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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23. 2023

19.쓸데 없이 다정한 너를 거부할 수 없는 나.

병 주고 약 주는 너. 

우린 이미 그 이층 커플과의 싸움이 있기 전부터 우리 관계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일찍이 깨닫는 중이었다. 이사 왔었던 그 날밤의 드라이브 그 날의 행복했었던 기억 이후, 우린 2층 커플의

이사 여부로 계속 다퉜고 이미 우린 다툼이란것에 너무 익숙해져있었으며 다툰 상태에 면역이 되어 있어서

우리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것도 이제 더 이상 걱정되지 않기까지 했다. 안싸웠을 때와 싸웠을 때,

그 날들의 수가 비등비등 해서 싸워도 그만 안 싸워도 그만. 그 정도의 사이였다. 

악플보다 무플이 무섭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말은 고스란히 우리 관계에도 적용되었는데, 우린 이제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도 서로에게 소비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고 그렇게, 정말 어쩌다 보니

우린 다시 한번 이별을 얘기하고 있었다. 9월달 쯤, 정말 잘해보자고 했던 우리의 약속이 이렇게 쉽게 

어그러지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으며 단순히 난 이 관계, 영국생활 모든 것에 지쳐 있었다.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연인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헤어지자고 그렇게 우린 관계를 종결했다. 

하지만 중요했던 건 내가 이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걔도 양심이 있던지라 절대 첫번째 이별 이후

싸울 때 나가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고 나 또한 나갈 생각이 없었다. 다시 나간다고 하면 난 정말로 

등신이란 걸 자체증명하는 꼴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낸 자구책이 그 2층 커플이 나가고 나서 그 

큰 방을 내가 차지하기로 했다. 내 계획에 약간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건 그와 같이 이사를 갔더라면 

렌트비가 반으로 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통으로 다 내야 했다. 그건 그거대로 굉장히 억울했지만 

그 시기에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옵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2월이 다가오는 겨울이었고,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영국의 겨울에 집 찾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이사를 나가고 난 2층 방에서 지내게 됐다. 그래도 억울했던 내 상황을 감안해 주어 내 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렌트비는 똑같이 4등분 해서 내게는 해주는 나름의 배려는 해주더라. 

여튼 우린 헤어졌지만 같은 집에서는 사는 이상한 동거(?) 비슷한 걸 했다. 물론 사는 방 자체가 다르기도 

하고 그와 나 서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맘 먹고 만나자고 하지 않으면 만나는 경우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헤어진 사이 치고는 계속 볼 수 있었던 그런 묘한 상황에 놓였다. 

그게 문제였다, 아마도. 남자친구는 아니었지만 난 그에게서 계속 남자친구 역할을 원하고 있었다. 

대놓고 부탁하진 않지만 눈에 보이는 내 소위 '전' 남자친구에게 의존하고 싶고 부탁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었다. 웃겼던 건 걔도 나의 부탁을 곧이 곧대로 잘 들어줬단 것. 


연인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다해야 할 책임감은 피하고 싶지만 그 속에서 느낄수 있는 편안함과 행복은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던 우리의 말도 안되는 그 욕심이 남들이 보기엔 아주 이상한 관계 안에 우리를

묶어놨고 적어도 난 이런 식으로 관계를 유지 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래서 내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또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환경 이라는 이유 뒤로 숨어 내가 그와 유지하고 있는 이 사이를

멋대로 합리화 시켜버리곤 했다. 가끔씩 내 영국생활을 업데이트 받던 친구들이 이 얘기를 듣고 황당해하면서

욕이라도 할라 치면 황급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댔다. 이젠 더 이상 이사를 나가기 싫고 나 어차피 

안 나갈거라고 했다고. 그리고 생각보다 막 만나서 뭘 하는게 아니고 가끔씩 놀기도 하고 그러는 거라고. 

배려심 많은 내 친구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가 스트레스 받을 걸 알기 때문에 애써 할 말을 

삼키는 듯 했다. 


하지만 발렌틴 걔가 정말 못됐던 건 이 관계성을 이용했단 것에 있는데, 난 적어도 내 기분에 따라 

이 관계의 맹점을 방패삼은 적은 없다. 다시 말해, 걔는 자기가 그럴 기분이 안나면 '난 너 남자친구가 

아닌데 왜 이런 것까지 요구해?' 라는 이유를 들고 왔다. 아마 내가 이 관계에 의존성이 더 컸음을 방증하는 

것일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난 내가 불리할 때 난 너의 연인이 아닌데 왜 이래야 하냐 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걔의 처사가 어이없고 비겁해서 화딱지가 여러번 났던 적도 있다. 더 화가 났던 건 그 말에 

딱히 대응할 수 있는 꺼리가 없다는 게 억울하고 짜증이 났다는 거다. 물론 나만큼 발렌틴은 뭐 하자- 라고 

제안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런 말을 할 경우가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던 걸 수도 있긴 하다. 나 또한 

그가 내가 원하지 않는 부탁을 했을 때 그 관계성을 이용하지 않았을 거란 장담은 할 수 없다, 아니

장담 할 수 있다 분명 그 관계성을 이용했을 거라고. 


어쨌든 그런 그에 상처 받아 한동안 말을 아예 붙이지 않다가도 잠시 우리가 가진 그 시간의 공백 이후에

웃기게도 그는 다시 다정하게 다가왔으며 그 외로운 겨울 날 결국에 내가 기댈 곳은 그밖에 없단 걸 매번

깨달았던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그와 가끔씩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또 우리 사이가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진다 싶으면 또 한번 비겁한 변명을 가지고 와 내 입을 다물게 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내 거리를 벌리는.

그런 패턴들이 2021년 나의 겨울을 장악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던 건 

그랑 놀 때가 제일 재밌었다. 그랑 있을 때가 제일 편했다. 그랑 놀 때가 제일 나 다웠다. 

오롯이 나로 있을 수 있어서, 그와 있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꼈다. 난 그걸 포기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렇지만 우리가 헤어졌단 건 분명했고 그 말은 즉, 그가 다른 사람을 찾아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전제가

우리 관계의 기저에는 이미 깔려 있다는 것이었다. 날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발견은

우연을 가장해 필연처럼 나에게 다가왔는데, 

잠시 내 핸드폰이 고장나서 발렌틴이 하나 엑스트라로 가지고 있던 폰을 임시로 내가 쓸 수 있게 됐었고 

그 동안 내 SNS 계정을 그의 핸드폰에 연동시켜놨던 지라 난 그의 계정에도 접속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내가 아예 그 쪽으로 눈 돌리지 않았으면 알 지 않아도 될 것이었지만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에게 오는

DM들이 날 계속 유혹했다. 

그리고 뭐에 홀린 것처럼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징-하고 울리는 DM이 그의 계정으로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동안 참아왔던 그 인내심은 순식간에 사라진 채 DM을 확인하는 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새 메시지는 보지 않았지만 누구와 연락을 했는지 보는데 조금 내려가 보니 한 여자와 대화를 했던 걸 알 수 

있었고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플러팅' 이었다. 


그걸 보는데 어찌나 마음이 쿵 하고 가라앉던지. 이젠 그가 그렇게 하는게 우리 사이에선 지금 걔가 

충분히 그래도 되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것 만 같았다. 

더 비참했던 건 매번 내가 놀자고 해야 만나'줬'던 그가 그 여자에겐 먼저 만나자고 제안하는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분노도 따지고 보면 오롯이 내 몫이었다.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그와의 만남을 요구했던 건 사실이고 그 후에 따르게 될 맘고생은 다 너가 감당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은 이미 익히 들어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머리론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론 어찌 할 수

없는게 사람 마음이듯이, 내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내 마음이 이런 비참함을 느낄 때까지

끌고 온건 사실인 걸 아는데도 걔가 너무 미웠고 또 한편으로 조급해지기까지했다. 

쟤는 이제 점점 나아가려고 하는구나 하는 그런 불필요한 조급함. 

마침 말할 것이 있어 잠시 방으로 올라온 그에게 말 할 수 없었지만 내 행동은 온몸으로 티를 내고 있었다. 

너 너무 재수없고 짜증난다고. 걘 아마 황당했을 거다. 아침 댓바람부터 내가 틱틱대니까. 


차라리 아예 날 먼저 끊어내주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걘 쓸데없이 다정했다. 

졸업비자를 발급받아야 했지만 온라인으로 발급하는 게 어려워져서 직접 비자센터를 가야 했던 나는

꽤 긴장했고 뭔가를 해결해야 했었기 때문에 뭔가 잘못될까봐 원래 걱정이란게 많은 나는 이미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는데 발렌틴은 일이 끝나자마자 내가 있는 곳까지 한 달음에 달려와 내 옆에 가만히 

있어주곤 했다. 이런 다정함때문에 그래도 어쩌면, 하며 이미 끝나버린 우리 관계에서 

난 '혹시'를 찾으려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린 2022년 새해도 같이 맞이했다. 쓸데없는 다정함은 또 발동돼서 12월 31일날 일해야 했던

나를 발렌틴은 차를 렌트해 픽업해주러 내가 일하는 곳까지 와줬다. 집이 꽤나 센트럴에서 멀게 위치해 

있었고 12월 31일엔 대중교통이 너무 빨리 끝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그는 또 다시 친절을 베풀었고 우린

우리가 살던 곳 쯤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도 같이 봤다. 참 웃기게도, 사이가 달라진 그때 그 순간에도 

너와 난 불꽃놀이를 또 한번 같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발렌틴은 집으로 걸어가며 나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아마 이 집 계약 곧 만료될거야. 다 이사 나가려고. 적어도 3월 전에는 그냥 다 뿔뿔이 흩어지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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