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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 Apr 15. 2024

라디오, 세상을 향한 작은 문

지인을 만나러 분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오래간만에 라디오를 켜보았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라디오를 청취한 것이. 중학생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라디오를 즐겨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스마트폰이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 보고, 듣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요즘은 유튜브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나 다양한 OTT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선호하는 콘텐츠만을 골라 듣고, 볼 수 있다. 

요즘은 유튜브 동영상도 알고리즘으로 인해 나의 취향에 맞는 영상을 추전해주고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의 영상은 아예 리스트에도 없다. OTT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역시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수십 곡, 혹은 수백 곡을 저장해두고 그 음악만을 반복해서 듣게 된다. 나의 취향을 확실히 알 수 있고 거기에 맞춤형으로 내 정서의 목마름이나 허기를 채워주는 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그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날씨 탓인지 마음 속 어딘가 모를 공허함이 있었나 보다. 주로 운전을 하면서 유튜브 영상 소리만 듣거나 평소 저장해둔 음악을 즐겨듣곤 하는데 그 날은 나도 모르게 라디오 버튼에 손이 갔다. 약속 장소까지 가는 내내 라디오를 들으며 마음의 허기가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최근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는 일이 드물었는데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그 사연과 관련된 음악을 들으며 나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라디오 DJ의 재치 있는 입담과 함께 시청자들로부터 보내온 사연과 신청곡을 들으며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이나 청소 시간에도 교내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사연과 신청곡을 들려주었다. 나 역시 친한 친구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신청곡과 함께 보낸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어른들이 옛날 노래만 듣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요즘 나를 보면 옛 어른들보다 더 유행에 둔한 것 같다. 나는 요즘 젊은 세대의 인기 가수나 유행하는 노래를 거의 모른다. 오락거리라고는 TV나 라디오가 전부였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TV 앞에 앉아 당시 유행하는 노래나 인기 연예인을 접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TV 시청을 거의 하지 않게 된 나로서는 요즘 누가 인기가 있는지, 어떤 노래가 유행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것만 골라서 듣고, 볼 뿐이다. 

그 날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를 통해 최근 유행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애써서 고르지 않아도 알아서 곡 소개와 곡의 다양한 정보까지 제공해주니 그 시간만큼은 최신 유행곡과 트렌드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한 청취자의 신청곡과 사연이 잊히지 않고 계속 머리와 가슴에 맴돈다. 사연인 즉 이번에 수능을 본 딸이 있는데, 자신이 바빠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해 늘 미안했는데도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며, H.O.T의 ‘행복’을 신청한 것이다. 추정하건대 아마도 신청자는 내 나이 비슷한 연령의 어머니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수능을 준비할 무렵에 H.O.T의 ‘행복’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으니 얼추 내 나이쯤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행복’을 나도 크게 따라 부르며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지인과 만난 후 귀가 길에도 라디오를 켰다. DJ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음악이 흘러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들은 음악은 외국 곡이었는데, DJ를 통해 노래제목에 대한 히스토리나 가수 스토리도 들을 수 있었다. 영상이 없는 라디오라 DJ 얼굴이나 사연을 보낸 애청자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을 상상하며 라디오의 세계에 홀딱 빠져 있느라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근래 세상과 단절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며 나만의 동굴에서 지내 온 수개월의 어둠의 시간이 떠올랐다.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를 통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이제는 세상의 소리를 듣고 세상에 나와 보라는 작은 외침이 심장을 비집고 나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점점 잊혀져가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 흥미가 떨어져 가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라디오다. 내가 특정하는 음악만 듣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냥 흘러나오는 걸 듣는 게 라디오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러한 라디오는 오히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 취하며 살아가지만 그렇게 살면 내 생각이나 삶이 확장되지 않는다. 때로는 내가 듣고 싶지 않고 원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들으려 할 때 삶이 확장된다. 나 역시 우연한 계기로 라디오를 통해 그토록 두려웠던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 허물 수 있었다. 라디오는 내게 세상을 향한 작은 문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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