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라는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볕은 따뜻하고 바람도 살랑이는 딱 걷기 좋은 선선한 날씨였다.
쁘니가 살았던 그곳. 간절함을 통해 도착한 곳은 쁘니가 거닐었던 거리였고 두 번째라고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것과 별개로 에미는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슬쩍 돌아본 뒤편에는 이미 문이 사라져 그저 텅 빈 골목만 보였다. 돌아갈 길마저 사라졌지만 그래도 차마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생에 두 번째 외출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하게,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다니.
에미는 마스터 몰래 뭔가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야옹. 냐아아아.
쁘니는 저만치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우두커니 서 있는 에미를 향해 낮게 울며 자리에 앉았다. 마치 여기까지는 괜찮다는 듯.
몇 번이나 쁘니가 울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에미는 얌전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쁘니를 향해 일단 한 걸음 내디뎠다.
첫걸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온갖 걱정과 벌써부터 몰아치는 후회가 그 걸음에 잔뜩 매달려 다음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야옹. 냐아아아.
낮게. 그렇지만 위협적이지 않게. 어르듯이. 평소의 고음과는 다른 그 울음소리는 에미가 두려움에 젖을 때마다 토닥이듯 들려왔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쁘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가만히 에미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가끔 아주 천천히 낮게 울어주면서. 그 모습은 더없이 눈부시고 예뻤다.
노란색 털은 햇볕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그 황금빛 사이에서 뚜렷한 초록색과 파란색의 눈이 보였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황금빛 눈이었는데 마스터의 선물을 받은 이후로 초록, 파랑 오드아이가 되었다. 사실 황금이든 초록이든 파랑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저렇게 예쁜 생명체가 가만히 앉아 얌전하게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이 그저 기쁠 뿐이었다.
에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야옹. 냐아아아.
걱정과 후회는 뒤에 두고 앞에 있는 쁘니만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저 앞에 앉아있는 쁘니는 너무도 환하게 빛났다.
산책을 나오지 못해서였는지 시무룩하게 기운이 없는 모습이 아니라 가장 찬란하게 생기를 빛내는 듯한, 쁘니가 보여주는 지금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무섭다는 이유로,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외면해 버리면 이 ‘순간’은 그저 지나가버릴 테니까.
적어도 이바구에서 겪은 몇 번의 이야기에서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기회와 같았다. 긴 인생을 지탱할 가장 빛나는 하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
야옹. 냐아아아.
에미는 느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온갖 걱정과 후회가 가득한 것은 여전했지만 조금씩 그것들을 털어냈다.
오직 앞만 보면서. 저 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기다리는 쁘니를 향해서.
그렇게 서너 걸음을 더 걷고 나니 살랑이는 바람이 조금씩 느껴졌다. 그 바람 사이로 햇볕도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그저 쁘니의 곁에 가까이 가겠다는 목표로 걸은, 겨우 서너 걸음의 차이였을 뿐인데.
어느새 조금씩 바람과 햇살, 그리고 주변의 모습들이 또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주변의 변화에 신기해하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첫걸음을 뗄 때에 자신도 모르게 시작한 혼잣말도 멈추지 못했다.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불안한 건 불안한 거라서 도저히 혼잣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계속 다독이고 말해주지 않으면 주변의 작은 변화에도 놀라 당황해서 당장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도망칠 것만 같았다.
야옹. 냐아아아.
마침내 쁘니의 곁에 다다랐을 때 에미는 ‘이건 산책이야, 외출이 아니고, 가출도 아니고, 산책이야. 그러니 괜찮아.’라고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아직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쁘니가 먼저 다가와 에미의 다리에 몸을 비벼왔기 때문이었다.
에미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서 바로 쁘니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평소와 달리 꽤 길게 쓰다듬었음에도 쁘니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파고들거나 바닥에 누워 배를 보이기도 했다. 가끔씩 쁘니는 초록과 파란, 그 두 눈을 들어서 에미를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깜박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에미는 그 행동을 통해 쁘니가 자신에게 뭔가를 전달하려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저 쁘니가 뭔가를 주려 한다는 것이 기분 좋아져서 엉덩이도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에미의 손길을 느끼던 쁘니가 작게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은 골골송을 듣기 위해 에미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쁘니가 골골거리는 리듬 사이로 바람을 타고 주변의 이야기가 천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람 속에는 어느 집 앞 화분의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 화분은 쁘니가 할머니와 함께 하면서 매일 보던 화분이었는데 주인은 자신이 화초 키우는 것에 재능이 없다고 하면서도 여름이면 볕이 잘 드는 곳에 내다 놓고 겨울이면 집 안으로 들이곤 했다.
물을 주는 것도 거른 적이 없어서 잎사귀에는 먼지가 끼일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화초가 자꾸 시들어버리는 건 물을 너무 많이 줬기 때문이란 걸, 할머니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주인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엔 몰래 실린 담배 냄새가 있었다.
쁘니가 할머니의 집에 들어가기 전엔 자기 방 창문을 열고 마음껏 담배 연기를 날리며 주변과 투닥대던 청년은 어느새 집에 부인과 아이를 두고 문 밖 골목 사이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가 되었다.
그리고 또 바람 사이로 삐걱거리는 리어카 소리도 있었다.
할머니가 사라진 자리로 목에 수건을 두른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밀고 들어와 종이를 담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니면 종이 박스를 내어주지 않던 슈퍼 사장이 이제는 새로운 할아버지에게 박스를 내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괜히 서운했다.
그러다 쁘니는 그 할아버지에게서 희미한 강아지 냄새를 맡았다.
어쩌면 저 할아버지의 집에는 하루 종일 할아버지만 기다리는 작은 강아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강아지의 간절함이 쁘니의 간절함보다 못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니, 할머니가 잊히는 것도 어쩔 수는 없다고 쁘니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에미가 진정되면 자리를 옮기고 싶어졌다.
바람에, 햇볕에, 이 모든 풍경에 쁘니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곳은 쁘니의 간절함으로 도착한 곳이기 때문인지 쁘니가 느끼는 감정을 에미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에미는 기뻤다.
쁘니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귀여워하는 것이 아니라 쁘니도 에미를 생각해 준다는 것이.
어쩌면 쁘니의 산책이 에미에게도 기쁜 일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실린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점점 선명해지는 느낌이라 마지막으로 몇 번 더 쓰다듬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쁘니는 온몸의 기지개를 쭉 편 후 경쾌하게 움직였다. 그 씰룩이는 엉덩이를 따라 걸으며 에미는 한결 가벼워진 발을 느꼈다.
쁘니가 가진 산책을 향한 간절함은 결국 할머니와의 '순간'을 향한 간절함이었다는 걸 조금 알게 되었기에, 에미는 내딛는 발길에 더욱 힘을 주었다.
찬란한 ‘순간’은 머무르고 싶다고 머무를 수도 없는 거라서 결국 다 지나가버린다.
쁘니에게 가장 찬란했던 할머니와의 순간들은 이미 지나갔고 쁘니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에미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쁘니가 지금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뿐이다.
할머니가 떠나가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곁에 내가 함께 있다는 걸, 쁘니가 받아들여줄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것.
이건 쁘니를 위해 에미가 해줘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피할 순 없지.
경쾌하게 흔들리는 쁘니의 엉덩이를 따라 걷는 에미의 발걸음도 점점 쁘니를 따라 경쾌해지고 있었다.
세 개의 골목을 지나 하나의 큰길을 건너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놀이터였다. 아직 하교시간이 되지는 않았는지 놀이터는 한산했다.
쁘니는 그곳에 도착하자 익숙하다는 듯 한쪽 벤치에 휙 하고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 에미를 쳐다보는 폼이 와서 너도 앉으라는 것 같아 그 옆에 앉아 쁘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벤치는 살짝 늘어진 나뭇가지로 그늘져 시원했다. 바람이 살랑이면 살짝 햇볕이 들었다 나가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자리였다.
쁘니는 눈을 감고 앞발을 몸 안으로 품으며 앉았다. 이바구에 온 지 며칠 만에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라서인지 노랗고 포동한 것이 따뜻해 보였다.
‘진짜 식빵 같네.’ 에미의 혼잣말에 쁘니가 슬쩍 눈을 떴다가 금방 눈을 감았다.
바람에 실린 쁘니의 감정 덕에 가끔 할머니와 쉬던 벤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에미는 쁘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가끔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와 아이가 천천히 보폭을 맞추어 놀이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연신 엄마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엄마는 이따금 아이와 눈을 맞추면서도 신난 아이가 뛸 때마다 넘어지지는 않을까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놀이터에 들어왔을 때 아이는 신남을 주체하지 못하고 냅다 미끄럼틀을 향해 뛰었다.
엄마는 아이를 걱정하다가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오른손을 들어 턱을 감싸 쥐었다. 무언가 통증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도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면 손을 흔들어주고 환하게 웃어주었는데 그 모습이 감쪽같았다.
슬쩍 내려다보니 쁘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가 아픔을 참는 것을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아이를 보는 순간은 아픔도 잊는 건가.’ 에미의 혼잣말에 쁘니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괜히 머쓱해진 에미가 ‘그럼 그냥 잘 참는 사람인가.’라고 하자 쁘니는 아예 반응도 없이 무시해 버렸다.
괜히 골이 나서 쁘니의 머리를 조금 세게 마사지하는데 약간 억눌린 신음이 미끄럼틀 쪽에서 들려왔다.
엄마가 턱을 붙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아마도 참던 통증이 갑자기 심해진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소리를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던 아이도 들었다는 것이었고 아이는 웃으며 엄마에게 다가왔다가 금방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웃어 보이려는 것 같았는데 통증이 심했는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찡그림이 되었다.
“엄마. 아파?”
“응. 괜찮아. 엄마 잇몸이 살짝 아픈데. 곧 괜찮아질 거야.”
“엄마, 아프지 마.”
“엄마 괜찮아. 엄마 이따가 치과 다녀와야겠다.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잠깐만 이대로 있다가 금방 일어날게. 엄마 정말 괜찮아.”
“치과. 아파! 아프지 마. 엄마아.”
아이는 금방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크게 울었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랴 통증에 끙끙대랴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엄마가 주저앉아 아이를 꼭 안고서 토닥여주자 아이는 조금 후 진정이 됐는지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엄마, 어디가 아파? 보여줘.”
“여기가 살짝 아픈데, 정말 엄마 괜찮아. 엄마 웃고 있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엄마는 아이에게 턱을 가리켜 보였다. 아이는 뭔가 온몸에 힘을 주는 듯하더니 있는 힘을 다해서 엄마의 턱에 후 하고 바람을 불어주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후 하고 불어주는 아이는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엄마의 아픔을 낫게 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살랑이는 바람 사이로 엄마는 아프면서도 그런 아이가 대견한지 아이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고마워했다.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 그 자체였고 그런 세상이 아픈 것이 무엇보다 두렵고 힘들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아이는 온 힘을 모아 엄마라는 자신의 세상을 고쳐주고 싶었던 것일 테고.
쁘니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전해지는 슬프고 아련한 감정으로 쁘니가 지금 할머니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할머니의 상처를 끊임없이 핥아주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에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쁘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미에게 흘러들던 슬픔과 아련한 느낌이 사라졌고 이내 그 사이에 고마움과 안도의 감정이 전해졌다.
에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세계를 잃은 쁘니가 거부감 없이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해 주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조금씩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것도 고마웠고. 산책을 시작할 때 첫걸음을 떼지 못해 힘들어하던 에미를 기다려주고 낮은 소리로 응원하며 함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줬던 것도 고마웠다.
그런 에미의 무릎 위로 쁘니가 올라왔다. 그리고 몸을 비비며 자신이 있다는 듯, 함께 있다는 듯, 작은 골골송을 불러주었다.
에미와 쁘니는 한참이나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함께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아직 한참이나 밝았다. 어딘가에 숨거나 기대지 않고서는 어떤 슬픔도 기쁨도 가릴 곳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