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화 | 지금 여기에 있는 것 T | 변화의 출발선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를 조금만 낸다면

by 나나쌤
"결정했어?"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결정하기 위해 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요.
과거(P)의 기억은 이미 들여다보았고, 미래(A)의 가능성도 그려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건 '현재(T)'였죠.


민망함, 생일인 친구에게 카드를

코로나 시절, 줌 모임에서 알게 된 친구를 처음으로 직접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그 친구의 생일이라 제가 커피와 선물을 사기로 했는데요, 결제 직전에서야 지갑에 카드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지갑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카드가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던 거죠. 겉으로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 진짜 필요한 건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정은 미래를 주문하는 일이 아닐까요.
결정 앞에서의 제 고민 패턴을 생각해 보면, 과거의 경험(P)을 돌아보고 원하는 미래를 그리며(A) 불분명함 속에서 방황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좋은 결정을 가로막는 것은 불투명한 미래가 아니라 불분명한 현재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조금 오래 전, 책을 하나 추천받았어요.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연구서였는데 재밌어 보였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읽어봐야지' 하고 온라인 서점 앱 장바구니에 넣은 지 1년이 넘게 지났어요.

그 책까지 읽을 만한 여유는 좀처럼 나지 않았으니까요. 알고보니 그 책을 외면해 온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 책을 사면, 여가 시간에 유튜브만 보며 보내는 현재의 내 모습과 마주해야 했거든요. 저는 그걸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제가 외면한 건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제 현실이었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으려 하니, 불분명할 수밖에요. 불분명한 현재 위에서 결정을 내리려 하니 고민이 될 수밖에요.


흔들린 사진을 찍더라도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랑 이야기 하다 알게 된 것이 있어요. 저는 어릴 때 분명 매일 엄마한테 혼났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한 번도 저를 혼낸적이 없대요. 혼난 것은 팩트인데, 어쩜 우리 엄마는 그걸 기억 못할 수 있죠?

그런데요 그럴 수도 있대요. 예를 들어, 카페에서 두 사람이 만난다면, 한 사람은 따뜻했던 커피를, 다른 사람은 어색했던 침묵을 기억할 테니까요.

그래서 두 사람이 각자의 일기를 쓴다면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되는 거죠.

우리의 기억이란 이런 거래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은 필름이 아니라, 마음이 골라낸 순간들의 모음이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모두 현재를 기록하는 사진가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출근길 창밖을 보며, 커피를 주문하면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며 끊임없이 셔터를 누르죠. 하지만 그 사진들이 모두 정확하지는 못할 겁니다. 당연히.


“아… 휴직하고 싶다아아아.”

한참을 망설이다 입 밖으로 내뱉은 이 말은, 마치 오랫동안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못하다가 겨우 찍은 사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은 제대로 찍히지 않았을 거예요. 쉬고 싶다는 마음조차 불안으로 가득했으니까요.

퇴근 후 소파에 주저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떠오른 다음 날 업무. 주말엔 푹 쉬어야지 다짐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시간.

그런 상태를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왜 이렇게 지쳤을까?”
“다른 사람들도 다 이 정도는 버티지 않나?”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비단 이런 감정은 직장인만의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어떤 학생은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하얘져요. 공부를 안 하니 불안하고, 책을 펴면 더 불안해져요.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해요.”라고 할 것이고,

한 워킹맘은, “아이를 재우고 나면 나도 쉬고 싶은데, 그때 밀린 집안일이 눈에 밟혀요. 쉬자니 죄책감이 들고, 일을 하자니 몸이 너무 지쳐요. 그러다보니 무의미하게 핸드폰만 보다가 어느새 새벽 1시예요.”라고 할 거예요.


지인에게 털어놓은 저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계획서를 써야 하는데 자꾸 미루게 돼. 그러다 마감이 다가오고 시간에 쫓겨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충 마무리 해 버리고. 그러고 나면 또 기분은 찝찝하고.”

결정 앞에서 저는 ‘지금 여기’를 직시하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의 후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감정으로 현재를 더 흐리게 만들고요. 스스로를 비난하기만 바빴습니다.

하지만 현재를 외면한 채 미래의 결정을 고민하는 건, 초점이 맞지 않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과 같더라고요.


현재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법

PATH의 T(Trust)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믿으라니요. 현재가 불안하고 힘들기 때문에 변화를 원하는데 그 현재를 믿으라니요.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은 "지금 괜찮다"라고 긍정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조금 용기가 필요할지도 몰라요!)


우리는 불안이나 피로를 느낄 때 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서둘러 해결책을 찾거나, 아니면 아예 모른 척하거나.

하지만 현재를 신뢰한다는 건, 그 불편한 감정도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대개 어떤 신호라고 합니다. 불안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고, 피로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죠.

그 신호를 외면할수록 상황은 더 나빠질 뿐입니다.


세 가지 렌즈로 현재를 보면

명상을 하면서 배운 것 중에 좋은 것은요, 나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저는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을 세 가지 렌즈를 통해 살펴보려 노력하고 있는데, 결정을 쉽게 내리는 데 도움을 받고 있어요.

첫째는 사실을 보는 렌즈입니다. "나는 지금 일주일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처럼 현재 상황에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 현실이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킬 출발점에 서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감정을 보는 렌즈입니다. 사실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살피는 거죠.

예를 들어,불면의 밤이 ’불안감 60%, 무기력 30%, 기대감 10%였다‘처럼 감정을 기록하면 있는 그대로 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셋째는 준비도를 보는 렌즈입니다. 내가 지금 변화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살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집들이를 준비한다고 하면, 준비할 수 있는 메뉴의 수와 재료 상태를 점검하듯, 내 에너지와 자원이 어느 정도인지 들여다보는 거죠.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조금 더 기다리거나 작은 변화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구요.


이렇게 세 가지 렌즈로 현재를 바라보는 건, 마치 삼각대를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한 다리만으로는 안정적인 촬영이 불가능하죠. 세 다리가 모두 필요합니다. 사실, 감정, 준비도라는 세 다리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흔들린 사진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종종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피로는 곧 지나갈 거고, 무거운 어깨는 익숙해질 거라고 믿으면서요. 마치 스노우 앱으로 셀카를 찍을 때처럼, 각도와 필터로 불편한 진실을 가리려 합니다.


제가 믿고 있는 것은, '나는 지쳤다'고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길이 보인다는 진실입니다. 그제야 ‘오늘은 컵만이라도 닦자’, '그럼 내일은 조금 일찍 자볼까?', '주말엔 산책이라도 다녀올까?' 같은 작은 생각들이 떠오르니까요. 할 수 없다는 무기력 대신,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용기가 희망이 되는 순간을 저는 종종 경험합니다.


우리에겐 흔들린 사진도 필요해요. 그 흐릿한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진실이니까요.

때론 흔들리고, 때론 초점을 잃지만, 그래도 계속 셔터를 누르는. 그 불완전한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다시 누군가의 용기가 됩니다.

오늘도 우리의 카메라에 담긴 그 모든 순간을 믿어요



오늘 당신의 셔터가 무엇을 담아 냈는지 궁급합니다. :)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가?"
흔들린 사진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첫 기록이니까요.

keyword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