 수가 없었다.

그걸 뱉어내고 나면 뭔가 자신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아서, 몸 안에 중심추 하나를 잃는 것만 같아서, 노인은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젊은 시절에 삼킨 그 말은 지금까지도 노인의 뱃속에서 덜그럭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덕에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많이 땀 흘리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지만 아내가 떠난 이후 기어이 노인을 이 동네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아내가 먼저 떠나고 뱃속의 덜그럭거리는 것은 단 하루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이리저리 구르며 소리를 낼 때마다 노인은 이를 악물고 그 모서리에 찍히는 추억들을 곱씹었다.

지나고 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어서 노인을 계속 뒤돌아보게 했다. 돌아보는 시야 사이로 웃는 아내가 어른거려 차마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 많은 시간이 서린 동네가 젊은이들의 손길에 변해갈 때 어색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손길이 닿으며 그림으로 변화되거나 무언가로 장식될 때마다 허름한 기억들이 조금 화사해지는 것 같아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에 노인 역시도 마지막 축제를 준비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식들이 불러도 떠날 수 없었던 이곳과의 마지막을 가장 따뜻하게 기억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 만난 그림 그리는 총각은 제일 먼저 작업을 마무리한 후에 노인과 함께 동네를 돌아다녔다.

조금은 조용히 돌아보고 싶은 노인의 마음과는 달리 청년은 항상 노인의 곁에 붙어서 조잘댔다.

귀찮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고 정신사납기도 하지만 노인은 청년이 올 때마다 밥상에 고기반찬을 올리곤 했다.

청년이 고기반찬을 보고 ‘요리도 하세요?’하고 놀랐을 때, 노인은 슬쩍 고개를 들며 ‘요즘엔 마트에서 조리된 거 다 팔아. 그러니까 돈 벌어. 살기 좋은 세상이야.’라고 핀잔을 줄 수 있었다.

핀잔에도 웃기만 하는 청년이 답답해서 노인은 고기반찬을 청년 쪽으로 더 밀어주곤 했다. 이거라도 먹이면 저 실없는 녀석이 속이 단단한 녀석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청년은 동네의 마지막과는 별개로 노인이 집을 정리하는 것도 도왔는데 여전히 말이 많았다. 어쩌면 동네를 돌아볼 때보다 더 말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텅 비었다고 생각했던 집 안에 뭐가 그리도 많은지, 뽀얗게 쌓인 기억에 몇 번이나 주저앉을 때마다 청년은 같이 앉아서 주절거렸다.

노인은 가만히 청년의 말을 듣고 가끔은 대꾸도 했다. 대부분은 귀찮아했지만 가끔 청년이 오지 않는 날은 괜히 어색해서 라디오라도 켜야 하나 싶었다.


이사 준비와 축제 준비가 무사히 끝나고 노인의 이사 전날, 마지막 축제가 시작되었다.

여전히 지들 맘대로 중구난방의 놀이가 시작되었다.

드론 날리는 놈, 진행하는 놈, 저 멀리서 연주하는 놈, 걸어가다가 연주에 맞춰 갑자기 춤추는 놈, 어디서 구해왔는지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도 보였고 고양이를 머리에 얹고 돌아다니는 여자도 보였다.

저 소녀인지 아가씨인지 어려 보이는 여자는 얼마 전 꿈에서 본 사람이랑 꼭 닮았네.

노인이 갸웃거리자 그런 노인을 발견한 머리 위의 고양이가 같이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소녀의 머리를 툭툭 쳤고 소녀는 노인을 발견하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의 초대를 기억하고 찾아온 건가? 꿈이 아니었나? 노인이 멈칫하는 사이에 처음 만난 그림 그리는 총각이 다가왔다.


“이제 시작이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제 그림 먼저 보셔야죠. 그리고 좀 웃어요. 리장님도 지금 촬영되고 있다고요.”

“리장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북한 놈이냐? 아무리 줄임말이라도 기분 나쁘다고.”


발끈하는 노인의 모습에 청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노인은 먼저 걷는 청년의 뒤통수에 ‘망할 놈!’하고 일갈을 던진 후 소녀가 있던 자리를 살폈다.

소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잘못 본 거였겠지. 혹시라도 진짜라고 한다면 소녀가 이 축제를 잘 즐기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게 꿈이든 아니든 속을 모두 털어놓는 대화는 노인에게 후련함과 편안함을 주었다.

그런 마음이 들었기에 이사 준비를 하면서도 적당히 울적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고. 그리고 노인은 그 적당한 울적함마저 덜어내게 한 청년의 뒤통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묘하게 기분 나쁜 뒤통수를 보며 노인은 조금 투덜거렸다.

처음 그림을 부탁했을 때, 보수가 얼마냐고 물을 때부터 얄밉고 싹수가 노랗다고 생각하긴 했다.

여전히 당돌하며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저 청년은 꼭 노인을 ‘리장’이라고 부르곤 했다.

처음 노인을 향해 불렀던 대머리 대장님이란 말도 기분이 나쁘지만 그걸 꼭 ‘리장’이라고 줄여서 불이는 것이 더 기분 나빴다.

나이가 있으시니 대장보다는 이장 쪽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고? 에이, 망할 놈. 그럼 그냥 이장이라고 부르던가 꼭 대머리를 강조하는 것처럼 ‘리장’이라고 부를 건 또 뭐야.

조금만 더 젊었다면 저 청년의 뒤통수를 아주 세게 후려쳤을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청년이 그린 그림은 처음 노인이 그림을 그리라고 했던 이웃집 담벼락에 그려져 있었다. 지나면서 몇 번 보긴 했지만 완성된 전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건 일종의 풍경화였다.

이 동네와 집집마다 그려진 이웃들, 그리고 그 외곽의 춤추고 노래하는 청년들. 그들의 사이에는 자신으로 보이는 대머리 노인이 있었다.

유난히도 크게 그려진 대머리 노인은 춤을 추는 듯한 자세였는데 목젖이 보일 듯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림은 옆집으로 이어졌는데 그 목젖이 보일 듯 크게 웃는 대머리에게 점점 머리가 봉두난발로 자라고 있었다.

아직 밤톨같은 머리를 한 어린아이들이 보이고 아이들은 아빠를 따라 봉두난발로 크게 웃었다.

그 뒤에 뛰는 아이들을 걱정하듯 한쪽눈썹을 살짝 찌푸린 여자는 작게 웃으며 봉두난발 아빠의 소매를 뒤에서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집에 가서 봉두난발은 풍성하다 못해 망나니 같은 머리로 아주 고운 여자의 손을 잡고 뛰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경찰 몇이 뛰어오는 그림이 있었다. 경찰에 쫓기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망나니와 아주 고운 여자는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하도 환하게 웃고 있어서 뒤를 쫓아오는 경찰의 모습이 둘의 만남을 즐거워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벽화를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서 아내와 아이를 찍었다. 그렇게 몇 장의 사진을 찍는데 청년이 다가와서는 노인의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에이, 참. 어른들은 왜 그런지 몰라. 잘 봐봐요. 가족사진은 다 같이 찍는 거예요. 소중한 사람들만 찍는 게 아니라 ‘나’도 포함해서 ‘우리’가 되도록 찍는 게 가족사진이라고요.”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청년이 벽화의 가족이 잘 나오게 찍는 것을 어깨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얄미운 말만 하는 놈이지만 사진은 잘 찍네.

노인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뭔가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청년은 사진을 찍고는 휴대폰을 돌려주며 그런 노인을 보고 씩 웃었다.


“충분히 고마워하셔도 괜찮아요. 저는 칭찬받을 짓을 했으니까. 저 잘했죠? 대견하죠?”

“그래. 고맙다. 고마워.”


말을 하고 나니 가슴이 조금 편안해졌다. 내뱉고 나니 후련해지는 걸, 그 세 글자가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내뱉지 못했을까 싶었다.

청년은 노인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그리고 노인의 손을 끌고 동네 안으로 걸었다.

“아직 봐야 할 것들이 많아요. 오늘을 위해서 노력한 애들이 많아요. 가서 리장님이 응원해 주고 칭찬해 주셔야죠.”

“망할 놈. 오늘이 지나면 이 동네도 없어질 텐데, 이장은 무슨.”

“무슨 소리예요. 드론까지 띄워서 찍는 애들 안 보여요? 이제 우리 동네는 영원히 인터넷에 박제되는 거라고요.

앞으로 우리가 젊은 시절을 추억할 때 리장님도 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거라고요. 우리 동네의 가장 깨어 있는 어른으로.”

“나이 많은 게 무슨 유세라고.”


노인은 중얼거리면서도 청년이 잡아 끄는 손을 빼지 않았다. 오늘은 지나갈 것이고 다시 모두는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 하루뿐인 ‘우리 동네’는 노인이 이사를 가면서 사라질 것이고 이들과 노인은 다시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은 아무렴 어떻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언젠가 기를 쓰고 경찰을 피해 장발을 유지할 때에도 그렇게 머리를 길러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하지 말라고 하기에, 도망 다니면서도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이었다.


젊은 이들과 그림과 노래와 춤사위 사이를 걸어 들어가며 노인은 아주 살짝 어깨를 흔들었다.

오늘은 이 노래와 춤을 따라 약동하는 가슴을 조금은 자유롭게 풀어두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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