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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19. 2023

16.우리 정말 한번 잘 지내보자.

한 밤의 드라이브. 

발렌틴이 사실 그 제안을 하게 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물론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한 몫 

했겠지만 난 그때 쯤 렌트비를 올리겠다는 집주인의 통보가 있었다. 물론 En-suite룸(욕실 따로)이란 것, 

그리고 위치가 정말 좋은 건 알겠지만 이미 나한테 한달에 1000파운드를 쓰는건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 가격도 사실 락다운 때문에 영국에 사람이 많이 빠지게 되면서 사람이 없어 가격을 내린 거였고

이제 락다운이 끝나면서 슬슬 영국도 예전처럼 돌아오는 걸 생각해 원래 집 값으로 올려야 되겠다는데, 

나에겐 터무니 없는 가격이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다른 지역에 studio(원룸 같은 구조)로 이사를 가고 말지,

내가 그 돈 내고 여기에 더 붙어있겠다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인 결정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영국의 이사 문제는 정말 골치 아프다. 렌트 값도 비쌀 뿐더러, 이사 날짜,

보증금 등등. 난 그나마 그때 한인 사이트에서 구했어서 그렇게 들어온거지 부동산을 끼고 들어가면 더욱

복잡해지고 정말 이사는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데 또 다시 이사를 할 집을 찾아야 한다니, 머리가 아파왔다.

또 9월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이었고 나는 9월 말에 논문을 제출해야 했다. 물론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논문이 보통 만만한 게 아니기에 신경쓸 것도 많았고, 아르바이트 아니면 논문일정도로 9월달은 바빴는데 

집까지 날 괴롭히다니.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오고 있던 나의 사정을 그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에게 제안을

한거다. 그러나 처음엔 물론 멈칫 했고, 멈칫 해야 했다. 그 누가 듣는다고 해도 거길 제 발로 다시 들어간단 

것 자체는 이해도, 용납도 안되는 것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공간이 주는 이미지라는 건 그때의 나에게

완전히 트라우마로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 집도 집이지만 내가 제 발로 짐을 싸서 나왔던 그 날. 

떠나는 나를 위해 방으로 들어가있는 그의 친구들에게서 느꼈던 부끄러움, 날 배웅한답시고 나왔지만 내가 

우버에 탄 직후 절대 돌아보지 않던 그, 그리고 우버에서 숨죽여 울며 떠나던 때 보이던 그 동네의 풍경들. 

그래서 그 집은 나에게 마치 날 보호하기 위해서 들어가야 하지 말 곳 처럼 여겨졌다. 내가 그 곳에 다시 

간다는 게 내가 바보 꼴 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돼서. 


하지만, 일단 발렌틴 집에 다시 들어가게 되면 내가 얻게 되는 이득이 엄청났던 건 사실이다. 일단, 렌트가

굳을 수 있었는데 발렌틴이 한 3달간은 렌트비를 내도 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또 집을 찾는 그 머리 아픈

과정을 굳이 거칠 필요도 없었으며 나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1달 안에 나가야 했던 나에게 이제 

다시 잘해보기로 한 남자친구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는 게 나에겐 가장 최선의 옵션으로 여겨졌다, 

에전의 그 모욕적인 느낌만 차치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 집에 느끼는 불편한 감정도 역시 시간이 지나니 미화되더라. 그때는 참 시간이 지나는 걸 

기다리는게 그 어떤 것보다 고통스러운데 막상 지나면 시간이 정말 약이네 하고 느끼게 되는,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진리. 

여튼 다시 그 집에 이사를 한다는 의미가 나에겐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이걸 알게 되는 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문제였지. 얼마나 미쳤다고 생각할까가 제일 큰 걱정이었지만 목전에 닥쳐있던 논문을 생각했을때

그 걱정의 부피는 논문에 비할 게 못됐고 몇일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막상 다시 그 집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하니까 맘이 놓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다시 그와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에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헤어진 직후 그와 자주 만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혼자였던 시간이 나에겐 

괴로웠다. 락다운이었던 영향도 컸고, 그와 헤어지면서 자존감의 상실도 어느 정도 있었고. 

혹자는 이별 후 괴로울 수도 있는 '나'의 시간을 영양가 있게 '나'를 위해서 보내는 활동에 투자하면 그것보다 

더 가치있게 날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거라고 했다. 

허나, 다시 말하지만 모르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지만 인지하고 있어도 되지 않는 것일 뿐이지. 

나도 그러고 싶었다. 아예 슬퍼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을 이용해 날 더 아껴주고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왜 나라고 크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처음 겪는 이별이었기 때문이라고 징징대고 싶다. 

연애가 처음이었던 만큼 이별도 처음이었으며 난 그와 한시도 떨어졌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공백은 

나에게 더 크게 다가왔고 그 큰 공백은 나의 허무함을 채워줄 수 없었다.

그런 생각도 가끔 했다. 내가 한국에서 연애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존재는 물론 전화로, 또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서 얼굴 보며 확인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내 곁에 두고 있는 것에서 오는 본질적인 차이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가 설령 날 그렇게

떠났다고 해도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난 훨씬 더 건강하게 그를 잊을 수 있었겠지 싶었다. 내 딸 난 그렇게

바보같이 남자한테 질질 끌려다니라고 한 적 없다며 엄마하게 호되게 혼나며, 그렇게 애정 어린 꾸중과 함께

이별을 잘 겪었을 지도 모르지만 난 아주 유난한 이별을 겪었고 그래서 그 이별은 날 성장시키지 못했다.

그런 이별에서, 또 애들 소꿉장난처럼 매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던 나에겐 독립심이란 게 자라날 

여지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살자고 했을 때 이제 외롭지 않겠구나가 첫번째로 든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설레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난 논문에 매진했고 또 동시에 이사 준비도 슬슬 해야 했다. 

사실 원래 우리가 살던 방은 내가 나간 이후로 플랏메이트 한 명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아랫 방이 

비었고 발렌틴이 그 방을 차지하는 대신 또 발렌틴의 동료 중 한명이 자신의 여자친구와 원래 나와 그가

쓰던 2층을 쓰게 되었는데 마침 그들도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나가기 전에만 잠시 발렌틴의

방에 같이 머무르다가 그들이 나가면 다시 윗 방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물론 그의 방은 혼자 살기에 적당한 크기이긴 했지만 1달 정도만 버티면 된다니까, 그리고 그것보다 더

조그만 방에서 살아봤던 나에게 1달 정도는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있는데 뭐. 전혀, 노 프라블럼. 


고되고 고됐던 논문도 드디어 끝이 나고 이제 정말 졸업만 남았다. 성적 걱정은 접어두고 어쨌든

스트레스 받으며 1년간 매달린 논문도 끝이라니. 그 해방감은 정말 달콤했다. 

그리고 바로 이사 준비를 해야 했어서 난 시간이 날때마다 짐을 꾸렸고 이사를 가기로 한 날. 

발렌틴은 차를 렌트 해서 내 짐을 싣기로 했는데 그 전보다 더 늘어난 살림거리라 이번엔 저번 이사처럼

1번 왔다갔다 할 양은 아니어서 두번 정도는 왕복을 해야 했다. 나와 그의 시간대가 일 끝나고 난 후의

늦은 저녁인지라 집 주인분과 플랏메이트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최대한 조심히 밤에 이사를 가기로 했다. 

그가 그의 집 주변에 있던 차를 렌트 했기 때문에 출발을 그의 집에서 하게 됐는데 저녁이기도 하고

출출해서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에 가서 버거를 픽업했다. 


그 날 밤의 드라이브는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마치 휴게소에서 간식을 사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설렘, 조용한 밤에 차 안에서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 

채 가시지 않은 논문 마무리의 해방감, 다시 재회하게 된 남자친구와 곧 맞이할 것 같은 평온한 일상들, 

또 현실적으로 걱정해야 했을 렌트비 걱정도 잠깐이나마 덜 수 있게 된 상황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 오랜만에

안온한 순간이었다. 큰 걱정거리가 없는 그 순간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도되던지. 

운전하는 것, 차, 오토바이 같은 것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그도 행복해 보여 더 좋았다. 

딱,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그 기분, 분위기가 아련하게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종종 그 날을 

떠올리곤 한다. 또 한번 그렇게 드라이브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면서. 


마지막 짐을 싣고 집으로 향하는 시각이 거의 새벽 2-3시쯤 됐던 것 같다. 난 너무 졸려서 옆에서 꿈뻑꿈뻑

조는, 조수석 자리에 앉아 하면 안될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는 푹-자라고 했다. 자신은 이렇게 조용하게 

운전하면서 차로 달리는 느낌을 느끼는 게 너무 좋다며. 자다 깨다 해서 선명하진 않지만 그 또한 행복한

장면으로 편안하게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드디어 도착한 '그' 집. 이 집에 결국 다시 오게 되었단 게 맞나 싶어 잠시 자조적인 생각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벌어진 일. 

우린 이제 잘 지내기로 했으니까, 그럴거니까. 섣부른 걱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설마 하는 그런 일들도 없을 거였고, 없어야 했다. 

우리 잘 지내보자. 너가 나한테 다시 같이 살자고 했던 그 말도 너도 꽤 깊은 고민 후에 제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너가 그렇게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닐테니. 

나에게도 너에게도 내가 다시 이 집으로 들어온 건 그냥 다시 만나기로 한 것보다 좀 더 의미가 무겁다고

인지하고 있는 걸 거라고 난 믿고 있었다. 


우린 잘 지낼 거였다. 아니,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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