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함께는 '우리'라서

- 마음만은 헐떡이지도, 지치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by 블랙스톤

그러니까. 어쩌다 여기에 앉아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럴 때마다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정수리를 얼얼하게 때리는 기분이다. 잠깐 한눈을 팔면 뭘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다.

대개 세월에 대한 자각은 사소한 것 사이에 숨어 있는 법이다.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선 정작 뭘 사러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을 때, 도저히 찾지 못한 티브이 리모컨이 화장실 변기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을 때,

외출하려는데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아 찾다 보면 뒷주머니에서 나올 때, 사소한 일상 속에 건망증이 스며든 경험을 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나이가 들었나?’ 하는 말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익숙한 일상 속에서 예전에는 상상도 해보지 않은 낯선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 왠지 모를 거북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거북함을 계속 마주하면 어느새 무력감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젊을 때야 그저 한번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정년퇴직한 지도 꽤 된 몸으로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 수 밖에는 없다.


또다시 생각이 새어나가고 있을 때, 마스터가 잔 하나를 쓱 밀어준다. 그 언젠가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먹었던 칵테일과 비슷하게 생겼다.

아, 그래. 내가 한 잔 더 달라고 했지. 빈 잔을 살짝 옆으로 밀고 새 잔의 칵테일을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함. 청량함. 살짝 달달했다가 묵직한 향이 퍼지는 끝 맛. 좋다. 그리고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서 더 좋다.

젊은 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다가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지. 요즘 친구들은 어떤 술을 먹나도 궁금했고. 그래서였구나. 그래서였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천천히 잔 속의 술을 음미한다. 서너 번에 걸쳐 술을 다 마시니 다시 마스터가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와 마스터의 눈총을 받던 소녀가 어느새 안주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고양이와 산책을 다녀왔다고 말하는 그녀를 가까이서 보니 어려 보이는 아가씨인지 조숙한 소녀인지 잘 모르겠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쌩긋 웃으며 돌아서는데 머리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네. 요즘 애들에겐 저런 게 유행인가.

예쁘고 귀여운 사람 위에 멋있고 귀여운 것이 앉아 있으니 더 귀여워 보이긴 하네. 안주를 집어 먹고 술을 다시 마신다.

이제야 고즈넉한 음악이 귀에 들어온다. 그 언젠가 들었던 것만 같은 음악이었다. 친숙하면서도 왠지 그리운 감정이 들게 하는 음악.

잠시 눈을 감고 그 몽글한 감성을 음미하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고양이가 바 위에 올라와 앞발을 몸 안으로 품으며 둥글게 앉아 있다. 눈을 맞춰주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괜히 웃음이 난다.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하고 꼭 다문 입이 꾹 눌러보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저 작은 얼굴에 어떻게 눈코입이 모양 좋게 모여 있는 건지.

왠지 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아까 문이 열리면서 끊겨버린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만 같아서 놀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내키진 않았습니다. 반대표를 던졌어요. 저 혼자 살고 있는 집이지만 ‘우리 집’이니까.

안방의 문틀에는 아이들이 자랄 때 키를 쟀던 흔적이 남아 있고, 주방에는 아내의 손 때 묻은 조리도구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방과 안방의 문턱은 하도 밟아서 패인 자국이 모두 검게 변했죠.

그래요. ‘우리’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아직 그곳에 남아 있기에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이들은 미련이라고, 추억으로 남겨두라지만 그게 쉽지는 않습디다.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아이들과 손주는 물론 반갑지만 매일 보는 아내의 사진과 손때 묻은 벽지가 저를 달래줍니다.

가끔 튀어나오는 옛날 물건들 덕에 웃음을 짓는 날도 있어요.

물론 압니다. 집착할 생각은 없습니다. 재개발은 확정됐고 이곳은 없어질 겁니다. 사람들은 떠나고 있습니다. 저도 떠날 겁니다. 아내가 없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슬쩍 손을 들어 물을 부탁하려는데 눈치 빠른 마스터가 먼저 물 잔을 내민다.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물을 마신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잔을 내려놓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칵테일. 음악. 그리고 바에 슬쩍 기대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젊은이. 아, 정정해야겠구나. 손을 집어넣어 배를 문지르다가 고양이에게 얻어맞고 있는 젊은이.

굴하지 않고 고양이의 배를 조물거리며 연신 앞발에 얻어맞으며 실실 웃고 있는 조금 모자라 보이는 젊은이. 그래, 젊은이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것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뭔가 다른 것을 해보려 한 것이 얼마만일까.

아내를 보내기 전일까. 아내와 함께 있을 땐 뭔가 다른 것들을 해볼 생각을 했었나? 그때는 그저 살기에 바빴나?

한참이나 풀려나가던 생각의 실타래를 다시 붙잡으니 엉뚱하게 어릴 적 아이들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었다.


노인이 되면 추억에 산다더니. 조금만 한눈팔면 그것에 얽힌 추억들이 마구 떠오른다. 살아온 세월 중에 인상 깊은 것만 추슬러도 한가득이라 새로운 기억은 발 디디고 설 공간이 부족하다.

나이 든 현실은 매일이 아프고 답답하다. 이 느려진 발걸음과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답답하지 않으랴.

어쩌면 그래서 새로운 기억을 자꾸 잊는지도 모른다. 추억에는 아픔이나 어려움이 없으니까.


“이사 가는 집이 생기면서 동네는 한산해졌습니다. 그리고 빈집에 낙서들이 생겼죠. 어느 날 청년 하나가 그림을 그리다가 저를 발견하고 도망가더군요.

가까이 다가가니 꽤 잘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다음에 청년을 만났을 때 도망가려는 청년을 붙잡았습니다. 물론 제가 뛰어가서 잡을 수는 없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우리 집 담벼락 먼저 그림 좀 그려줘! 청년은 소리를 듣고도 한참이나 더 뛰었죠.

그리고는 돌아와서 하는 말이, 얼마 주실 건데요? 였습니다. 아주 싹수가 노란 놈이었죠.


청년을 불러다가 우리 집과 붙은 빈집 셋을 알려주고 앞으로 어디가 나갈 예정인지를 알려줬습니다.

이 동네가 모두 자네 도화지가 될 예정이니 도망갈 필요 없이 그리면 된다고. 조합에는 내가 이야기해 줄 터이니 너무 선정적인 그림만 아니면 괜찮다고.

조합에서는 공사 기한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문제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조합의 허락까지 받아다 주니 청년은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하더군요.

몰래든 허락을 받든 어차피 그리던 거였는데 그게 뭐가 그리 고맙다고.


다음 날 청년이 페인트 통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왔습니다. 자기 말로는 무슨 물감이라던데 잊어버렸습니다. 그림이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더군요.

뚝딱뚝딱 그려낼 줄 알았더니 밑그림에, 채색에, 수정에, 뭔가 복잡했습니다. 어차피 부술 거 그냥 편하게 그리라고 말하니 제대로 그리는 게 편하다고 합디다.

사실 재개발이 확정되고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뭔가 답답했습니다. 그치들은 재개발에 찬성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깨부숴져 나갈 예정인 추억들을 보며 심란하던 차에 그림 그리는 걸 보면서 앉아 있으면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아서 청년이 그림을 그리러 오면 함께 움직였습니다.

접이식 자석 바둑판을 하나 사서 청년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뒤에 앉아 바둑판 위에 기보를 따라 바둑돌을 올렸습니다. 그걸 신기하게 봤는지 하나, 둘, 다른 청년들이 다가와서 내게 허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빈집이 늘어나고 오가는 동네 사람들도 적어진 판국에 엉뚱하게 외지에서 청년들이 슬금슬금 들어와서는 빈 동네에서 조금 놀아보면 안 되냐는 겁니다. 그게 참 이상했습니다.


비어 가는 동네가 아니었다면 낯선 이들이 찾아와서 동네를 도화지 삼고, 배경으로 삼아서 뭔가를 하는 것들이 못마땅했을 텐데, 다시 북적거리는 게 괜히 반갑더란 말입니다.

조합에서는 여전히 공사에 방해만 하지 말라는데 그림이 그려진 골목 사이에서 지들끼리 그림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공사에 방해가 될만한 일은 아니었지요.


정신 차리니 색다른 것을 찾는 젊은 이들이 주변에 모여있더군요. 더 번잡스러워지기 전에 규칙을 정했습니다.

공사에 방해되지 않기, 동네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기, 쓰레기는 한쪽에 모아두기, 서로의 놀이를 방해하지 않기, 술은 동네 밖에서 먹기.

규칙을 정하면서도 이거 지킬 놈이 얼마나 되나 싶었습니다. 놀러 온 곳에서 이거 하지 말고 저거 하지 말라고 하면 보통은 그냥 안 놀러 가고 말지 않습니까.

저도 너무 많아진 사람들에 그걸 원한 거였는데, 이 젊은 이들은 그것만 지키면 비어 가는 동네를 대상으로 놀 수 있다는 것에 더 좋다고 뛰어오더군요.


한 달이 넘도록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리 때는 입소문이 나려면 시간이 좀 걸렸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아니라서 별 놈들이 다 와서는 희한한 짓을 하면서 동네를 놀이터로 삼고 있습니다.

바닥이 뻥 뚫린 절벽 같은 그림을 바닥에 그려서 길이랑 헷갈리게 하는 놈도 있고 빈집의 담벼락 몇 군데를 뚫어서 숨바꼭질을 하는 놈들도 있더군요.

사진 찍는 놈, 촬영하는 놈, 춤추는 놈, 노래 부르는 놈, 악기 연습하는 놈, 그 와중에 팀원 구하러 오는 놈도 있더이다.

별 희한한 놈들이 다 모이는 데도 별 문제가 없더군요. 그게 신기해 처음 만난 청년에게 물으니 웃으며 당연하답니다.

마음껏 놀만한 곳이 생겼는데 여기서 멍청한 짓을 할 놈은 없다고. 게다가 몇 개월짜리 시한부 공간이긴 하지만 공짜로 주어진 공간에서 허튼짓을 하는데 시간을 쏟을 놈은 없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만 가만히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문신한 놈, 염색한 놈, 헐벗은 여자들에 남자처럼 입은 여자까지. 뭐가 그리 좋은지 내내 웃고 있더군요. 그들을 가만히 보는데 나도 괜히 웃음이 났습니다.

처음 만난 그림 그리는 총각이 왜 웃냐고 묻더군요. 그 총각은 머리를 길러서 말총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그게 또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게 눈에 들어와서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뾰로통한 표정이 곧 삐져서 말도 안 할 것만 같아서 청년에게 말해줬습니다.

내가 젊을 적에는 머리를 기르는 게 불법이었다고. 그래서 그 당시의 많은 남자들은 딱 어깨를 넘지 않을 정도로만 더 풍성하게 머리를 길렀다고.

불법이 아닌 선에서. 그리고 일부는 머리를 기르고 경찰을 피해 도망 다녔다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 것 아닌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그 마음 하나로 경찰을 피해 다니고 남들의 눈총을 기꺼이 받았다고.

그중에 하나가 난데 그때는 왜 말총머리를 할 생각을 못하고 망나니처럼 산발만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고.

조금 예쁘게 길렀으면 경찰도 한두 번은 봐주지 않았을까 싶더라고.

지켜보는 사람도 따라 웃게 하는 저 기분 좋은 웃음을 나도 할 수 있었다면 그때의 경찰들도 함께 놀아주지 않았을까 싶어 졌다고.


청년도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지금은 대머리인 제가 장발에다 망나니 머리스타일을 했다니 웃기겠지요. 자꾸 머리를 흘끗거리며 웃기에 말총머리를 한번 확 잡아당겨줬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말총머리가 아니었는지, 그날부터 젊은 친구들이 하는 것들이 조금씩 궁금해지더군요.

함께 노래도 부르고 동네에서 나와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춤은 따라 출 수가 없으니 악기를 연주해줬는데 풀피리는 처음 듣는다며 신기해하더군요.

솔직히 재밌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지 않고 노는 것이 얼마만인가 싶더군요. 머리도 길러보고 싶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죠.


참 즐거웠습니다. 예정됐던 것보다 공사가 조금 지연되었고 덕분에 젊은 친구들과 더 길게 놀았으니 여한이 없어야 하는데, 오늘 조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이사를 나가기로 한 날이 지나면 동네 전체가 공사에 들어간다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 다가온 거죠.

마지막이란 단어는 언제 들어도 이렇게나 가슴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래서 조금 술을 마시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 놀이를 즐기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젊은 친구들에게 말해줘야 하겠죠. 젊은 친구들 덕에 저도 늘그막에 축제를 즐겼습니다.

축제가 끝나면 조금 더 공허해지겠지만 이 기억은 추억들 사이에도 충분히 자리를 잡을 것 같습니다. 아쉬면서도 마지막 축제날이 기대도 되는, 그래요, 설레고 있습니다.”


마스터는 분명히 바에 들어올 때는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쪼글거리는 게 나보다 훨씬 형님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백발은 그대로지만 피부가 팽팽했다.

그런 그가 환하게 웃어주자 바의 음악도 경쾌해졌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과 웃음에, 피부든 백발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 마스터를 보며 크게 웃었다.

소녀인지 아가씨인지 모를 예쁜 젊은이는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고 그 앞의 고양이도 앞니가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고양이도 웃을 수 있네? 늙은이가 피부가 팽팽해지기도 하고 기분에 맞춰 음악도 바뀌는데 그게 뭐 이상하겠나.

그냥 지금은 늙은이의 주책 같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게, 지금의 나이에도 즐겁게 놀아서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게, 몸이 따르지 않아 슬픈 것보다도 마음이 젊음을 따라 뛴 것이 재미있었다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 노인은 추억 속에 산다. 노쇠한 몸에 갇혀 홀로 팔딱대기만 하는 마음이 점점 지쳐가면서 꿈꾸는 예전의 꿈에서 산다.

하염없이 과거만 바라볼 것만 같던 마음이 아직 팔팔하게 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이 또한 즐거운 추억이 되어 줄 것이라서, 목젖이 보이도록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아주 조금, 장발 머리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혹시나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조금은 자라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한 스푼 생겼다. 그럴 리 없겠지만.

기쁘고 웃는 와중에도 실없는 생각이 실타래처럼 스르륵 풀려나가는 것이 웃겨서, 집중력이 흐트러져 자꾸 딴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나는 한참이나 웃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