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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 Apr 29. 2024

여자 이방인, 이신*

이방인

이방인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라는 뜻 안에 ‘문화적인 차이’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서울경마장에는 세 명의 이방인 조교사가 있다. 프랑스인 조교사, 이탈리아인 조교사, 그리고 여자 조교사 ‘나’이다.

나는 20세기말인 1999년에 서울경마장에 왔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서울경마장에는 말을 관리하거나 타는 여성이 한 명도 없었다. 그 어떤 사회보다 보수적이고, 여성의 자리매김이 쉽지 않았다. 2010년 전까지는 외국인 조교사나 여성 조교사가 없었다. 2011년에 한국 최초로 여성 조교사가 탄생하였고 그 이후에 외국인 조교사가 한두 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43명의 조교사 중 외국인 남자 조교사 두 명과 여자 조교사 한 명이 활약 중이다.

한국의 경마장은 2001년 이전까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나는 한국 최초의 정식 여성 기수였다. 1970년대 한 여성 기수가 짧은 기간 동안 활동을 했다고는 하는데 40승을 채우지 못해 견습 기수로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정식 여성 기수는 내가 되었다. 당시 경마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성 기수를 위한 화장실도 없었고 전용 샤워 시설도 없었다. 말을 훈련시키고 땀에 젖었을 때는 세면대에 물을 받고 씻었던 기억이 난다. 물리적인 힘듦은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될 수 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많은 말들에 앞선 ‘여성이기 때문에’라는 수식어가 특히 그랬다.

얼마 전 프랑스인 조교사 토니, 이탈리아인 조교사 루이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들은 나와는 조금은 다른 이방인이지만 나름의 고충과 애환이 있었다. 나와 유사한 점 또한 많았다. 가장 유사한 공통점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예를 들어, 성적이 좋아 마주와 팬들에게 인기가 있을 때는 “외국인이고 여성이라 혜택을 받는 거야.”라고들 이야기한다. 반대로 성적이 좋지 못해서 질책을 받거나 비난을 받을 때는 “외국인이라 정서와 문화가 잘 안 맞네. 아직 한국 사회에 적응이 안 됐나 봐.” “그래, 여자니까 남자들 사이에서 버티는 게 힘들겠지.”라며 평가절하를 하곤 한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닌, 남들과 ‘다름’을 놓고 평가하는 부분이 담겨 있어 늘 속상했다.

잘해도 또한 잘못해도 오롯이 나로서 인정받는 게 힘든 것이 이방인의 삶인 듯하다. 남성의 세계에서 여자라는 이방인으로 살아온 삶이 2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나도 상대방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주마를 타고 달리고 관리하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런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남들과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만의 매력과 개성을 살려 ‘나’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간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여성이 없는 남자 세계에서 단 한 명의 여성으로서 씩씩하게 버티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고도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다른 남자 조교사들 역시 각자의 힘듦이 있지 않을까. 나보다 힘든 조건과 환경 속의 남자 조교사들을 볼 때면 어쩌면 우리 모두 때로는 각자가 이방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싶다.

여자로서 남성적인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 승부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힘들겠지만 힘듦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야 누구든 버틸 수 있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없는 길을 개척해 가며 긴 시간 꾸역꾸역 버텨 온 삶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란 점은 확신한다. 내가 가는 길을 따라 누군가는 나보다는 덜 힘들게 따라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방인. 낯설고 외로운 단어. 경마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외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각 처한 환경과 상황이 다르다. ‘나만이 그렇다’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에게나 각자 다른 고충과 애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사람은 다 똑같다. 그 속에서도 흙 속의 빛나는 진주 같은 보석이 되는 것만큼은 오롯이 자기 스스로만이 이루어 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르다. 그 많은 세상 사람 중 하나뿐인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승부의 세계에서 승리하는 진정한 승부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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