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의 위안, 그대의 휴식, 그대의 벗, 그대의 길동무가 그대에게
에미는 콧노래를 부르며 접시의 물기를 제거하고 있었다. 오늘은 결국 손님이 없을는지, 시간이 늦어감에도 바에는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다.
마스터는 평소 손님이 올 때면 귀신같이 알고 바에 서서 잔을 닦지만 오늘은 바 옆에 흔들의자를 끌어다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 마스터의 행동으로 오늘은 손님이 오지 않을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에미는 주방을 꼼꼼하게 청소하고 나서 모든 식기를 살균소독했다.
굳이 손을 대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직접 손을 대는 것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라 가끔은 직접 몸을 움직이곤 했다.
손님이 와서 새로운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고요한 일상을 즐기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알 것 같은 이 분위기와 이 느낌.
물론 곧 지루해지고 지겨워지겠지만 익숙해서 편안하기까지 한 이 느낌이 온몸으로 와서 부딪히는 데는 즐기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편안함에 휩쓸린다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혼자만의 표현이 마음에 들어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에미의 기분을 느꼈는지 바의 음악이 조금 신나는 음악으로 바뀌었다.
얼른 정리 끝내고 마스터에게 간식 만들어 드린 후 창가에 앉아 햇살을 쬐며 쪽잠을 조금 자야겠다.
이곳은 시간과는 상관없는 곳이지만 마스터의 눈치를 보아하니 햇살 정도는 허락해 주실 것 같기도 했다.
이따가 간식 드리면서 창가에 저녁의 나른한 햇살을 부탁드려 봐야겠다.
그래. 노을빛이 좋겠다. 적당히 부드럽고 너울거리는 듯한 빛으로. 야옹.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마지막으로 물기를 제거한 접시를 수납하던 에미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문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스터와 에미 둘만 있는 상황에서 뭔가 다른 소리가 들릴 리 없으니 손님이라는 말인데 손님이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낸다니.
이번엔 만취한 손님인가? 에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기 제거용 행주를 거치대에 걸어두고 홀로 나왔다.
문으로 다가가봤으나 어디에서 손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헛것이 들렸나? 냐아옹.
이번엔 분명히 고양이 소리네. 몸을 숙여 테이블 아래를 보니 문 쪽의 테이블 의자 옆에 얼굴을 반쯤 숨긴 회색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는 눈을 빛내며 몸을 한껏 움츠린 채로 에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내가 이곳에 더 오래 있었다고. 그렇게 침입자를 바라보듯 하면 좀 그런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에미는 천천히 뒤로 조금 물러난 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고양이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에미는 한참이나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마스터의 이야기 속에서, 혹은 손님의 이야기 속에서 몇 번이나 고양이를 본 적은 있었기에 낯설거나 신기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이야기는 생생한 체험이니까. 그러함에도 지금 에미가 느끼는 감정은 뭔가 남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야기의 환상을 처음 겪었을 때의 느낌과도 같았다.
뭔가 자신의 세상이 확장되는 듯한 기분.
책이나 들리는 소문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던 무언가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순간, 확고부동한 자신만의 것이 생긴 듯한 기분.
그래. 이것은 어디선가 들었던 것이 아니라 확고한 자신의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나만의 이야기가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미는 경계를 하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고양이의 모습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등이 회색이고 배는 흰색이었는데 길이가 좀 되는 것이 아기는 아닌 듯했다. 에미는 슬쩍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고양이를 키워봤어야 알지.' 고양이의 수염 숫자를 세어보고 눈 위로 길게 삐져나온 눈썹, '아, 저것도 수염이라고 했었던가?' 아무튼 그 길고 하얀 털의 숫자도 헤아린 후 조용히 숨 쉬는 그 고양이의 가슴팍과 바짝 긴장해 연신 부르르 떨리는 배를 보았다.
고양이의 미간에 털 문양까지 한참이나 바라보았는데도 고양이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에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에미의 손짓 하나하나에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그 눈빛이 새파란 것이 아무래도 경계를 쉽게 풀 것 같지는 않았다.
에미는 고양이가 놀라지 않게 조금씩 뒤로 물러나서 일단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쟤는 또 어떻게 들어온 거지?' 고양이가 먹을 수 있을만한 걸 찾다가 구운 연어를 조금 덜어서 돌아와 보니 녀석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얼굴을 반쯤 숨긴 채 에미를 관찰하고 있었다.
슬쩍 연어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고양이는 눈빛을 더 새파랗게 빛내며 털을 부풀렸다.
에미가 가까이 오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에미는 슬쩍 한숨을 내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접시를 고양이 쪽으로 밀었다.
고양이는 움찔하더니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코를 벌름거렸다.
그 벌름거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지만 고양이는 절대 눈을 돌리지 않고 구운 연어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그 새파란 눈빛의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기에 에미는 마스터에게 다가가 고양이의 존재에 대해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마스터는 고양이라는 소리에 책을 덮고 에미를 따라나서서 테이블 아래를 바라보았다.
쭈그린 에미와 달리 서서 상체를 숙인 채 한참이나 고양이를 쳐다보던 마스터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고양이는 누군가 뒷목을 잡고 엉덩이를 받쳐서 들어 올린 것처럼 허공에 떠올랐다.
순간 당황하는 듯하던 고양이는 이내 자세가 그리 불편하진 않은지 편안한 울음소리를 냈다.
의아한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냐아아앙?
허공에 들어 올려진 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갸르릉 소리와 골골골 소리를 섞어 내며 얌전히 다리를 모으고 있는 고양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마스터는 이내 에미에게 말했다.
“차사(差使) 불러라. 생(生)과 사(死)의 갈림에서 어떻게 여길 발견하고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녀석에게도 무언가 간절한 것이 이곳의 문을 찾게 했겠지. 다만 죽음이 짙게 배인 것이 아무래도 차사가 필요한 일인 듯싶다. ”
연락을 받은 차사는 금방 왔는데 여전히 과로로 인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간을 넘듯이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으로 도착하는 것도 여전했다.
그녀는 막대사탕을 물고 있었는데 ‘이바구’에 도착해서 마스터의 얼굴을 보자마자 뿌득하고 사탕을 깨물었다.
“야, 이 영감탱이야. 안 그래도 바쁜데 알만한 이가 왜 우릴 부르고 난리야. 그러라고 준 번호가 아닐 텐데?
응? 아이고! 우리 에미는 잘 지냈니? 어디 보자, 네가 ‘이바구’에 온 게 벌써 열다섯 해로구나. 갈수록 이뻐지네, 우리 에미는.”
여전히 그녀는 말이 많았다. 마스터에게 불만을 다다다 쏟아내던 그녀는 금방 에미를 발견하고 다가와 손을 잡고는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흔들 때마다 한마디의 말이 같이 튀어나왔다.
이뻐졌다, 피부는 어떻게 관리하냐, 손바닥까지 보드랍구나, 전보다 머리를 조금 다듬었구나, 그래, 숏컷도 이뻤지만 이렇게 길러보는 것도 예쁘구나, 화장품 쓰는 법은 배웠니? 화장도 안 한 얼굴이 이렇게까지 이쁘다니 너무 부럽구나, 우리 에미, 우리 에미.
조금 시끄럽고 정신없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에미는 숨도 안 쉬고 계속 칭찬을 해주는 그녀가 좋았다.
마스터에게 듣기로 차사는 여러 명이라던데 가끔이라도 ‘이바구’에 오는 차사는 그녀 하나였다.
그녀는 올 때마다 에미에게 칭찬을 하고 또 했다.
언제나 ‘언니’라고 부르라고 강요하는 것 외에는 에미에게 강요하는 것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 에미도 그녀가 좋을 수밖에.
“저기 경계에 선 녀석이 찾아왔다. 어찌 되었든 ‘이야기’를 품고 이곳에 찾아왔으니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법이지. 내가 나갈 순 없으니 에미, 네가 차사와 함께 다녀와야겠구나.”
에미는 마스터의 말에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바깥으로 나간다고? 그것도 이야기를 찾아서? 이건 모험이었다!
눈을 뜬 이후로 줄곧 ‘이바구’에서 살아온 에미에게 바깥은 ‘손님’들이 이야기해 주는 ‘옛날이야기’ 같은 곳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신기한 곳.
내가 가 닿을 수는 없지만 그다음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미지의 세계.
환호성을 지른 순간부터 이미 에미는 마스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느새 테이블에 내려앉아 가만히 털을 고르고 있던 고양이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있었다.
고양이가 흠칫해서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 손을 들어 칠까 말까 고민하는 것 따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고양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기계세상? 마법세상? 기사세상? 어느새 에미의 머릿속에서 고양이는 망토를 두르고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상은 결국 참지 못한 고양이의 솜주먹으로 인해 멈췄다.
퍽퍽 소리가 나게 얻어맞으면서도 에미는 얼굴을 빼지 않았다.
아프지 않게 소리만 나는 고양이의 주먹에 괜히 웃음만 나왔다.
'너도 나랑 같이 나들이 가는 게 좋은 거지?' 에미가 헤실거리며 하는 질문에 고양이는 몇 번의 솜주먹으로 답을 했다. 냐옹옹옹!
“정말 에미를 데리고 이 고양이를 따라 다녀오라는 거지? 영감탱이, 교육 한 번 확실하네. 첫 번째 나들이가 생과 사라니.”
“어차피 인생은 생과 사 아니던가.”
마스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차사에게 말했다. 그녀는 잠시 굳은 얼굴로 마스터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독한 영감.
마스터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어딘가 어둡고 서글퍼 보였는데 웃음 너머로 그가 살아온 세월이 살짝 비치는 듯도 했다.
그녀는 굳이 그 너머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스터와 그녀가 함께 서서 고양이와 에미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현재이니, 굳이 지난 사연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함께 가야 할 에미를 바라보았다.
에미는 여전히 상체를 테이블로 굽혀서 고양이에게 얼굴을 디밀고 머리를 두들겨 맞으면서 헤실거리고 있었다.
손에는 언제 집어 들었는지 연어가 담긴 접시를 들고 있었는데 고양이는 에미가 맛보라며 내미는 접시의 연어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에미의 얼굴을 때리는데 몰두해 있었다.
차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얻어맞으면서도 얼굴을 빼지 않고 웃고 있는 에미와 그런 에미가 다치지 않도록 발톱은 꼭 숨긴 채 소리만 크게 나는 솜방망이 주먹을 날리는 고양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차사는 한참이나 웃었다.
곧 흘러갈 지금이기에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순간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의 공기와 저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저 고양이의 귀여움까지 모두 가슴으로 끌어모아 기억하려 했다. 그녀의 입꼬리는 한참이나 내려오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행복한 순간은 서서히 여운을 가지고 끝나버린 바의 음악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차사는 솜주먹에 저지되어 고양이를 끌어안지 못하는 에미를 발견했다.
그대로 두면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기에 한숨을 내쉬며 마스터를 돌아보았다.
마스터는 살짝 웃더니 고양이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
에미의 접근을 한사코 거부하던 고양이는 마스터가 다가오는 것은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의 귓속말을 듣고선 마치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는 마스터를 한 번 바라보고 얼굴을 들이대도 얌전한 고양이를 한 번 본 후에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고양이는 저항하지 않았지만 에미가 안아 든 자세가 불편한 듯 몇 번이나 칭얼거렸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못 참겠는지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솜주먹으로 안아 든 에미의 팔을 마구 때렸다.
에미가 움찔해서 팔이 느슨해지자 얼른 몸을 뒤집어 몸을 타고 올라 에미의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발하자는 듯 울었다. 냐아앙.
차사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에미는 고양이를 만지지 못하는 것이 불만인 듯 불퉁하게 볼을 부풀렸지만 머리 위의 고양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평소의 털털한 행동가짐과는 다르게 손짓까지도 아주 조심스러워졌다.
"준비되었으면 가자.
산자들이 제 갈 길 가느라 바쁘듯이 저승길도 언제나 바쁘고 그 길을 쥐고 있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바쁜 법이니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은 지금도 제 혼자 떠나고 있단다.
이곳에 왔으니 그곳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지나고 있다지만 생과 사에서는 그 찰나도 너무 소중한 시간이란다.
우리는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함부로 재단할 권리가 없으니 그들의 소중한 시간이 그저 흘려지지 않게 어서 가자꾸나."
"그래도 첫 외출이니 잘 다녀오너라."
마스터는 손을 살짝 들었다. 에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고양이는 용케도 끄덕이는 머리 위에서 중심을 잡고 앉아 있었다.
에미는 차사가 내민 손을 잡고 바의 문을 향해 걸었다.
바의 문은 언제나 간절함으로 여는 것.
평소에 에미가 가까이 가도 열리지 않던 문은 고양이가 가까이 가자 활짝 열렸다.
문턱의 앞에서 에미는 문득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첫 외출인데 작업복은 좀.' 슬쩍 차사의 눈치를 보다가 문 앞에 서서 에미는 뒤를 돌아보았고 마스터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에미의 작업복은 프릴 달린 원피스로 바뀌었다.
언젠가 손님의 이야기 속에서 보았던 피크닉 의상으로 에미의 표현으로는 '소녀풍 샤랄라 원피스'였다.
에미는 콧김을 강하게 뿜으며 마스터에게 엄지를 척 내보였다.
마스터는 고개를 살짝 저었고 바쁘다던 차사도 다시 걸음을 멈추고 웃음을 터트렸다.
찰나가 생과 사에서 너무 소중한 시간이듯이 이 찰나는 마스터와 차사에게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