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부재가 이렇게 무섭다니.
락다운을 이겨내는 것도 힘들었고, 락다운이라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괴로웠으며
그와 헤어지는 과정들도 너무 순탄치 않았던 2021년은 지옥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나 정말 삼재인가?
할 정도로 마음이 성한 날이 없었다. 그리고 이 플랏메이트와의 갈등은 내 최악의 2021년의 방점을 찍어줬다.
영국에서 살면서 별 별 일을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내가 이런 일을 당할줄은 몰랐지.
내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아빠한텐 얼마나 귀한 자식인데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하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란 생각에 미치니까 화가 더 치밀어올랐다. 그리고 그 여자를 더
세게 치지 못한 거에 대해서 너무 억울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분노 끝에 내 감정선이 결국 당도한 곳은
뭔지 모를 무력감이었다. 다 필요없고, 얼른 졸업 확정 돼서 비자를 신청하고 이 영국이란 나라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영국이란 나라에 정이 떨어질 줄 몰랐는데 지금은 이 런던이란 곳 자체에서 빠져나오고
싶단 마음으로 가득했으며 지금의 상황에서 회피할 수 있을만큼 회피하고 싶었다.
파이브가이즈에 드디어 도착해서 완벽하게 굳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니 그 또한 심각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난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고 설명하면 할 수록 더 억울하고 열이
받아서 내 감정과 말투는 격해졌다. 어쨌든 보통 일은 아니었던지라 그는 날 달래줬고, 그도 화를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서도 내가 느꼈던 건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이런 일을 당해서 화가 났단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단 것. 내가 아는 날 정말 사랑했던 '그' 였다면, 그는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그에게서 그 정도의 분노나 속상함은 찾아볼 수 없단 것도 은근 속상했다.
이미 발렌틴과 1층에서 살던 플랏메이트들은 2층의 그 친구 커플들을 벼르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의 이 다툼이 뭔가 도화선이 된 듯 했다. 같이 살던 플랏메이트 중 한명도 파이브가이즈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발렌틴은 그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했고 그 친구도 나에게 미안해했다.
발렌틴과 플랏메이트한테 계속 미안해하는 느낌을 받다 보니 정말 내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된 것 만 같아서 더 속상하고 열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발렌틴은 계속 절대 그냥 못 있겠다며
그 친구에게 집에 가서 얘기 좀 하자고 문자를 보냈다. 아직 그의 shift가 끝나려면 1시간 정도가 비었으므로
난 잠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니 기다리기보단 잠시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와 머리를 비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야외 테이블에 나왔는데, 2층 커플의 남자가 나에게 인스타로 DM을 보냈다. 미안하다면서,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걸 나도 얘랑 한 5년 만났는데 처음 본다고.
사실 얘도 플랏메이트들이랑 지내는 거에 있어서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아마 그게 터진 것 같다고.
우리는 분명히 단체 채팅방에 우리 천장 치는 거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는데 너가 또 쳐서 이건 완전히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했다고.
난 난생 처음 듣는 얘기였다. 단체 채팅방이 있단 건 알았지만 그들이 천장을 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는지
알 리가 만무했던 게 난 그 채팅방에 속해 있지 않았다. 발렌틴이 어쨌건 나랑 같이 살고 있었으니 나도 굳이
날 껴달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그 채팅방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아니 그랬다면 왜 나한테 발렌틴은 그 말을 전하지 않은거지? 그 남자가 DM으로 어떻게 채팅방에 썼는지
캡쳐를 해서 보내준 사진을 보니 그들은 정확히 나를 집어 말하기까지 했다. 2층 커플과는 데면데면했던
사이였으므로 난 단지 그 여자에게 'Asian girl'으로 불렸는데 그 Asian girl보고 천장 치지 말아달라고
이게 우리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 왜 그걸 치는지 모르겠다며 다소 격한 말투였지만 어쨌건 그들은
정확하고 명확하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을 한게 사실이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가 달라지는거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나를 '그 부탁을 듣고도 천장을 치는 또라이' 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건 나라도 당연히 자신들의 부탁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 DM안에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사실 얼마나 이 집에서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설명을 해줬는데 내가 그 상황을 충분히 겪어봤기 때문에 그 여자의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는 당연히
이해가 갔다. 나와 그들의 소통만 있었다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해지자 난 발렌틴에게 더욱 더 화가 났다. 채팅창에 내가 없는 걸 알고 있고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당연히 나에게 말을 전달해줬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겨 나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던 거고 애꿎은 나만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한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나는 당장에라도 발렌틴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아직 일 중이니 잠시
그가 일이 끝나고 정확하게 이 사태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말하자고 결심했다.
한 가지 더, 제일 중요한게 남아있었다. 물론 그들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누구보다 더 잘 할 수 있었다.
얼마나 공용공간을 그들이 거지같이 쓰는 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 여자의 스트레스는 백분 이해 가능
이었지만 그녀가 사용한 폭력은 아예 별개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였다. 폭력은 그 어떤 것에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변명이기 때문에. 이해를 한다고 해서 그녀가 사용한 방식도 용서된다는 건 아니었고 난 그걸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 남자가 계속해서 나한테 메시지를 했기 때문에 난 아주 길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면에선 난 전적으로 너희 편이기도 하다면서. 하지만 때린 건 정말 잘못된 거 아니냐고. 난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실하게 사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정작 원했던 그녀로부터의 사과 문자는 오지 않고 계속 남자는
변명들만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으며 그녀를 방어하기 바빴다.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잘못을 인정하고 나에게 사과하는 게 그때의 날 조금이라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너네 상황이 이랬으니 충분히 이해간다, 하면서 그녀가 선택한
폭력이라는 걸 어물쩍 넘긴다면 난 사실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어떤 큰 대의적인 명분 이런거 다 필요없고 그냥 난 누가 날 때리고 내가 당한 것만 같은 이 기분이 너무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녀의 사과로라도 내 자존심을 보상받아야 했으며 그래서 더 집착했고, 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너 말은 알겠지만 내가 몇 번 말하는데 폭력은 어떤 걸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너의 여자친구가 한번도 그러지 않았는데 지금 그랬단거 나한텐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어쨌건 걔가
지금 그렇게 나를 때린건 이미 벌어졌고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라고. 사실 내 나라도 아니고 외국에서 이렇게
맞은 것 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너의 여자친구가 인정 안하고 계속 너만 나한테 주구장창 연락 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고. 너네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녀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별개로 생각되어져야만
한다, 특히 그녀가 이런 행동을 저질렀을 시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다소 격했지만 제대로 난
내 의사를 정확히 전달했다.
그러자 그녀가 본인등판을 해주시더라. 물론 자기 자존심을 절대 굽히기 싫었나본지 사과 이전에
주저리주저리 아까도 그녀의 남자친구에게서 들었던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지만 미안하다는 사과를
결국엔 하더라. 아직도 자기가 얼마나 화났는지를 과시하는 그녀를 보며 반쪽짜리 사과라고 퇴짜를 놓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무리 밀어붙여봤자 지금 쟤한테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엔 글러먹었단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 대한 분노가 그득한 그 여자한테 더 뭐라고 해봤자
나을 것이 없어보였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에서 욕심을 거둬야했다.
이젠 발렌틴 차례였다. 그는 2층 플랏메이트가 앞에만 있다면 참지 않고 바로 주먹을 그의 얼굴로
메다꽂을 기세였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한 눈빛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이미 그는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단 걸 듣고 자신의 실수가 이 일이 발생한 데에 큰 기여(?)를 했단 걸 알았던 걸 거다.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했지. 처음엔 그냥 내가 안쓰럽나보다, 자기랑 같이 살던 공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그런가보다 했는데 일의 전말을 알고 나니 왜 미안해 하는지 논리적으로 납득이 갔다.
그의 shift가 끝나고 난 그에게 따졌다. 격한 말투는 당연히 지양했지만 충분히 난 너의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고 왜 이걸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냐, 너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내가 당해도 되지 않을 일을 당한 것
같다고. 너의 책임이 있는거 같다며 난 더 심술궃게 그의 잘못을 강조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했고 집에 가면서도 나의 안위를 계속 신경써줬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챙김받는
느낌에 마음이 살짝 따뜻해지기까지 했으니.
이제 난 그와 그의 친구가 제발 주먹다짐으로 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할 만큼 발렌틴은 화가 난 듯 했지만 나름대로 그는 그의 화를 다스리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해서 제발 흥분하지 말고 일단 나 사과도 받았고
걔네 상황도 설명 들었으며 충분히 이해 가는 부분이 없었던 게 아니니까 감정적으로만 흥분해서
달려들지 말라고 몇번을 단단히 그에게 일렀다.
들어가자마자 난 방으로 피신했고 발렌틴은 그 플랏메이트 친구와 함께 바로 거실에서 만나 긴 시간
얘기를 하는 듯 싶었다. 다행히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어찌저찌 해결 한 듯 보였다. 이미 내가
당하기 이전에도 그들의 감정의 골이 깊었던 지라 그들이 다시 예전 사이로 돌아가기는 글러 먹은 듯
보였고 최대한 빨리 그들이 이사 가기로 합의된 것에서 마무리는 지어졌다.
머지않아 그들은 이사를 가게 됐고 드디어 그 방을 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원래 우리의 계획과 다르게
나 혼자 그 방에서 살기로 결론을 내렸다.
나와 발렌틴은 이제 같은 방에서 지내지 말자는 것에, 그렇게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