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라는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
에미는 최대한 처량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는 흔들의자에서 고개만 돌린 상태였다.
손에 든 책을 덮지 않고 여전히 들고 있는 것이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거절이겠지. 에미는 마스터가 슬쩍 미간을 찡그리는 것을 보면서 급하게 말을 이었다.
“밥도 제가 주고 똥도 제가 치우고 산책도 제가 시킬게요.
털 날리면 제가 다 치울게요. 아니, 털 안 날리게 조심할게요.
쁘니도 조심시킬게요. 손님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잘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키우면 안 될까요?”
마지막 세 마디의 말은 겨우 내뱉었다. 에미의 말이 이어질수록 마스터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기에 에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떨렸다.
마스터는 미간에 골을 깊게 새긴 상태로 가만히 에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에미의 발치에 앉은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마스터의 눈빛을 받자 최대한 단정하게 앉아서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을 발사했다.
에미는 그런 고양이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헤실헤실 웃음을 보였고 마스터는 미간의 골을 더 깊게 만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미는 그 한숨 소리에 얼른 한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약속!이라고 크게 외쳤다.
마스터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끌어와 흔들의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끄트머리에 앉았다.
“차사는 아무 말도 없었나?”
“친구가 생긴 걸 축하한다고 하셨어요. 이름은 이쁜이, 나이는 다섯 살이래요.
저는 그냥 쁘니라고 부르려고요. 기생충이나 병은 없고 길거리 생활을 해서 그런지 식탐이 좀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금방 뚱땡이가 된다고. 뚱땡이가 돼도 귀여울 것 같아서 괜찮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뚱땡이가 되면 금방 차사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고 하셔서 식단은 조금 조절하려고요.
아주 영특한 녀석이래요.
간절함으로 ‘이바구’로 향하는 문을 열었던 데다가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 ‘생生과 사死의 경계境界’에 머물렀던 것이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인지 원래도 똑똑하던 녀석이 훨씬 더 특별해졌다고 하네요.
똑똑한 만큼 귀여운 건가?
거기까지만 말하고 태블릿 PC에 연락이 들어와서 급하다고 제게 문만 열어주고 바로 가셨어요.
아, 산책. 길거리가 익숙한 녀석인데 할머니와 살면서도 주기적으로 리어카를 타고 동네를 돌아서 아마 산책을 해줘야 할 거라고 했어요.
그것도 제가 할게요. 마스터는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제가 키울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키우면 안 될까요?”
에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간절한 자세와 표정을 취했고 고양이는 그 곁에 단정하게 앉아 눈을 반짝거리며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작게 울었다. 냐아아옹.
에미는 그 울음소리에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쁘니야 그렇지이?’ 하고 중얼거리며 헤실거렸고 고양이는 그런 에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발로 툭 치고는 마스터만 바라보았다.
그제야 다시 에미는 간절한 자세와 표정을 취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마스터는 한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슬쩍 ‘김차사, 이 어리한 놈이!’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이내 이마에서 손을 뗀 마스터의 시야에 보인 것은 고새를 못 참고 간절한 자세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로봇처럼 고개만 돌려 고양이를 보고 있는 에미였다.
고양이는 슬쩍 그런 에미를 보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한 두 번 기이奇異를 겪었다고 영물靈物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보통의 자질을 가지고선 힘든 일이지.
그래서 이곳에서 살아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군.
네가 하나쯤 책임을 가질 때도 됐지. 하지만 명심하거라.
네가 키운다고 해도 온전히 자유의지가 있는 생명이니 모두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럼요! 잘하겠습니다! 쁘니야! 여기서 나랑 같이 살자! 우리 예쁜 쁘니이이.”
“일이 더 생기는 것인데 그리도 좋을까.”
에미는 마스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발치의 고양이를 집어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잠시 참아주던 고양이는 솜방망이 주먹을 날리며 대응했고 퍽퍽 소리 나게 얻어맞으면서도 에미는 손을 놓지 않고 싱글벙글 웃었다.
마스터도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살짝 웃던 마스터가 손짓을 하자 고양이 쁘니는 허공을 둥실 날아 마스터의 얼굴 앞에 다가왔다.
쁘니는 무섭지도 않은지 칭얼거리지도 않고 허공에서 가만히 마스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 입주 선물은 뭘 받고 싶으냐.”
야아앙. 냐아앙. 야옹. 마치 대답을 하듯이 쁘니가 웅얼거렸고 이내 마스터는 슬쩍 머리를 흔들었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놈들끼리 만났는지. 바라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마스터의 말에 쁘니는 환하게 웃으며 배를 내보였다.
그리고 허공에 요염하게 누워서 반짝이는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기쁜 모습에서 나오는 애교였기에 마스터는 작게 웃어주었다.
조금 떨어져서 보던 에미가 얼른 다가왔다.
입이 살짝 벌어진 것이 침이 떨어질 것만 같아 마스터는 다시 한번 웃었다.
“먹고 싶은 것을 아무리 먹어도 아프지 않기를 바라더구나. 여기서 먹는 걸로 차사를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식단은 하지 않아도 좋다.”
마스터는 말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에미와 쁘니는 눈을 맞추고 부둥켜안은 상태로 춤을 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달라붙는 에미가 성가셔진 쁘니가 솜방망이 주먹을 날리기 전까지 둘 모두 아주 행복해 보였다.
바의 구성원에 쁘니 하나가 추가된 것뿐인데 바의 모습은 조금 많이 바뀌었다.
마스터는 손님이 없는 날이면 조용히 바의 잔을 모두 꺼내 닦거나 책을 읽었다. 그러면 에미도 조용하게 음악을 듣거나 가끔 창문을 열고 풍경을 보곤 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마스터의 기질에 따라 에미도 가볍게 흥얼거리는 콧노래 외에 크게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쁘니가 온 후에는 달랐다.
에미는 청소를 하다가도 쁘니가 발라당 뒤집어져서 배를 까면 하고 다 내팽개치고 달려가 쁘니의 배를 긁어주고 쓰다듬어주느라고 바빴다.
혼잣말이 늘었고 쁘니에게 말을 거는 날이 많아졌다.
귀찮은 듯 대답하는 쁘니를 보며 소리 내어 웃는 날이 많아졌다.
바는 에미와 쁘니가 말하는 소리와 투닥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이제는 모든 신경과 관심사가 쁘니에게 가 있는지 간식으로 양념을 전혀 하지 않은 카나페를 들고 나와서는 쁘니에게 내밀기도 했다.
아무리 먹어도 건강할 거라 했지 아무거나 먹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싱거운 카나페를 집어 들며 마스터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에미는 모른 척했다.
마스터의 선물을 받은 이후에 쁘니도 평소라면 먹을 엄두도 내지 않았던 음식들에까지 식탐을 부리고 있었기에 둘은 저녁에 몰래 라면을 나눠 먹기도 했다.
처음 맛본 라면이 꽤 괜찮았는지 쁘니는 한동안 앞발을 빨갛게 물들이고 다녔다.
그런 쁘니를 잡아다 목욕을 시키겠다고 에미가 바를 뛰어다녔고 잡으러 오는 에미를 피하기 위해 쁘니가 홀부터 이층의 침실까지 뛰어다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둘은 뛰고 춤추고 같이 눕고 서로 쓰다듬고 함께 노을을 감상했고 마스터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가끔 책을 내리고 둘을 보며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마스터의 일상은 여전히 고요했다.
주변이 변해도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마스터는 때때로 심하게 뛰는 이들에게서 거리를 두듯이 바 안쪽과 흔들의자 쪽에만 보이지 않는 막을 드리우곤 했다.
그리고 그 막 너머에서 가만히, 에미와 쁘니를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면 여유롭게 움직이던 흔들의자도 멈춰서 있었다.
마치 온 신경이 막 너머에 쏠린 것처럼.
의자를 굴릴 한 조각의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며칠이 지나자 바와 이층의 침실까지 모두 섭렵한 쁘니는 가끔 창가에 앉아 울었다.
그것이 산책의 신호라는 것을 알았기에 에미는 바 안을 돌자고 했지만 쁘니는 창가에서 밖만 쳐다보며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미 ‘이바구’를 사는 곳으로 인식한 듯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만 보며 자꾸 울어댔다.
마스터는 슬쩍 눈길만 주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에미는 난감해졌다.
간절함이 없이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앉아 산책을 위해 잠깐만 열어주면 안 되냐고 협상을 걸어보았지만 들어주는 이 없는 하소연이었다.
간절히 산책을 원해봤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쁘니의 관심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쁘니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것과 맛있는 음식이라면 그리워하는 산책도 잠시 잊고 발라당 누워서 에미에게 배를 허락하기도 했다.
단 일주일 사이에 쁘니는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라왔다.
다리를 모아 앉으면 날렵해 보이던 인상이 이제 조금 듬직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창가에서 울던 쁘니가 뭔가를 깨달은 듯, 문 앞에 가서 앉았다.
울지도 않고 뚫어져라 문만 쳐다보는 쁘니가 걱정되어 에미가 가까이 갔을 때,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에미를 한 번 돌아본 쁘니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정말 안되는데. 중얼거리면서 에미는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