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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May 06. 2024

이 글을 아내가 싫어합니다

음식점에 들어가는 손님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앞치마를 달라고 하는 사람과 앞치마가 필요 없다는 사람. 이 두 부류는 또 두 부류로 나뉜다. 앞치마를 달라고 해서 착용한 뒤, 앞치마를 하지 않은 곳에 음식물을 튀기고 마는 사람과 앞치마를 하지 않고도 음식물을 튀기지 않고 먹는 사람.


아내와 나는 음식물을 튀기는가 아닌가로만 보았을 때, 정반대 부류에 속한 사람이다. 아내는 앞치마를 달라고 해서 꼭 착용하는 타입이지만, 꼭 식사를 마친 후에 보면 앞치마를 하지 않은 곳에 음식물을 묻히는 사람이다. 나는 뭘 더 두르거나 하는 게 귀찮아 왠만하면 앞치마를 두르지 않지만 좀처럼 음식물을 묻히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흔히 일처리가 빠르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을 ‘손이 재다’고 표현한다. 아내를 ‘손이 잰가 아닌가’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내는 손이 재다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손이 잰 사람이다. 뭘 해도 딱딱 각을 맞춰 놓아야 하고, 한 번 쓰고 난 건 꼭 제자리에 가져다 두어야 속이 시원하다. 책장에서 책을 뽑아 읽고 난 뒤에도 항상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꽂아 두어야 하는 사람이다. 책장 어딘가에 다시 꽂는 것이 아니라 뽑았던 곳 그대로 꽂아 두어야 한다. 책상을 사용하고 나서 정리할 때는 처음에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정리해 두어야 하는 사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회사 사무실 책상도 퇴근할 때는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다 치우고 가는 편이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서재 방에 있는 기다란 공용 책상에 물건을 펼쳐 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과서, 아내가 읽고 있는 소설책, 일기장, 육아책 이런 것들이 지금도 내가 글을 쓰는 책상에 무심히 놓여 있다. 그 옆에는 아내의 필통이 열린 채 놓여 있고, 노트북과 노트북 가방은 넓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세상에 꼼꼼이와 덜렁이만 있다고 한다면, 아내는 아마 덜렁이 쪽에 속할 것이다. 카페에서 음료를 받아 올 때도 쏟는 일이 얼마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음료를 먹다가 바닥에 쏟기도 하고, 입도 안 댄 음료를 엎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평생 꼼꼼이로 살아온 나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아내와 함께 겪고 있다.


우리 집 식탁에는 아내가 읽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권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E-Book 리더기가 놓여 있다. 아내는 한 번은 종이 책을 집어 들었다가, E-book 리더기를 집어 들었다가 번갈아 가며 책을 읽는다. 거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도, 침실에 들고 가서 읽기도 한다. 독서를 마치는 그곳에 늘 책이나 리더기를 둔다. 물건들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살펴보면 아내가 마지막으로 어디에 머물렀는지 알 수 있다. 


실내화는 때로는 화장실 앞에 놓여있기도 하고, 식탁 아래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가끔은 주방에 놓여있기도 하고, 침대 밑에 놓여 있을 때도 있다. 뭘 하다가 실내화를 벗은 뒤 깜빡하고 신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직장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집은 온통 아내의 흔적이 가득한 곳이 되어 있다. 나는 왜인지 아내의 이런 흔적들이 정답다. 


늘 제자리에, 정리정돈을 강박처럼 해 왔다. 늘 뭔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명확해서 이상을 늘 마음속에 품고 다녔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정리 정돈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옳은 것이므로 지켜야 한다는 식이다. 아내와 함께 지내면서 꼭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 눈에 보기 편한 대로의 기준을 모두에게 옳은 것이라는 굴레에 집어넣고 강요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가 흩어놓은 물건들을 제자리에 부지런히 가져다 놓았다. 침실에 한 권, 식탁 위에 한 권, 책상에 여러 권 놓여있는 책들은 다시 제자리에 꽂아 두고, 실내화는 가지런히 포개서 현관 앞에 가져다 두었다. 노트북은 늘 가방에 넣어 고이 넣어두었다. 식탁 아래 깔린 카펫이 지저분하면 청소를 했다. 정중앙에 제대로 걸리지 않은 옷들을 다시 꺼내서 옷걸이에 제대로 걸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사실을 모를뿐더러 다시 물건이 밖으로 나오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물건이 주로 쓰이는 곳에 물건을 두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열린 채 놓아둔 아내의 필통을 보면서, 아내가 읽다가 곳곳에 둔 책을 보면서도 나는 왠지 흐뭇한 기분이 된다. 정리를 도통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더라. 아내 나름의 기준이 있고 질서가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흔히 말하는 ‘꼼꼼함’이라는 기준에 비춰 아내를 본다면 아내는 ‘꼼꼼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요리를 할 때 입었던 앞치마를 거실에 널부러 놓기도 하고, 빨래만 하면 양말이 한 쪽씩 없어지는 걸 꼼꼼하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덜렁대는 아내가 좋다.


아내는 이제 음식점에 가도 앞치마를 찾지 않는다. 내가 권하면 앞치마를 두르기는 하여도, 어김없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앞치마가 없는 부분에 음식물이 묻어 있다. 이제 함께 식당에 가도 나도 앞치마를 잘 권하지 않는다. 처음에 음식을 묻혔을 때는 어쩌나 싶었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도 사랑스럽다.


옷걸이에 옷을 제대로 못 걸어서 늘 아내 옷은 한쪽으로 치우쳐 걸려 있다. 양 팔이 가지런히 대칭을 이루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위태롭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퇴근 후 겉옷을 옷장에 넣으려다 아내가 걸어놓은 옷을 보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거실에 마련해 놓은 안락의자 앞에 벗어둔 아내의 실내화를 보면 아내가 낮에 여기 앉아 있다가 갔구나 싶다. 머리맡에 놓아둔 책 한 권, 충전 중인 E-book 리더기 같은 것들이 이곳저곳에 있는 걸 보면서 아내의 하루를 떠올리곤 한다. 


이상한 점은, 좀 더 꼼꼼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오히려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내는 옷을 이상하게 걸고, 물건을 이곳저곳에 놓아두기는 하여도 필요할 때 뭐가 없어서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오히려 물건이 놓인 위치를 잘 알 텐데, 이것도 미스테리한 부분이다.


나의 ‘꼼꼼함’이라 생각했던 부분은 실제로 이곳저곳에 많은 신경을 쓴다는 의미는 아닐까. ‘주의력’이라고 불리는 것은 늘 제한되어 있기에, 나처럼 이것저것 다 신경 쓰고 사는 사람은 뭔가 잊어버릴 확률도 그만큼 높은 것이다. 아내는 가끔 음식을 묻히거나 커피를 쏟기는 해도, 허둥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나는 어디에 뭘 뒀는지, 뭘 하기로 했는지 생각이 안 나 허둥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나,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씩 무던하게 해 나가는 아내가 만나 한 가족을 이루었다. 나는 아내의 무던함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안에서 나를 찾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나도 아내처럼 되고, 아내도 나처럼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꼼꼼함이나 덜렁댐이나 그런 게 별로 중요치 않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속에서 서로를 발견했고, 각자 속에 상대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나는 아내가 되어 가고, 아내도 내가 되어 간다. 사랑 속에는 상대를 위해 마음의 공간을 낸다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독립된 인격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안에서 ‘우리’로 빚어져 간다. 


꼼꼼이와 덜렁이,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나도 이제는 좀 덜 신경 쓰고 집중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내가 다 알 수 없다. 나는 남의 시간을 모두 살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몫은 딱 나 하나의 인생을 살아내는 것 정도일 테다. 여태껏 많은 걱정을 끌어안고, 지나치게 이것저것 고민하며 살아왔다. 꼼꼼하다는 말로 치장했지만 실은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아내를 만나 함께 빚어져 간다. 바라기는 서로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내가 이 글을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싫어할 것이다. 한바탕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 


거실 의자에 앉아 E-book 리더기로 책을 읽던 아내는 어느새 침실에 들어가 누웠다. 서재에서 멀찍이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줄은 아내는 꿈에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피식 웃는다. 쓰면서도 웃기다. 주전자 끓는 소리를 내며 웃었더니 아내는 묻는다. 


“왜 웃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덜렁대는 너를 글로 써내느라 그랬다고 할 것인지, 너가 사랑스러워 그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즐거운 오후 한 때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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