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호천사
자동차를 수리하고 오는 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내리던 비가 점점 굵어졌다.
"오늘 비가 온다고는 했는데... 일기예보가 맞았네요."
수호가 재이를 바라보았다.
"아직 재이를 데리러 가려면 시간이 좀 남았죠?"
"음... 1시간이나 남았네요. 어쩌죠?"
"조금 걸을까요?"
"비가 올 거 같은데... 괜찮아요?"
"비 맞는 거 싫어해요? 우산 쓰고 걸으면 되죠."
"비 맞는 거 좋아해요? 그러는 수호 씨는?"
"뭐, 별로..."
수호는 학교 앞 공원에 차를 세웠다. 작은 공원 옆에는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둘은 차에서 내려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현이 조금 앞서 걷고 수호가 뒤에서 따라갔다. 이현은 팔을 들어 올려 빗방울 굵기를 연신 체크했다. 그런 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어가던 수호가 뭔가 생각난 듯 이현을 불러 세웠다.
"비 맞는 걸 좋아하는 건 이현 씨 같은데요? 엄청 즐거워 보이는 거 알아요?"
"아... 저 말이에요?"
"특별하잖아요."
"뭐가요?"
"비를 맞는 경험, 우리가 우산이 있었더라면 비를 맞지 않았겠죠? 뭐, 비가 특별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다 특별한 거 아니겠어요?"
"그렇겠네요. 지금 이 순간.... 이 다 특별하다..."
"거문바다도 그렇게 온 거예요. 순간순간이 특별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줘서."
이현은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이 너무 거세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했죠? 내가 떠나온 곳은 그랬어요. 그곳도, 가족도, 삶이 이미 너무 커서, 내가 없었어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어서 왔는데... 가끔 잘 안될 때가 있어요."
"뭐가요?"
"내 목소리 찾는 거요. 내가 뭘 잘하는 지도 모르겠고... 게스트 하우스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하고, 재이도 시골에서 이렇게 친구도 없이 자라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요."
이현이 말을 이어갔다.
"밤에 시키면 새벽에 배송받는 시대에 그런 혜택도 누릴 수 없는 곳에서 산다는 게 어느 순간 무섭더라고요."
앞만 바라보고 걷고 있는 이현을 수호가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는 물었다.
"다시 도시로 가는 것도 생각해 봤어요?"
"문득문득 생각하죠. 하지만 아직 여기가 좋아요. 카페도 생겼잖아요. 잘생긴 사장님도 있고..."
이현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수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호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때 이현의 얼굴 위로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비가 많이 오려나 보네..."
이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깐만요."
수호가 이현을 남겨두고 뛰어가더니 길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서 비닐우산을 사 왔다.
수호가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현은 우산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 비를 피할 곳을 찾아보았지만 마땅치가 않아서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맞던 이현은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이현을 수호가 바라보며 말했다.
"비를 더 맞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요."
말하는 수호의 머리카락 또한 비에 젖어 축 쳐져있었다. 이현은 그제야 생각난 듯 자신의 겉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썼다. 수호는 그제야 우산을 펴서 이현에게 씌워주었다. 둘은 한 우산을 쓰고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오해 말아요. 우산이 하나밖에 없었답니다."
"하나도 아깝지요. 집에 손님들이 놔두고 간 고물 우산이 천지거든요."
이현이 웃으며 말했다.
"거문마을이 좋죠. 여기 나도 살고 싶었는데요. 나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수호가 아까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그런데 수호 씨는 억지로 떠난 거예요? 원치도 않는데?"
"뭐 그건 아니지만. 이현 씨처럼 그렇게... 내가 원해서 살던 곳을 떠난 건 아니에요."
이현은 수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잠시 말없이 걷다 보니 비가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소나기인가 봐. 그냥 지나가는..."
이현은 혼잣말같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수호는 손을 뻗어 확인하고는 우산을 접었다. 비도 그쳤고 비가 오는 소리도 사라졌다.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난 도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쏴하고 들릴 뿐이었다.
"나도 원해서 떠난 건 아니에요. 떠날 수밖에 없어서 떠난 거죠."
나지막한 이현의 대답에 수호도 나지막이 물었다.
"왜인지 물어도 돼요?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요."
몽글몽글 카페에서 수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호는 이현에게 무언가를 물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고 보니 이현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저녁을 뭘 먹을 거냐, 병원은 어디를 가야 하나, 어느 길로 가야 시장에 빨리 가나 등등의 질문을 묻는 건 기훈이었다.
놀랍게도 거문마을에 온 이후로 그녀가 떠난 이유를 묻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수호가 처음이었다.
"목소리요."
"네?"
"나에게는 아직도 목소리가 들려요. 환청이라고 해야 하나. 뭐 환청은 아닐 수도, 그림자라고 해야 하나. 그 목소리로부터 도망친 거예요."
이현이 장난기 서린 얼굴로 수호를 바라보았다. 반은 농담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이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과장되게 들렸다.
"그 사람이요? 그러니까... 재이 아빠."
"재이 아빠라는 말을 들은 지 참 오랜만이라 낯서네요. 맞아요. 재이 아빠. 그 사람. 그 목소리의 주인. 말하자면 길어요. 또 진부하겠죠. 뭐 이혼이 그렇죠. 그 사람도 아마 내 목소리가 꽤나 들릴 거예요, 그죠?"
이현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수호에게 말했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침묵을 깬 건 수호였다.
"이현 씨가 편안해지기를 바라요. 떠나온 용기만큼이요."
수호의 목소리는 마치 라디오 진행자의 마지막 인사만큼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이현은 한참을 좋아했던 성시경의 엔딩멘트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이현은 엔딩맨트가 나올 때면 라디오에 귀를 바싹 갖다 대곤 했었다.
'잘 자요'
"수호 씨도 성시경 못지않네요. 아니,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웃지 마세요. 수호 씨."
"왜요?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수호 씨는 수호천사예요? 아니 이름도 수호고, 얼굴도 천사같이 곱고, 하는 말마다 너무 예쁘잖아요. 보기에는 참 차갑게 보이기도 하는데..."
수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수호가 소리 내어 웃는 법은 잘 없었는데, 이현도 소리 내어 같이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웃잖아요. 작은 꽃집 할머니랑도 많이 웃었어요."
"그거 알아요? 울음의 치료제는 웃음이에요. 재이가 울다가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웃게 하는 거거든요. 긴 시간을 울었으니까, 여기서 많이 웃으려고 왔어요. 그게 다예요. 그리고 기적처럼 나를 웃게 하는 일이 계속 생기거든요. 내가 가진 운을 여기서 다 쓰려나 봐요."
"긴 시간을 울었으니까..."
수호가 혼잣말처럼 이현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이현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새 하늘은 개어 있었다. 비가 그쳤지만 둘은 아직도 우산을 쓰고 있었다.
"아, 재이..."
"아, 벌써 시간이 다 되었어요?"
"네, 이런 내 정신... 늦겠어요. 뛰어요."
둘은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우산을 쓴 채로 학교로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