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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Sep 21. 2019

지금, 여기, 나

퇴근길 차 안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한 편을 들었다. 법륜스님은 10분,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자연스럽게 파고든다.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밀고 나가는 것도 아닌데, 듣다 보면 어느새 질문자가 직접 정의하지 못했던 가장 명백하고 근본적인 사실에 다가가 있다. 누군가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인 사실들로 정리하는 기술이 탁월하신 분이다. 그래서 가끔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뒤따르는 설명을 듣다 보면 맞는 말씀이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늘 고른 에피소드는 본인의 선택과 결정에 고민과 후회가 많은 한 여자분의 사연이었다. 특이하게도 영어 특별편이어서, 질문자는 영어로, 스님은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중간에서 동시통역가가 두 언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통역가 분의 영어 표현력이 너무 좋아서 감탄하며 들었다.) 질문자는 '내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더 좋지 않았을까', '나는 왜 지금 이것 밖에 못할까',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까' 등 본인의 열등감과 미래 걱정에 사로잡혀 늘 괴로운 마음이 고민라고 했다. 과거의 안 좋은 특정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머릿 속에서 재생되는 것도 고통스럽다고 했다.


여느 때 처럼, 스님의 답변은 명료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단어다. "지금, 여기, 나 (Now, Here, Me)". 이 세 단어의 바깥에 있는 것은 내 욕심이 지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 허상 속의 나와 실제의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이 심플한 답변에 질문자는 당황한듯 연신 ‘But’을 내뱉었다.

“But it seems to be easier said than done.” 

“But some people have different problems.”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내 통제 밖의 여건 때문에, 혹은 과거에 A 대신 B를 선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게 차라리 마음 편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20분씩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다보면 안 좋은 생각습관이 자리 잡는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 반듯하고 정갈한 살림살이, 성실하게 가꾼 건강한 몸, 깨끗한 피부의 예쁜 얼굴, 홀가분하게 떠나는 럭셔리 여행,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페르소나에 다 집약시켜 놓고 나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다. 성미에 차지 않는 회사 일, 어딘가 항상 너저분한 방과 거실,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근육과 관절들, 잡티와 흠집으로 가득한 내 얼굴, 럭셔리 여행을 가기엔 시간과 비용 모든 면에서 빠듯한 나의 이 현실을 보라. 내 능력이 여기까지이고, 내 게으름이 이 정도이며, 나의 유연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아픈 사실을 직시하는 것 보다는, 지금 나한테 마땅한 경력과 학위가 없어서, 내가 과거에 이 부분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하지 않아서, 지금 내 비자와 신분 상황 때문에, 부모님이 나한테 쟤처럼 좋은 지원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나한테 좋은 멘토가 있었더라면, (심지어는) 나에게 10억만 있었더라면, 같은 핑계를 대고 나를 슬쩍 숨기는게 훨씬 쉽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언제나 그렇듯 내가 슬쩍 숨는다고 내 열등감도 따라서 없어지지는 않으니. 닭이 모래 속에 대가리를 처박고서 제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 여기, 나"에게 집중하는 연습이 나에게도 필요함을 깨달았다. 평소 꽤 단단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존감은 허상 한 겹 걷어내면 와르르 다 무너져버릴 정도로 무르고 연약한 것이었구나. 스님이 질문자에게 반복해서 말해보라고 시킨 문구를 따라해본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 한 마디에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남편과 매일 저녁을 지어먹을 수 있는 시간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여백, 물레 위에서 흙을 만지며 얻는 기쁨과 매달 수업료를 낼 수 있는 금전적 여유, 요가매트 사이즈의 공간만 있다면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능력, 부모님이 물려주신 큰 키와 많이 먹어도 살이 잘 안 붙는 체질적 특성, 심지어는 (비록 꼰대스럽지만) 내 실력을 알아봐주는 회사 사람들까지, 완벽히 행복하고 좋은 것들 투성이다. 특히 요 며칠동안은 수술 때문에 가족들과 회사 사람들의 케어를 받으며 나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듬뿍 느끼고 있다. 다만 아직은 집중하고 들여다봐야만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게 문제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집중할 때 괴로움은 찾아온다. 내가 가진 것들에 집중하면 그 자산의 깊이와 넓이를 더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보이겠지. 집중하자. 지금, 여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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