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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신우 Apr 22. 2024

나의 주홍글씨와 글쓰기

오래도록 앓고 있는 병이 점점 나아짐을 느낀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공황은 여전하지만, 우울과 불안 증세는 점점 호전되어 가는 듯하다. 상담과 약물치료도 성실하게 잘해오고 있다. 일과 일상생활에서도 조금씩 자신감이 생긴다. 무엇보다 술을 절제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술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술을 끊지는 못했다. 사실, 완전히 끊고 싶지는 않다. 억지로 끊거나 절주 하려 하다 보니 오히려 강박감이 생기기도 했다. 술 생각이 더욱 나거나 술에 집착해 급기야 사고로 이어진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사실, 내 삶은 술로 인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날마다 술을 마시던 나를 거울에 비춰볼 때면 온몸에 흉측한 문신이 새겨진 것 같았다. 술은 나에게 주홍글씨였다. 언제나 이 문신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일에서도 생활에서도 나 자신에게 늘 이겼지만, 술과의 싸움에서는 항상 지기만 했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은 이별로 인해 더욱 방황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기는 했지만, 이별은 나를 더 술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나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었다. 24시간 술에 의존한 채 인생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런 나를 친구들은 안타까워했고, 나중에는 그들도 나로 인해 힘들어했다.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삶의 무게를 버티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나를 봐주기란 버거웠을 것이다.

마음의 병까지 얻으며 나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나 자신을 더욱더 미워하게 되었다. 더 이상 친구들도 찾지 않고 홀로 나만의 동굴 속에서 수개월 동안 우울과 외로움을 버텨야 했다. 더는 삶을 삶아갈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 그냥 삶을 끝내는 게 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내가 키우는 두 마리 고양이가 떠올랐다. ‘내가 없으면 깐부와 던킨은 어떡하지?’ 내 곁에서 함께 잠들고 깨는 이 친구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주는 친구들을 두고 가자니 마음이 아파왔다. 이들에게는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었고, 울어도 웃어도 힘들어도 이 고양이들이 내 곁에 있어 주었다고 생각하니 고마움도 밀려왔다.

‘이런 생각들을 글로 남겨보는 건 어떨까.’

이때를 시작으로 나는 조금씩 서툴지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나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과 진솔한 대화를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글을 쓰면서 나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지금의 내 마음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글로써 찬찬히 나는 내 얘기를 들어주기 시작했다. 내면의 나와 대화한다면, 부끄러울 것도 없고, 거리낌 없이 질문도 하고, 거칠 것 없이 대답도 가능하지 않던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아는 나와의 진솔한 대화 내용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것처럼 가슴을 뻥 뚫리게도 해주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나쁜 습관들 또한 조절이 되었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최대한 아껴서 글감으로 이용했다. 말을 많이 안 하고 듣게 되다 보니 말로 저지를 수 있는 실수도 줄어들었다.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던 마음의 흉측한 문신도 글을 쓰면서 서서히 지워져 감을 느꼈다. 참 신기했다.

글쓰기란 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걸까.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 얘기를 들어줄 곳이 없어서 병들어간다. 나 역시 내 삶을 통틀어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모든 걸 속 시원하게 얘기하며 살지는 못했다. 각자의 사연들로 버티며 살아가는 주변 지인들에게 나의 얘기가 혹시 짐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았다가 오히려 상처를 받은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쉽게 얘기를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글은 내 마음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도구다. 글쓰기를 통해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몰랐던 내 생각과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글쓰기는 나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기쁜 일, 슬픈 일, 속상하고 우울한 일 등 수많은 감정들이 수없이 내 마음속을 들락거린다. 그런 감정들을 글로 써서 정리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마음이 우선 정돈이 된다. 어지러이 떠다니는 감정들은 자취를 감추고 더 나은 내일이 되길 기다리는 마음이 생겨난다. 또한 글은 내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하루하루의 기록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지워지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만 같다.


누구보다 나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한때는 마음이 복잡하거나 힘들 때 주변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고, 그들에게 속상하고 힘든 얘기를 하곤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이면 지인에게 전화해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공허함만 생길 뿐이었다.

아직도 정신과 약은 복용 중이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과 대화를 하게 되면서 이 병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 나는 이제 달라지고 있다. 글을 쓰며 나 자신을 더 알아가고 이해하고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어떤 친구보다 나 자신과 더 친한 사이가 되어간다. 그래서 요즘은 글 쓰는 시간이 가장 기다려지고 설렌다. 언젠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몸에 새겨진 나의 주홍글씨들도 모두 사라져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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