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10년째 해외살이를 하고 있다. 필리핀에 거주한 지는 1년이 못되지만 그동안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했다. 필리핀 거주기간이 짧고 많은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의 울부짖음 일 수 있다. 때로는 어처구니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화려한 불빛 이면의 불편한 진실들. 그동안 거주했던 국가들이 소득 수준이 높아 비교가 되었겠지만, 참 불편하다. 문제를 진심으로 마주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필리핀이 좀 더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닭튀김은 맛있다? 맛없다?
아침 메뉴는 '닭튀김과 밥', 점심 메뉴도 '닭튀김과 밥', 저녁 메뉴 역시 '닭튀김과 밥'
아무리 우리가 치킨의 민족이라 하더라도 삼시세끼 이런 메뉴라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이런 식사를 하는 필리피노를 보면서 대한민국 사람들 보다 치킨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필리피노들이 치킨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실은 슬픔을 자아낸다.
적은 금액으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는 고칼로리 식사가 필요하다. 저렴한 닭고기는 어쩌면 필리피노들에게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튀기면 구두도 맛있다.'라고 한다. 닭고기와 튀김이 만났으니 오죽하랴.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필리핀의 부족한 냉동시설이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흔한 냉동탑차가 필리핀에는 부족하다. 가정이나 상점에도 냉동시설이 부족하다.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튀겨야 한다. 필리핀에서는 상태 좋은 고기를 구매하기 힘들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폐기 처분했어야 하는 상태가 좋지 않은 고기들을 슈퍼마켓 정육코너에서 버젓이 팔고 있다. 고기를 튀기지 않으면 먹고 나서 탈이 날 것이다. 분명 필리피노들의 내장도 이런 상황에 맞추어 진화했을 것이다. 나는 배가 아파 죽겠는데, 같은 사무실의 필리피노들은 같은 음식을 먹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필리핀에 처음 오면 으레 물갈이를 한다. 필자도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지독한 장염으로 두 차례나 고생을 했었다. 이후로는 어느 곳에 가건 물을 싸가지고 다닌다. 음식점에서 주는 물은 입에 대지 않는다. 필리피노급의 내장기관 진화는 포기하였다. 비싸도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수입한 생수를 사 먹는다.
냉동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야채와 과일 유통도 어렵다. 바나나의 산지 필리핀에서 한국보다 비싼 바나나를 사 먹고 있노라면 그저 웃고프다. 필리핀에 처음 와서 슈퍼에 진열해 놓은 시들시들한 야채를 마주하고서, 특별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음날, 그다음 날, 다른 슈퍼를 찾아가도 상황은 여전했다. 필리핀에서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구매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필리핀의 맥도널드, 버거킹은 유난히 맛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맛을 유지하는 것이 프랜차이즈 식당의 공식이라고 생각했으나 필리핀만은 예외이다. 소울푸드 햄버거가 맛이 없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다양한 버거를 주문하면서 분석해 봤다. 문제는 야채였다. 필리핀의 버거들은 대부분 야채가 부실하다. 그나마 조금 들어간 것도 신선과는 거리가 멀다. 패티야 튀겨서 맛을 유지하겠지만 절대 신선한 패티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필리피노들은 주로 야채 없이 닭튀김과 밥을 먹는다. 맥도널드에서도 닭튀김과 밥을 팔고 버거킹, 파파이스, KFC 모두 닭튀김과 함께 밥을 같이 판다. 불어 터진 달짝지근한 필리핀식 스파게티도 어느 프랜차이즈를 가나 팔고 있다. 스파게티 면을 불리는 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일 수 있다. 불리면 양이 많아지니 포만감도 늘 것이다.
그나마 닭튀김을 먹는다면 상황이 괜찮은 것이다. 닭튀김을 사 먹을 여건이 안 되는 상황이면 필리핀식의 젓갈과 밥만 먹는 경우도 많다. 조화로운 영양은 이들에게 사치다. 높은 칼로리의 섭취를 통한 생존. 아끼는 사람과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할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행복해야 할 식사 시간이 그저 생존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상황이 슬프다.
'달팽이'가 이사 가네.
지금 거주하고 있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이하 BGC)는 필리핀의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 그중에서도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으로 필리핀의 다른 지역에 비해 여건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BGC의 중심거리 하이스트리트를 거닐 때면 여타 세계적인 도시들과 비교해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하이스트리트 끝자락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필리핀의 실상이 여실이 드러난다. 필리핀의 서민들이 사는 지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거의 빈민가 수준이다. 제대로 지붕이 달린 집에서 거주할 수 있다면 살만한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지붕 없이 슬레이트나 큰 비닐로 덮어놓은 집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친다. 다 허물어져가는 집들을 볼 때면 가뜩이나 비도 많이 오는데, 비 올 때면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다. 당연히 전기나 수도시설을 바랄 수 없는, 이걸 집으로 불러도 될지 미안한 그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저녁 무렵에 도로를 지날 때면 도로변에 큰 종이상자를 뒤집어쓴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필리핀에 오래 거주하신 분이 '달팽이'가 이사 가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아이가 뒤집어쓴 종이상자는 그 아이의 집이다. 집과 몸이 붙어있는 달팽이처럼 오늘밤 눕는 곳이 그 아이의 집이 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사람은 모두 존귀하고 생명 그 자체만으로 소중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필리핀에서 마주치는 현실들은 너무나 처참하다. 오늘밤 누울 곳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나마 지붕 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은 여건이 괜찮다고 해야 하나?
더욱 처참한 것은 BGC와 서민들 거주지역이 도로 하나를 경계로 붙어 있는 것이다. 필리핀 서민들은 BGC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로 인해 BGC가 쾌적하고 안전하다고 자랑하지만 서민들이 BGC에 오지 않는 이유는 나를 슬퍼지게 만든다. BGC에 특정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너무 큰 위화감에 일반적인 필리핀 서민들은 BGC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눈에 안 보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버젓이 잘 사는 사람들이 보이면 '상대적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잘 사는 사람들을 눈으로 마주하는 순간 내 처지가 너무 처참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잘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필리핀 서민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상상하기도 싫다. 대부분의 콘도는 커다란 장총을 차고 있는 무장 경비원이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쇼핑몰은 들어갈 때 가방 안을 검사한다. 총기소지가 가능한 필리핀에서 궁지에 몰린 서민들이 최악의 선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저개발 국가들이 비슷한 사정이겠지만 필리핀의 빈부격차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비가 온다. 인터넷이 끊기겠군...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창밖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역시나 인터넷이 먹통이다. 비가 오면 무릎이 쑤신다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처럼 필리핀에서는 비가 오면 인터넷이 끊긴다.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의문이지만 필리핀에서는 인터넷이 수시로 끊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터넷이 먹통이 되면 큰 문제로 여기고 회사차원의 보상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일상이다.
필리핀에 처음 도착해서 인터넷 설치를 신청했다. 신청 페이지에서는 곧 설치하러 올 것처럼 안내되었지만 이후 한 달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 회사에 전화해도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답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타 업체를 통해 인터넷을 설치하였다. 기존 신청 업체에 이미 지불한 가입비를 반환해 달라고 하니 대리점으로 찾아오라고 한다. 대리점에 방문하니 환불신청양식이 아닌 A4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지금의 상황을 풀어서 쓰라고 한다. 영어로 현 상황에 대한 글짓기를 하면서 설치비를 제발 반환해 달라고 부탁의 글을 쓴다. 왜 내가 잘못한 것도 없이 반성문을 써야 하는지 속이 터졌다.
인터넷 설치는 성공하였으나 한 시간에 한 번씩 인터넷이 끊겼다.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고도 계속 모바일 데이터를 사용해야 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인터넷 모뎀을 재부팅해야 했다. 그래도 안될 때는 고객센터에 메시지를 보내서 인터넷 신호를 초기화시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회사에 항의를 했다. 한 달 사이 두 차례 수리기사가 방문을 하였고 그 이후로는 그나마 끊김이 덜했다. 끊기지 않는 인터넷은 필리핀에서 너무 큰 욕심인가 보다. 지금도 저녁시간 때면 인터넷이 먹통이 되는 경우가 많아 모바일 데이터를 사용해야 한다. 그나마 모바일 데이터가 저렴한 것에 위안을 받는다.
끊기는 것도 문제지만 접속이 돼도 속도가 너무 느리다. 물론 우리나라가 매우 빠른 것일 수 있지만, 필리핀의 인터넷 속도는 가관이다. 가정용 인터넷 옵션은 10메가부터 시작한다. 10메가, 30메가, 50메가, 100메가... 기가 인터넷은 아예 옵션에 존재하지 않는다. 100메가 옵션만 선택해도 우리나라의 기가 인터넷 보다 비싸다. 비싼 비용으로 느린 인터넷을 이용하다 보면 정말 답답하다. 거대 인터넷 서비스 업체가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다 보니 서비스 개선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 정부의 압력으로 서비스가 조금 개선된 상황이라고 하니 이전에는 어떻게들 살았는지 모르겠다. 회사 입장에서는 어차피 가정용 인터넷 가입자가 많지 않으니 모바일 쪽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은 이제 국가 기반시설이다. 인터넷 접속이 불안정하면 사회 전반의 서비스들이 유지되기 힘들다. 모쪼록 필리핀의 인터넷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띠리디리디띠" 바퀴벌레 레이더 가동
필리핀에 살면서 바닥을 보면서 걷는 습관이 생겼다. 수시로 출몰하는 바퀴벌레를 피하기 위해서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바퀴벌레를 밟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필리핀에는 바퀴벌레가 많다. 열대지방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많다. 하필 직전에 거주하던 곳이 싱가포르여서 열대지방이라는 핑계가 와닿지 않는다. 싱가포르에도 바퀴벌레는 있었다. 단지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필리핀에 온 후 바퀴벌레는 일상이 되었다. 아무리 약을 치고 때려죽여도 수시로 출몰한다. 라이트부터 헤비급까지 다양한 체급의 바퀴벌레들이 등장한다. 가끔 쥐도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바퀴벌레가 압도적으로 많다. 어느 곳도 안전지대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스타벅스 매장 한복판을 활보하는 거대 바퀴를 목격하기도 했다. 필리피노 아가씨의 발을 아슬아슬하게 비켜지나가는 상황에서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아가씨의 대범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특히 와이프와 주차장을 지나 쇼핑몰에 갈 때면 바퀴벌레 레이더를 가동해야 한다. 입으로 "띠리디리디띠"를 외치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많을 때는 주차장을 통과하면서 다섯 마리 이상을 마주치기도 한다. 주차장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보이지 않으니 집중해서 살펴야 한다. 바퀴벌레를 발견하면 레이다의 신호음이 짧아진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를 보호하며 주차장을 무사히 빠져나가길 기도하며 걷는다. 나름 방역을 하는지 살아서 움직이는 놈들 보다는 죽어서 뒤집힌 놈들이 많다. 하지만 뒤집힌 놈도 끔찍하기는 매한가지다.
한 번은 와이프와 뒷골목을 지나다 바퀴벌레에 포위된 적이 있다. 처음 한두 마리가 목격되었을 때 빨리 경보음을 울렸어야 했는데, 너무 안이한 생각으로 골목 깊숙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사방이 바퀴벌레였다. 근처에서 청소를 한 건지 방역을 한 것인지 어디서 그 많은 바퀴벌레들이 나왔는지 주변에 족히 오십 마리는 되어 보이는 바퀴벌레들이 분주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이즈도 주로 헤비급들이었다. 바퀴벌레라면 질겁을 하는 와이프는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하면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와이프를 차분히 달래며 마인드컨트롤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굳은 마음으로 한 걸음씩 되돌아서 위험지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로 그 골목은 지나갈 생각조차 안 한다.
어느 곳도 바퀴벌레로부터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 엊그제는 엘리베이터에서 와이프 어깨에 정체불명의 물질이 떨어진 것을 목격하였다. 재빨리 손으로 쳐서 떨어트린 후 자세히 살펴보니 바퀴벌레 사체였다. 재빠르게 대처했으니 망정이지 와이프가 알아챘더라면 또 큰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당연히 여겼던 위생의 소중함이 필리핀에서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졌다. 바퀴벌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답이 안 보이는 교통난
필리핀의 도로사정은 최악이다. 보수가 잘 되지 않아 울퉁불퉁한 도로도 문제지만 차가 너무 막힌다. 거미줄처럼 엉킨 전깃줄 아래 앞으로 가지 못하고 경적만 울리고 있는 차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것이 큰 문제로 보이지만 도무지 개선점이 보이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남기고 간 지프차를 개조해서 만든 지프니를 '필리핀의 명물', '필리핀의 대중교통'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실제로 지프니를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탈 엄두가 안 난다. 매일 이용하는 사람이야 목적지를 알고 가겠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노선버스처럼 일정하게 정해진 노선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듯하다. 저렴한 요금을 강점으로 서민들의 운송수단이 되지만, 지프니가 발생시키는 엄청난 매연과 소음은 필리핀의 공기를 나날이 악화시키고 있다. 지프니에 좌석이 많지 않아 뒤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심지어 지붕에 올라가 타고 가는 경우도 있다. 얼마 안 되는 지프니 요금도 낼 수 없는 이들의 현실이 답답하다. 목숨은 소중하다. 이들은 오늘도 목숨을 걸고 이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자전거 타기를 참 좋아한다. 하루에 100Km를 달릴 정도로 자전거에 미쳐서 살기도 했다. 필리핀에 살면서 제일 힘든 점은 자전거를 맘껏 타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로에 보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 보인다. 자전거를 타면서 몇 번 사고를 겪었기 때문에 자전거가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필리핀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목숨을 내놔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자전거를 더 많이 타기 위해 자전거를 타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지프니와 오토바이에 더해 자가용도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필리핀에서도 어느 정도의 소득이 있다면 자가용은 필수품이다.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아서 자가용 이동이 편리하다. 아니 불편하다. 도로사정은 좋지 않지만 지프니, 오토바이, 승용차가 뒤엉켜 최악의 교통체증을 연출한다. 마닐라의 교통체증은 우리나라의 교통체증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강남 한복판 최악의 러시아워가 거의 하루종일 펼쳐진다. 출퇴근 시간 때는 교통체증으로 인해 이동에 시간을 정할 수 없다. 그나마 이동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비가 많이 오면 도로가 침수되어서 이동 자체가 불가능할 때도 많다. 그럴 때면 시장이 화끈하게 '왈랑파속'(임시 공휴일)을 발표해 버린다. 매일 출근해야 하는 입장에서 하루 쉬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교통체증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이 막혀온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도로를 개선하고 대중교통을 선진화시키면 되겠지만 정부가 의지가 없는 것인지, 각종 이권이 개입된 건지 도무지 개선사항이 보이지 않는다. 도로에는 고급승용차도 눈에 많이 뜨인다. 고급 승용차를 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굳이 대중교통을 선진화시켜 봐야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혼자 행복할 수 없다.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 빈민층의 습격을 두려워하며 총을 든 경비원이 지키는 높은 담 속에서 숨어 사는 삶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시설 좋은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닐까? 그 높은 담이 언제까지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저렴한 하지만 불편한 인건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커다란 손바닥 모양의 수신호 판을 흔들면서 교차로에 서 있는 '신호등 맨'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나마 BGC에는 교차로마다 신호등이 보이지만 BGC를 벗어나면 신호등이 거의 없다. 대신 '신호등 맨'이 교통신호를 대신한다. 신호등 하나를 설치하는 것보다 '신호등 맨' 한 명을 고용하는 것을 저렴하게 생각하는 현실에 허탈함만 가득해진다.
필리핀은 인건비가 저렴하다.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적으니 수요공급 법칙에 의해 인건비는 저렴해질 수밖에 없다. 저렴해도 너무 저렴하다. 자주 가는 맛사지샵에서는 한 시간 전신마사지가 우리 돈 만이천 원 밖에 안 한다. 물론 고용주가 이중 절반 이상을 가져갈 것이다. 와이프가 고용한 영어 회화 선생님은 한 시간에 5천 원이다. 집안일을 해주는 '아때'(식모)는 시간당 계산하면 2천5백 원을 받고 일을 한다. 물론 시간이 늘어나면 하루에 일, 이만 원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래 봤자 하루종일 일해서 세끼 빅맥 세트를 먹을 돈도 벌 수 없다. 필리핀의 배달서비스는 참 편리하다.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각종 배달을 시킬 수 있다. 지금은 한국에서 추억이 되어버리 중국집의 짜장면 무료배달 서비스를 필리핀에서는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 이면에는 불편한 인건비의 현실이 존재한다. 소비자 입장에서 인건비가 저렴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일하는 사람 입장을 생각해 보면 가슴이 아프다. 하루 일해 하루 쓰면 남는 것이 없다. 아파서 일을 못하면 굶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다. 정말 하루살이 인생이다. 고급 업종에 일하는 사람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학교 선생님들이 한 달에 백만 원 벌기 힘들고, 심지어 간호사와 의사의 수입도 좋지 않다. 나름 필리핀에서는 고급 인력인 간호사, 의사들이 해외로 살길을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필리핀의 의료 여건은 좋을 수가 없다. 전체 인구의 70%가 평생 병원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다고 한다. 아프면 견뎌야 하고, 못 견디면 죽는 것이다. 사회적인 보호망을 바라는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지금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선교사업을 활발히 한다. 필리핀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그중 치과서비스의 인기가 좋다. 이빨이 아프면 밥을 제대로 못 먹고 그러면 영양실조로 몸이 망가진다. 의료봉사에서 실시하는 치과치료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상적인 치과치료와 거리가 멀다.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통증을 견디다 못해 찾아오고, 그러면 이미 이빨의 뿌리까지 전부 녹아내린 상태여서 발치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 번에 다섯, 여섯 개씩 발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발치 후 임플란트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나마 발치를 제때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제때 발치를 못해 안쪽에 감염이 진행되면 자칫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치과 치료를 못 받아 죽을 수도 있다니...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모르겠다.
문뜩 필리핀에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필리핀의 현실을 즐기고 싶다. 필리핀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해 지기를 오늘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