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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신우 Sep 23. 2024

그 한 줄

반가운 손님이 내 방을 찾았다. 서울에서 근무를 하다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2년 동안 일하다 1월 부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분이다. 십수 년간 가깝게 지내고 해외여행도 몇 차례 함께 다녀왔을 정도니 친한 사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그녀는 방송팀 PD인데 업무적으로도 함께 할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친하게 되었다.

지난 한 주 동안 기분이 더 다운되어 주말에는 아예 글을 한 줄도 적지 못했다. 그날 그녀가 나를 찾아왔는데, 도저히 누구를 만날 상황이 아니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는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가고 난 후 방문을 열어보니 문앞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었고, 곧 “힘 내.”라는 카톡 한 줄이 날아왔다. 2년 만에 찾아온 손님이었는데 그렇게 보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양손을 번쩍 들고 서로를 껴안으며 환영 인사를 했다. 함께 방에서 식사를 하며 서로의 근황에 대한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여전히 글을 계속 써요?”

아마 작년에 몇 차례 써서 보여준 글을 기억하는 듯했다. 이별의 아픔을 겪은 후 독서에 파묻혀 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쯤 되었다. 독서에도 여전히 열의가 있어 얼마전에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의 저자인 최인아 작가님을 직접 뵙고 오기도 했다.

“너무 좋아 보여요.”

그녀는 우울하고 힘든 삶의 돌파구로 독서를 하고 글쓰기를 시작한 내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12월부터는 하루에 한 줄이라도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글을 쓰면 어떤 게 좋아요?”

“우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요.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고 나 자신과 대화하면 편안해지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외롭지 않아요. 말하지 않고도 심심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내가 어디에 글을 쓰는지 알고 싶어 했지만, 나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글을 쓰는 건 진심 어린 공감과 응원을 받고 싶어서예요.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천사들이 해주는 한 마디가 때로는 더 큰 힘이 되거든요. 요즘은 글쓰기가 살아가는 힘이에요.”

나도 모르게 이 이야기를 하며 미소를 지었고, 내 얘기를 듣던 그녀는 너무 좋아 보인다며 자신도 글을 써야겠다고 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난해 그녀도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내가 다니는 병원에 동행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공유했다. 아마 그녀 또한 우울증을 극복해 보자는 의지를 가지고 내게 물어본 것 같다.


그녀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나는 더디지만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복은 있지만 이 모든 게 다듬어지는 과정이라는 걸 안다. 이 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의 한 줄은 웅크리고 있던 내 마음을 열고 세상으로 나올 용기 한 모금과 같다. 자신의 어둡고 아픈 감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딛기가 정말 힘이 든다. 남들은 ‘그 한 발을 내딛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라고 말할 수 있지만, 때로는 죽기보다 힘든 게 그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나 역시 한 줄을 쓰는 것이 아픈 내 마음을 직면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처음엔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줄을 끄집어내면 그다음 줄은 조금 더 솔직하게 꺼내 볼 용기가 생긴다. 어쩌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한 줄의 용기, 한 걸음의 발자국이 아닐까.

편안하게 대화를 하고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그녀는 내 방을 나섰다.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를 만나러 와준 용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 또한 나처럼 한 줄의 용기를 내길 간절히 바랐다. 이 한 줄이 우리의 긴 터널을 끝내고 밝은 세상으로 나갈 커다란 시작이 되어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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