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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21. 2023

17.아무런 이유 없이 무미건조해져버린.

밍밍해져버린 우리 사이. 

라이크 크레이지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난 장거리 연애를 하던 기간에 보게 되었었는데, 그때는 저게 

장거리 연애의 끝도 될수 있구나란 생각에서 그치고 말았던 영화였다. 나에게 그가 퍼붓는 사랑이 너무

확고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말은 우리에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없어야 해! 라는 결심보다는 그런 끝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결심의 필요도 느끼지 않는 그런 것. 

하지만 이제는 안다, 뼈저리게 그 영화는 현실적이었고 그 어떤 것보다 그럼직한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것. 

나와 그의 이야기는 결국엔 영화의 주인공들이 겪었던 시간의 흐름과 비슷하게 흘러갔단 걸 깨닫고선

씁쓸하기도 했고 왜 장거리 연애를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는지도 알았고. 

너무 사랑하면 거리를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사랑에 방해 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고 나도 절대

동의하는 바이다. 각자 진짜 사랑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에게도 누군가를 정말 사랑할 때는 그 무엇도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라는 것의 온도나 농도가 처음처럼 뜨겁고 

진득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필요충분요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요소들이란 각각의

관계들마다 요구되어지는 것이 다르며 그 요소들의 배열 순서도 다양하다는 것도 믿는다. 

그래서 사랑 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 것 같다. 물론 이 연애로 내가 아는게 뭐 그렇게 대단하게 많겠냐만은

적어도 이 연애를 통해 내가 아직도 어느 정도 믿고 있는 '진짜 사랑에는 어떤 변명도 필요 없다' 라는 

나름 그럴듯한 전제가 가끔은 틀리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으므로. 


난 평생 그가 나를 사랑해줄 줄 알았다. 장거리연애도 물론 떨어져있을 땐 슬펐지만 자주 만나지 못해 애틋함을 덤으로 얻은 느낌이라 그것도 좋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그의 사랑에는 함께 같이 한다는 사실과 시간은

충분조건으로서는 우리를 붙들어 주지 못했다. 

우리에겐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장거리연애의 그 공백은 그 공백의 시간을 통해 쌓아왔던 애틋함이나 그리움으로는 리셋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던 방해물이었다는 걸 난 첫번 째 헤어짐 이후 수많은 재회를 겪고 나서 다시금 제대로 마음 잡고

연인으로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난 후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서서히.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우리의 온도는 절대 어떠한 기준점 그 이상을 넘어간적이 없었다. 단지 

서서히 우리의 온도는 내리막길에서 사람들의 발에 채여 굴러 떨어졌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는 돌멩이처럼

그저 그렇게 내려갔다. 각자에게 서로의 존재는 너무 당연한것이어서 우리 관계의 어는점이 점점 낮아지는 걸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그러나 확실히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미건조해져 가고 있었고 이사 하면서 느꼈던

그 설렘도 단지 그 찰나였을 뿐 눈 깜짝할 새 그 감정은 뿌옇게 흐려져 갔다. 


라이크 크레이지라는 영화에서도 (스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스포를 원하지 않으면 이 단락은 읽지 않으시길!)

결국 장거리연애와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함께하게 된 두 남녀주인공은 샤워를 같이 하며 서로의 재회에 잠시 기뻐보이지만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찝찝함이 마음속을 계속 휘젓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엔 다시 너를 만났는데, 정말 그렇게 되고 나니 정작 마음속에 남은 건 그/그녀를 다시 

내 삶 안에 자리잡게 했다는 성취감만 쓸쓸하게 남겨져 있을 뿐 가장 중요한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지 않단 걸 깨닫고 '아차'싶어 하는 그들의 표정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적어도 나는 그 영화의 주인공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헤어지니 어쩌니 하면서도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되고

그가 다시 연락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했던 그 패턴 속에서 어쩌면 난 다른 형태의 쾌락을 취하고 있었던거 아닐까. 연애보다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더 신나고 두근두근 한 것처럼, 헤어졌지만 실질적으로 헤어지지 않았던 우리의 지지부진했던 이별하는 '척'들의 그 일련의 과정들은 나에게 그와 다시 완벽히 재회를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만 가지게 했던 것일뿐, 실질적으로 사랑의 본질에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 

난 단순히 헤어지고 또 다시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짧은 시간의 공백 이후 갖게 되는 재회와 함께 오는 

그 애틋함과 그에서 비롯된 쾌락 비슷한 것에 빠져 있었던거였다. 

나와 그는 재회를 하고 난 후 길을 잃었다. 우린 이제 손을 꼭 잡고 어떤 방향으로 같이 나가야 할지에 대해 

고려해보기는 커녕 우리 관계에 대한 책임의식도 잃은 지 오래였다. 


어쨌건 난 집으로 이사를 왔고, 잠시나마 날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그가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도 잠시 그의 방에서 지내는 걸 떠나서 욕실을 쉐어하는 것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플랏메이트가 위의 방에서 이사를 1달만에 나가겠다고 해서 그걸 믿고 더 이 집에 들어오게 된건데

위에 사는 발렌틴의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는 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 찾는게 어려운 것도 이해를 못하는 바 아니었지만 난 점점 말이 없어지는 이 상황 자체가 불안해졌다. 

또 내가 아무 말 안하고 있으면 이대로 몇 달을 이 상태로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고 난 다시 그를 잡고

따지기 시작했다. 왜 그들이 안나가는 거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건 친구들이 이사를 나가지 않는 게 아니라 못나가는

상황이었기에 그도 친구를 마냥 푸쉬할 수 만은 없었을 테고 그 친구도(만약 정말 열심히 플랏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다는 전제하에) 겨울 철 집을 찾는 게 만만치는 않은 과정일 테니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단게

이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미 친구가 엮여있는 문제에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그라는 걸 잘 아는 나로서는

불안감이 점점 커질 수 밖에 없었고 계속 그를 잡고 그들은 언제 나가는거냐며 따졌다. 


처음엔 쩔쩔매고 미안해하던 그도 어느 포인트에선 포기한 듯 나의 물음에 점점 짜증으로 응수하는 날들이

잦아졌고 무미건조했지만 그런 척 하지 않던 우리 관계의 맨 얼굴은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글펐지만 이젠 나에게도 다시 그와 예전처럼 뭔가를 하고 싶단 생각이 크지 않았으며 그 또한 나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린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관계 개선에 대한 마음이 그나마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나와 그에겐 그럴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우린 그 난리를 쳐가면서 다시 만나자고 동의 하고 같이 살게 된건데, 난 그렇게 친구들에게 별 욕을

다 들어가면서도 재회한 건데, 넌 나한테 무릎까지 꿇다시피 하며 절대로 날 상처주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까지 만난 건데 이제 와서 이렇게 빨리 헤어짐을 결심하고 그 헤어짐을 인정하는 것에 달린건 

'품위'문제였다. 

각자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 싶어 우린 관계를 그냥 방치해버렸던 것 뿐. 


난 그래서 졸업을 기다리며 석사가 끝나고 2년간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Graduate visa를 발급 받기 위해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그 겨울을 보냈다.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잠깐 도피하고 싶었지만 비자 발급 전에는

한국을 나갈 수가 없어서 정말 특별할 것 없이 연말을 보내야만 했다. 

두달이 지나도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도 화가 났고 또 친구들과 시간 보내는 것이 더 즐거워 

보이는 발렌틴에게도 정이 다 떨어져 버렸던 나. 

이제 이 집에서 맘 붙일 곳이 한명도 없었지만, 일만 열심히 하면서 그냥 버텼다. 한국을 갈 수 있을 때까지. 

한국에 잠시라도 갔다오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만큼 이미 내 마음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모든 걸 다 포기 하고 싶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여있었으니 일이 터지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 난 위에 살던 그의 친구 커플과 한번 크게 싸우게 된다. 그것도 서로 때려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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