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미국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a Kim Aug 10. 2021

나 어떡해

임신 5주차의 기록 (2)

두 번째 임신테스트기 이후에는 더 이상 임신 사실을 외면하거나 부인할 수가 없었다. '임산부가 된 나의 몸'은 비록 아직 느낄 수는 없지만 실재하는 현실이었다. 뇌가 아닌 마음으로도 임신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단계에 이르면서 대(大)패닉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며칠 동안 남편에게, 부모님과 동생에게, 심지어 시어머니와 시동생에게까지 "나 어떡해?", "저 이제 어떡하죠?"를 주구장창 외쳐댔다. 가족들 모두 임신 사실에 흥분하고 기뻐하며 몇몇은 눈물까지 보였지만, 나의 호들갑과 그들의 흥분은 결이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나의 임신 사실에 기뻐한다'는 생각에 서운하기까지 했다.


'나 어떡해.' 그 안에 들어있는 자세한 뜻은 이랬다.

'나 이제 나로서의 인생은 끝일 것 같은데 어떡해?'

'나 아직 내 삶을 내려놓고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칠 자신이 없는데 어떡해?'

'나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육아는 더더욱 다른 세계 이야기인데 어떡해?'


말하자면, 신생아나 아기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아니 상식마저도 전혀 없었다. 아는게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의지와 믿음이 있으면 (결혼할 때 앞으로 뭐가 펼쳐질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잘 살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처럼) 무대포로 밀고나가면 될 일인데, 그럴 자신감도 없었다. 피할 수 없는 파도 앞에서 헤쳐나갈 지식도 맞설 용기도 없는 자에게 남은 것은 오직... 두려움 뿐이었다. 내가 과연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끝이 없는 바닥으로 마음을 추락시켰다. '나 어떡해'는 그런 두려움과 공포감을 차마 세세하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겁쟁이식 표현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나 어떡해?'라는 나의 습관성 질문으로 남편 귀에 딱지가 앉을 때 즈음, 육아 전반에 대한 나의 무지가 나의 패닉 상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엄마, 좋은 부모가 된다는건 어떤걸까. 어떤 원칙이나 신념이 필요한 걸까. 육아에 필요한 대원칙만이라도 하나 있다면 마음이 조금 진정될 것 같았다. 

'그래, 정보야 습득하면 그만이지. 인터넷에 다 나와있을거야.'

소위 말하는 '맘카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 맘카페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임신에 기뻐하는 예비맘들, 난임에 속상해하는 예비맘들, 빽빽한 출산 전 준비물 리스트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과 용도의 산후관리 및 육아 용품들이었다. 특히 이 물건이 좋아요, 저 물건이 좋아요, 같은 글들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고 더 뒤쳐지는 것 같은 스트레스를 주는 성격의 내용이라, 오히려 맘카페를 보고나니 더 마음이 어지러웠다. 나에게 맞는 임신/출산/육아의 대원칙과 철학을 딱 제시해줄 그런 컨텐츠는 없는걸까?


그 날 밤, 침대에 누워서 이런 고민을 남편에게 나누자, 남편은 조용히 심호흡을 세 번 해보라고 했다. 좀 웃겼지만 시키는대로 따라했고, 뒤이어 남편이 말했다.

"그런게 어딨어. 나는 우리가 늘 하던대로 그냥 하면 된다고 생각해. 우리답게."

우리 남편 참 속 편한 소리하고 앉아있네. 그게 남편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흠..."

한숨 비슷한 것을 쉬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내가 향한 곳은 온라인 서점이었다. 맘카페가 비정제된 정보가 산발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라면, 책은 좀 더 정제된 형태의 지식의 집약체니까, 분명 좋은 육아서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임신, 출산, 육아'와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자, 대백과 류의 책부터 시작해서 각종 방법론과 안내서, 에세이 들이 쏟아져 나왔다. 임신을 재고해보라는 메세지의 에세이도 있고 (이게 제일 사고 싶었음), '군대식 육아'를 제창하는 책도, '내향적인 엄마'를 위한 육아서적도 있었다. 책 제목과 개요를 살펴보면 볼수록, 이 세상 모든 육아 방법론을 내가 다 습득할 수는 없을 것 같았고, 그 중에 나에게 꼭 맞는 방법론이 있을리도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지난 밤 남편의 말이 정답이었다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우리 평소의 생활태도와 방식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또 부지런히 해나가면 될거라는 것. 지난 며칠 간 끙끙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노력에 비하면 너무 교과서적이고 시시한 답변이지만, 곱씹을수록 맞는 말인 것 같다.


답변이 심플해지자, 오히려 빈 칸을 채워나갈 용기랄까, 설렘 같은 것이 생겼다. 도저히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은 거대한 산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다가, 사실은 내가 흙 퍼나르고 꽃 심고 나무 심으면서 동산을 가꾸어나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산을 쌓는 일은 여전히 벅차고 힘든 과업이지만, 내 방식대로 꾸려나갈 생각에 조금은 (아주 아주 조금) 기대되는 마음이 생겼다.


다만 임신 육아 관련 서적을 10만원치 주문한 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초의 서프라이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