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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신우 May 20. 2024

가면을 벗고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날을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아니 여러 번 스스로 감정 노동자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마방(돌보아야 할 말들이 있는 나의 일터)에서 조교사는 관리자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조교사들은 모두 감정 노동자이기도 하다. 매일 말 관리를 하고 매주 경기 결과에 따라 평가받고 마주들 혹은 경마팬들로부터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그중에서도 질타를 받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응대하고, 그들의 질타나 비난, 마음을 짓뭉개는 말과 그간의 모든 고생을 헛되게 여기는 아픈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꺼이 감수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달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나 역시 인간인지라 앞에서는 그렇게 가면을 쓰고 연기할 때도 있지만(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물론 많다) 뒤돌아서면 분노가 폭발할 때도 많다. 그때마다 참는 에너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기꺼이 현재의 그런 힘듦(스트레스)을 감수한 채 가면을 쓰고 연기하며 살아간다. 내 안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뒤죽박죽 얽혀 갈등을 일으키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야. 이 일은 내게 꼭 필요하잖아.” 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정신 무장을 하려고 애쓴다. 나에게 있는 여러 개의 가면(예를 들어 쾌활한 가면, 친절한 가면, 인내심 강한 가면, 동정심을 유발하는 가면 등) 중 하나를 바꿔 쓰면서 매일 마주, 즉 흔히 말하는 갑을 응대해야 하는 감정 노동자. 그게 바로 나인 것이다. 때때로 일과 무관한 일까지 응대해야 할 때는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날 지경이지만 애써 참고 응대해야 하는 나는 감정 노동자이다.


내가 일하는 직장의 휴일은 월요일, 화요일이다. 경주가 열리는 토요일, 일요일이 끝나는 월, 화요일 이틀이 쉬는 날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내게는 쉬는 날이 없다. 월요일, 화요일에도 여전히 업무는 계속된다. 마주들로부터 오는 전화는 요일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쉬는 날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렇다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거나 쉬는 날이니 급한 일이 아니면 수요일에 전화를 부탁한다고 말했다간 밥줄이 끊길 확률이 높다. 여기는 평판이라는 게 무서워서 쉬는 날에 마주들에게 응대를 하지 않았다가는 거의 직무유기 수준으로 평가를 내린다.

지난 월요일에도 전화가 왔다. 나는 월요일에는 대학교 수업을 나간다. 겸임교수직을 맡은 학교 수업이 있어서. 그날도 수업 중인데 마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안 받거나 늦게 다시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언짢아한다. 바로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그런 상황을 잘 아는 나는 수업 도중에도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경주 중에 말이 발굽을 조금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흔히 일어나는 부상이고 소독만 잘해주면 금방 나을 수 있는 부상이다. 그런데 마주는 말을 휴양 보내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말의 휴양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어느 정도 회복할 시간을 주고 휴양을 보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그런데 대뜸 하는 말이 “전문가 얘기를 듣다가 되는 일이 없다.”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고 뭐라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의 휴양을 핑계로 다른 마방으로 옮기겠다는 뜻이 포함된 듯했다.

통화한 마주의 말은 지난해 내가 미국에서 애써 열심히 발품을 팔아 데려온 말이다. 예상한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데려올 수 있어서 당시 마주는 굉장히 흡족해하고 또 내게 감사해했다. 많은 조교사들이 마찬가지지만 본인이 마음에 들어 직접 데려온 말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나 역시 이 말에 대한 기대와 애착이 컸다. 그리고 늘 마주는 “끝까지 이 말을 잘 맡아 달라.”는 당부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 즉, 쉬는 날 전화가 와서는 아내의 말을 듣기로 했다며 “아파도 지금 당장 휴양을 보내겠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안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고 냉정하게 할 수 있는 대답을 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수 분간 흥분된 감정이 진정되지 않았다.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생각했다. 이런 인간들은 언제고 이렇게 할 사람이 아닌가. 그 시기가 지금일 뿐이지.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으로 상처 난 마음을 봉합하고 나니,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


어디 이 일뿐일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감정 노동자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의 감정 노동자로 하루종일 고통받을 때면, ‘아… 나는 정말 누군가에게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된다. 가면을 바꾸어 쓰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잘 아니까.

잦은 출장으로 비행기를 탈 때면 기내에서 고정된 환한 얼굴로 나를 맞는 승무원을 만난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저 사람의 웃음은 진심일까?’ 의심하기도 한다. 나도 많은 순간 그러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이해하게 된다. ‘저런 웃음을 짓기 위해 얼마나 힘들까.’라고. 진상 고객을 만나거나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대하려면 나만큼이나 힘이 들 것이다. 나에게 강도가 센 마주라는 ‘갑’이 몇몇 존재한다면, 그들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고객이라는 ‘갑’이 존재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그게 아니고요.” “그건 아니고요.”라는 금지어다. 그 말은 곧 밥줄을 끊어내는 자살행위와도 같다. 내 생각을 소신껏 내뱉을 수 없다는 것 역시 가면을 쓰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다. 맞받아치고 싶은 말은 수십, 아니 수백 가지도 넘지만, 오늘도 나는 참는다. 그것이 나의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할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에 가면을 쓰거나 하고 싶은 말을 꾸역꾸역 참을 때마다 불행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나는 너무 오래 참고 나면 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세상의 수많은 갑은 을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는 걸 알까. 어쩌면 그들도 어딘가에서는 을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런 가면을 벗게 될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힘을 갖추고 싶다는 열망을 가질 때도 많다. 그때가 되면 이런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때로는 너무 오래 이렇게 살다가 진짜 ‘나’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를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글을 쓰며 나를 되돌아보고, 책을 읽으며 거울처럼 나를 비춰보기도 하고, 나의 내면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등으로 말이다.


이 직장에서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감정 노동자가 될 수 있고 나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포지션에 있든지 상대방을 조금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감정 노동자의 고통은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경우에 따라 누구든 감정 노동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모두 감정 노동자가 아닌 행복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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