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의 위안, 그대의 휴식, 그대의 벗, 그대의 길동무가 그대에게
문 너머는 한낮의 주택가였다. 해는 바짝 떠올라 있었고 날은 선선했다.
고양이는 이제 머리 위가 편한지 그루밍을 시작했고 차사는 언제 꺼내 들었는지 모를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미는 그런 그녀를 슬쩍 쳐다보다가 이내 주변을 바라보았다.
‘길잡이는 그녀니 걸어야 할 때가 오면 알려주겠지.’ 하는 마음이었고 또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이것저것을 싣고 와서는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기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택가 담장 안쪽 계단 위 화분에서는 풀잎이 한가로이 흔들리며 손짓하고 있었고 어느 집 열린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 라면 냄새도 바람에 실려 그녀의 코 끝을 간질였다.
저 골목의 끝에서 가끔 들리는 자동차 경적소리도 바람을 타니 앞과 뒤가 늘어져 빵! 이 아니라 뿌아아아아아? 같이 늘어지게 들렸다.
전체적으로 햇볕은 따뜻하고 날은 선선하고 바람조차 잠시 쉬었다 흘러가는 듯한 아무도 없는 한적한 대낮 골목이었다.
‘현실. 현실.’ 가만히 중얼거려 보았다. 혀 끝에 닿는 공기마저도 새로운 느낌이다. 입 밖으로 튀어나간 혼잣말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런 에미의 어깨에 뭔가가 닿는 느낌이 나서 돌아보니 차사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톡톡 치고 있었다.
손에서 놓아버린 태블릿 PC는 허공에서 사라지고 있었고 차사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이곳은 주마등(走馬燈)이구나. 네 머리 위 녀석의 기억이야. 바로 현실로 가도 되겠지만, 조금 걷는 게 좋겠구나. 미안하구나. 조금만 참아다오. 아직 세 번의 이름을 부를 때가 아닌데도 무의식적으로 주마등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을게다.”
에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미소를 보인 차사는 천천히 걸었다. 에미는 어미의 곁을 놓치기 싫은 아기 오리처럼 재빠르게 그녀의 상의 뒷자락을 붙잡으며 따라 걸었다.
에미가 그녀와 발걸음이 맞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공간을 지나 주택가와 산자락이 만나는 지점의 풀숲 근처에 발이 닿았다. 그리고 그 풀숲 언저리,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최선을 다해 울고 있는 작은 고양이가 보였다.
야아아앙, 냐아아아앙. 작은 고양이는 애타게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그 외침을 알아들은 에미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차사가 살짝 허리를 숙여 에미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네 머리 위 녀석의 기억을 함께 보는 중이니 알 수 있는 거란다. 태어나 처음 눈을 뜨는 날 본 것이 빈자리라니, 녀석은 기구하게 시작했구나.”
에미는 슬쩍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머리 위에 앉은 고양이의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다. 다만 에미의 머리에 꾹꾹이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차사는 엄지 손가락으로 에미의 이마를 살짝 문질러 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이 따뜻하면서 시원하게 느껴지더니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거두자 간질거리던 가슴에서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외로움과 배고픔, 그리고 무서움. 낯섦. 아기 고양이는 자신이 담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담아서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이 모여 아기 고양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기에 두려움에 질린 아기 고양이는 생의 가장 간절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외침에 담긴 감정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했던 순간이었다.
톡톡. 다시 어깨를 두드리는 차사의 손가락에 에미는 얼른 차사의 옷자락을 잡았다. 살짝 웃어 보인 차사가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시간을 건넜고 다행히 어미가 찾아와 아기 고양이는 어미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 받았던 공포가 가슴 깊숙이 남았다. 그렇기에 아기 고양이는 어미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어미는 덩치가 커 감에도 응석을 부리는 아기 고양이를 곁으로 끌어다 품었다. 차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시간을 건너고 공간을 넘어 비 내리는 어느 날에 도착했다.
차도 사람도 드문드문 지나고 있는 도로변. 작은 사거리 모퉁이의 동네 마트 하나. 그리고 그 마트의 한쪽, 천막 끝에 걸쳐있는 종이 박스를 모아놓은 곳. 그곳에 비를 쫄딱 맞은 고양이 녀석이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왔는지 지나는 모든 이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녀석은 박스가 쌓인 그 사이로 파고 들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곧 한차례 센 비가 올 것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은신처로 향하진 않았다. 지금 녀석은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그만큼 빗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에 지나는 자동차 소리도 가려지고 걷는 이의 모습도 가려졌다.
오직 들리는 것은 힘겹게 구르는 리어카 소리. 왠지 정겹게 느껴지는 그 리어카 소리. 힘겹게 한 바퀴 돌아갈 때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가슴을 묵직하게 하는 그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자 차사는 에미의 이마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더없이 창백한 손임에도 아주 따뜻했다.
반갑고, 정겹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 소리를 잊을 수 있을 만큼.
“아직 우리 에미에게는 조금 무리인 모양이구나. 생과 사, 그 사이에 선 녀석의 가장 강렬했던 기억이기에 감정이 강하게 전달되고 있는 게다. 녀석도 끝자락에서 우리와 함께 돌아보고 있기에 더 감정이 격렬하지.
처음 겪으면 동화(同化)되는 게 당연하단다. 우리 착한 에미는 걱정 말거라. 내가 있으니. 편안히, 그렇지만 끝까지 바라보거라. 녀석이 우리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으니.”
어느새 비닐을 씌운 리어카가 천막 아래에 도착했다. 우비를 입은 할머니는 리어카에 매달아 놓은 봉지를 뒤져서 그릇을 꺼냈다. 그리고 고양이가 먹을만한 것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녀석은 눈치를 보며 천천히 나오다가 그릇에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한걸음 떨어져서 완전히 젖어 볼품없어진 녀석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할머니는 이내 결심한 듯 박스를 모은 리어카 한쪽에서 작은 바구니를 꺼냈다. 그리고 녀석에게 내밀며 손짓했다.
밥을 먹고 난 녀석은 그런 할머니를 빤히 보다가 이내 할머니의 손짓을 따라 그 작은 바구니에 몸을 실었다.
비가 종일 와 춥기만 했던 날이었다. 바구니 안은 따뜻했다.
다시 시간과 공간을 걸었다. 고양이 녀석은 할머니의 집이 그 작은 바구니 같다고 느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따뜻한 공간.
할머니는 눈이 뒤집어지도록 녀석을 쓰다듬어 주었고 이빨이 빠진 입으로 공기가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할머니는 밤마다 다리에 파스를 붙였다. 그 냄새가 싫어 도망갔다가도 할머니 냄새를 따라 다리에서 먼 얼굴 근처에서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밤새 끙끙거리면서도 병원을 가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가 가여워 핥아주던 녀석이 실수로 할머니의 파스를 핥았고 몇 번이나 토악질을 했다.
할머니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녀석을 안고서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파스향은 상관없으나 핥거나 먹는 건 문제가 생긴다는 말에 할머니는 한여름에도 파스를 붙이곤 긴 양말을 신었다.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집을 나설 때면 녀석도 함께 길을 나섰다. 할머니의 리어카 난간 맨 앞에 앉아서 매일 쪼그라드는 할머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언제나 녀석의 밥을 먼저 챙겼다. 길거리에서든 집에서든 녀석이 먼저 밥을 다 먹고 다가오면 한참이나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밥을 먹곤 했다.
녀석은 할머니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며 몸단장을 하고 할머니가 그릇을 치운 후에 다가가 몸을 비벼댔다. 그럼 다시 할머니는 녀석을 품에 안고 그녀만의 온기와 냄새와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것이 녀석이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었다.
걷는다는 건 결국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 시간과 공간을 걷던 차사의 걸음이 멈춘 것은 고양이 녀석이 작은 바구니 같다고 느꼈던 할머니의 집이었다.
고된 하루를 또다시 견뎌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의 고됨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것으로 잊어버리는 그 행복한 순간.
눈이 까뒤집어지도록 쓰다듬어주고 엉덩이를 두드려주던 그 손길이 멎던 순간. 녀석은 상처를 핥듯이 할머니를 핥았다.
작은 바구니 같던 집이 처음으로 먹먹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찾던 그 순간처럼, 어쩌면 그 순간보다도 더 힘주어, 영혼을 쥐어짜듯이. 모든 것을 내뱉듯이. 아무리 핥고 울어도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은 용케도 시끄럽게 떠들던 티브이를 떠올렸다. 귀가 잘 들리지 않던 할머니는 가끔 티브이를 볼 때면 아주 크게 틀곤 했고 그 때문에 옆집에서 항의하러 오기도 했다.
녀석이 리모컨을 두드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티브이가 켜졌고 다시 몇 십 번의 시도 끝에 집이 떨릴 정도로 소리를 키우는 것에도 성공했다.
누군가 돌아봐주기를 바라며, 누군가 발견해 주길 바라며,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며.
소리에 떨리는 집이 무너져서 그 사이로 이 모든 소리가 새어나가길 바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저 소리에도 떨리는 집이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한참이나 울고 이제 입이 말라올 때쯤 떨리는 것은 집이 아니라 자신의 몸임을 알았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할머니를 핥고 몸으로 밀어 보기도 했다.
여전히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았고 녀석의 몸은 더욱 떨려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집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이 무너질 듯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 무너지는 세상이 무서워 더 크게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든, 무엇이든, 제발, 도와주기를, 바라봐주기를, 이 간절함을 들어주기를, 무너질 듯 위태로운 세상을 알아주기를. 제발 도와주세요.
고양이는 리모컨의 소리 키움 버튼을 두드리며 떨리는 세상에 소리를 질렀다.
에미는 입을 막았다. 이미 눈물은 앞섶을 적시고 있었다. 폴짝. 유유히 뛰어내린 고양이는 할머니의 곁으로 다가가서 몸을 비벼댔다.
에미는 왠지 서 있기가 힘들어 주저앉았다. '뭐야. 이건 피크닉이 아니잖아.' 에미의 울음 사이로 몇 번이나 실패했다가 완성된 문장이 겨우 흘러나왔다.
가만히 에미의 머리에 손을 올린 차사가 그녀의 울음이 조금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울음이 살짝 잦아들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ㅡㅡㅡ, ㅡㅡㅡ, ㅡㅡㅡ."
그것은 알 수 없는 울림이었다. 차사의 목소리에 세상이 같이 떨리는 느낌. 차사의 입을 막아도 그 울림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절대적인 무언가. 괜히 숨죽여 들을 수밖에 없는 무거운 무언가.
세 번의 울림이 끝나고 할머니는 천천히 손을 들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격하게 울며 할머니에게 몸을 비볐다. 할머니는 고양이 녀석을 눈이 뒤집어져라 쓰다듬어주고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할머니의 이빨 빠진 웃음소리와 고양이의 즐거운 웃음이 어우러진 흐뭇한 모습. 그것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아쉽고 찬란한 찰나의 순간.
에미는 왠지 다시 울음이 터졌다. 울면서도 그들의 행복한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울면서 웃으며 에미는 그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차사는 에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뭐예요. 진짜. 저들은 왜 이런 순간까지도 아름답고 웃기고 행복할 수 있는 거죠?"
"그들은 삶을 간절하게 살아왔기 때문이지. 서로의 이유였고 미련이었고 추억이었고 미래였다. 헤어질 것임을 알기에 더 사랑하고 끝이 오고 있음을 알기에 더 순간마다 행복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누는 인사의 시간이 생겼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더냐."
"너무해요. 항상 행복할 순 없는 건가요."
"모든 여행은 끝이 있기 마련이란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여행이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추억이 되는 게지. 돌아오지 않는 여행에 어떤 빛남이 있을까. 인생을 소풍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란다. 오늘 너는 저 할머니와 고양이 녀석의 가장 찬란한 소풍을 보고 있는 거란다."
차사도 에미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고양이 녀석이 느꼈듯이 이 공간은 떨리고 있었다. 곧 사라질 것처럼. 그리고 저 둘의 마지막 인사도 곧 끝이 나리라. 그래서 에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장 찬란한 소풍의 순간에서. 문득 고양이를 쓰다듬던 할머니가 슬쩍 눈인사를 보내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