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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18. 2023

15.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자고?

알아요, 저희 관계 진짜 이상한거. 

그 여름날, 우린 다시 만나기로 결정했고 그 이전에 수많은 결심과 좌절이 있었던 만큼 그에게 그럴거라고

말은 안했지만 난 굳게 다시 한번 그 결심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제 정말로 예전처럼 말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보자고. 더 이상은 또 도돌이표같은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부끄러움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쯤엔 하도 친구한테 붙었다가 또 싸우고

헤어져서 이번엔 진짜라는 둥, 난 정말 걔랑 안 맞는가보다 하면서 자책하다가도 또 몇 일 지나면 걔가 보고

싶다고 찡찡대는 게 너무 잦았기 때문에 당연히 민망했다 나도. 그 감정을 혼자 처리 하지 못해 친구한테

짐을 덜어 준 내가 못됐었고 게다가 다부지게 결심한 내 의지와 동반해 조금은 역설적으로 우리 관계에 대한

확신 또한 100%가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말하는 건 섣부른 처사라고 생각되기도 해서 다시 만나기로

한 사실을 말하는 건 잠깐 보류하기로 했다. 

물론, 이번 재회는 서로 매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는 걸 알고 있는 우리로선 꽤나 민망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결심한 거라 나도, 걔도 이번엔 잘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재회의 속성은 사랑의 시작과 속성 자체가 아예 달라서 '사랑은 일 처럼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은 다소

사람의 간사함을 간과할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회'

네이버의 재회는 다시 만남. 두번 째로 만남. 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하지만 우린 그 두번 째로 만남의 두번째가

단순한 두번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헤어짐을 결심했던 남녀가 다시 만나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하며 분명한 이유가 있어 서로 다른 길을 걷기로 했지만 제일 중요한 나의 마음이

아직 그/그녀를 잊는 것을 용납을 못한다는 것이 이미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 이라는 것의 어쩌면 가장 

단순한 속성과는 결이 아예 다르기에, 오로지 '사랑한다'는 감정만이 엮여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래서 사랑과는 아예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인 재회는 그 사람만 보이던 무모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그 열정의 부등호의 크기가 작아지는 경우가 좀 더 잦고, 가끔씩은 단순히 마음이라는 

하나의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재회는 내가 그/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데이터 베이스에 기반해

행동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있는 그대로 그/그녀를 보는 것이 어렵고 내가 아는 그/그녀의 모습을 

계속 상대방에 투사하기 때문에 재회 관계에서의 각자는 노력하지 않고서야 이 재회의 성공률은 미미하다.

이렇게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상대방에게 빠지는 처음의 관계에서 나오는 '사랑' 은 만만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고 하면 나 너무 사랑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보이려나? (쓰면서도 민망하다.)


그래서 재회라는 것의 기저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어쩔 땐 일하는 것 처럼 신경을 집중해 그/그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오로지 내 개인적인 생각임을 미리 밝혀두고서,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또 다시 익숙한것에 대해 마음을 놓아버리는 속도가

빠르더라, 간사하게도 우린 금세 재회의 그 벅찼던 느낌을 잊고 익숙한 것에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적어도 재회의 사랑은 어쩔 땐 일처럼 해야 한다. 자존심 상할 필요도 없고. 이미 처음의 사랑과는

다르단 걸 인정하고 넘어가면 되는건데 그게 그때의 나로선 자존심이 허락을 안했다. 

그 고비만 넘기면 일처럼 하지 않아도 될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었을텐데, 그를 일일이 신경쓰는 관계가

됐다는 것이 왜 자존심이 그렇게 상했을까? 아무래도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아왔던 몇년 전을 아직도 난

곱씹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우린 재회 이후 행복하게 지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도 많이 노력해줬다.

쉬는 날 매번 싸돌아 다니고 싶어하는 날 잘 알고 있는 그는 나와 함께 자주 돌아다녀줬다. 우린 데이트도

자주 했고, 여름 냄새 흠씬 풍기는 런던을 즐겼다. 

서운했던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내 생일 날. 일이 끝나고 만난 그는 꽃과 케이크를 사서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난 괜히 예전의 그와 지금의 그를 비교하게 됐다. 뭔가 그때의 생일 축하는

성의가 없어보였는데, 맞다. 위에 인간은 간사하니 뭐니 그거 날 빗대어 말한거다. 

일 끝나고도 그렇게 축하하러 와준 그 자체에 감사하기보다 이게 재회이기 때문에 나한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건가 라는 의심에만 집중했고 서운했으며 그 서운함을 감출 수 없는 난 싸울 불씨를

당겼던 거다. 난 내 생일이 곧 다가오니까 그 전부터 날 기쁘게 해줄 생각에 설레하던 그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단 걸, 머리론 알고 있지만 이게 참 어렵더라.  

그래도 그는 내 생일이란 것을 감안해 날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예전처럼 쩔쩔매고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었지만서도 나도 마음 다 잡으려고 당연히 신경썼고. 


행복한 날들이 물론 훨씬 많았지만 그 행복함 안에서 가끔씩 삐걱삐걱 하는 잡음들은 훨씬 더 날 예민하게 

했고, 그는 걸핏하면 이 관계에서 직면할 수 있는 머리아픈 문제들을 회피하려고 했다. 

이럴거면 재회는 왜 한거지?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도 그의 행동에 더욱 더 민감하게 굴게 

됐으며 우린 또 싸웠다. 그리고 또 한번 그의 입에서 그만하자는 소리가 나오고 나니 난 이젠 모욕당하는

기분이었고 멍청이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내 무덤 판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지가 연락하면

내가 받아주니까 정말 이 관계의 무게가 종이 한 장만도 안되는 건가 싶어서, 이제 정말 됐다고 생각했다. 

아니 몇달 됐다고 내가 얼마나 만만하면 이러지? 하면서. 


당연히 나도 헤어지자고 말이 나온 이후 맘이 편했던건 아니다. 우린 항상 이렇게 헤어졌었고, 완전히 끝나지

않았던 깨끗하지 않은 마지막은 그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난 일부러 인스타스토리에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스토리를 봤는지 안봤는지를 일일이 신경쓰며. 그에게 연락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그게 내가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리의 이런 미련한 패턴이 짜증나는 독자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도 완벽히 

이해 가능할만큼 우리는 이렇게 질질 끌어왔다. 

그리고 하루는 내가 아는 언니와 함께 루프탑 바에 가서 와인을 마신 걸 사진으로 올렸고 당연히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했던 듯 그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다시 한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며 한번만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잦은 우리의 이 어리석음에 나조차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진짜로 연락이 오니까

이젠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얜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서 이러는 걸까? 날 도대체 뭘로 보고 있길래

자기 혼자 끝내고 자기 혼자 또 돌아가자 말자를 말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정말 자기가 하자면 하는대로 하니

맘이 떴을 땐 헤어지자고 하고 다시 보고 싶으면 미안한 척 어떻게 좀 해보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나에게 얘란 도대체 뭘까 싶으면서 이번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 마음과 생각에 충실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문자로는 그냥 홀랑 그럼 얘기를 다시 해보자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정말 난 멍청이란 것을 자체 인증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난 시간을 좀 달라고, 생각을 해봐야 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만나기로 한다면 확실히 해야 할 것을

생각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젠 헤어지자고 말이 한번이라도 더 나오게 된다면 그땐 이 관계를 정말 

끝내야 할 거라고, 더 이상 관계의 끝맺음이 이렇게 가벼이 여겨져서는 안될 것 같다는 말을 분명히 하기로

생각했다. 난 다시 한번 또 걔를 믿고 싶었고 아직 걔를 놓을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과연 오로지 사랑에 100% 기반한 결정이었을까 싶지만 그게 뭐가 되었든 그때만큼은

아직까지도 그의 부름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 집까지 와서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이번은 정말이다 믿어달라고 빌었다. 

난 다소 차가운 표정을 띠고 하지만 이런 일이 너무 반복됐으며 지금까지 와보니 정말 너가 날 너무 만만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제대로 생각한거냐고 누차 물었다. 

건조하고 차갑게 그를 대했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딱 한번 더 믿어보자고. 정말로 이 이후의 다음은

없을 거라고 난 맘을 꽉 다 잡았다. 이미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이후는 심지어 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만남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너, 우리 집으로 다시 이사 와라. 우리 다시 같이 살자. 그러고 싶어.


악몽같던, 내가 쫓겨났던, 다시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그 공간으로 다시 살러 들어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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