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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Jul 06. 2024

포르○ 이야기

글쓰기 이야기

내가 타고 다니는 차 이름은 ‘두부’이다. 차 이름을 누가 두부라고 짓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나의 아내가 되겠다. 8년 전쯤, 아내가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차가 필요할 것 같다며 지인의 지인을 통해 차를 구매했다. 8년 전에 누가 새 차를 구매해서 타던 것을, 아내가 구매했고, 지금은 그 후로 8년이 지났다.


‘두부’는 흰색이다. 원래는 검은색이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흰색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전 주인이 어떤 이유로 흰색으로 도색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위에서 본 부분만 검은색이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흰색이다. 살 때부터 머리 부분을 빼고 온통 흰색이어서, 아내는 차 이름을 ‘두부’라고 지었다.


“차 이름이 두부가 뭐야, 어디 부딪히면 다 찌그러질 거 같은데.”


나는 닫혀있는 사람이다. ‘두부’는 쉽게 으깨어질 것 같으니 차 이름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매우 전통적인 의견을 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 이름이 두부인 것과 어디 교통사고가 나서 찌그러지는 문제는 완전 별개의 문제인데 말이다. 두부라고 짓는다고 해서 덜 찌그러질게 더 찌그러지거나, 안 날 사고가 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글을 쓰면서 모든 것에 대해 ‘그럴 수 있어.’ 열려있는 자세를 배우려 애쓰고 있는데, 돌이켜 보면 아내는 그때부터 이미 열린 사람이었고, 나는 세상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틀 속에 견고한 성을 짓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충분히, ‘차 이름이 두부일 수도 있지.’ 한다.


두부는 내가 26살 때 처음 아내에게 왔다. 아내가 한 6년 열심히 타다가, 결혼을 하면서 배에 실어서 제주로 데려왔다. 요즘은 내가 출퇴근 용으로 두부를 애용하고 있다. 두부에겐 두 군 데 흠집이 있다. 둘 다 제주에 데려오고 나서 생긴 흠집이다. 물론 두 건 모두 아내가 낸 상처이다. 다행히 다른 차와 부딪히거나 뭔가를 파손한 건 아니다. 다만 우리 두부만 찌그러졌을 뿐.


나는 기둥 사이에 주차 공간이 있으면 최대한 기둥에 붙여 세우는 편이다. 주먹 하나쯤 들어갈 정도만 남기고 기둥 쪽으로 바짝 붙인다. 이렇게 하면 내릴 때도 편하고, 조수석에 탄 사람도 편히 내릴 수 있어서 주차할 일이 있으면 꼭 그렇게 한다. 아내가 차를 긁는 상황은 늘 기둥과 관련해서 발생했다. 기둥 쪽에 바짝 붙어 있는 차를 빼다가 핸들을 너무 일찍 꺾으면 차가 기둥에 쓸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두 번, 애꿎은 기둥은 흰색 페인트를 잔뜩 묻히게 되었고, 두부는 영광의 상처를 양쪽 문짝 부분에 얻게 되었다. 최근 비가 내리면서 칠이 벗겨진 부분을 집중 공략한 탓에, 녹이 좀 스는 것 같아 흰색 락카를 사다가 임시방편으로 땜질을 해 두었다.


‘두부야 미안해, 새 옷을 사 줄 수가 없구나.’


두부는 자차 보험도 없다. 전체 다 도색을 하자니 배보다 배꼽이 클 것 같아서, 보기에는 좀 벗겨진 모습이 안타깝긴 해도 그냥 타고 다니기로 했다. 비가 와서 녹이 번져가는 모습을 보며 가끔 아내를 놀린다.


“자기 때문에 두부가 아픈 거야.”


아내는 응수한다.


“기둥에 그렇게 붙여서 대니까 그렇지.”


크게 한바탕 웃는다. 뭐, 차도 찌그러졌고 페인트도 벗겨졌고 녹도 좀 슬긴 했지만, 재밌으니까. 차 찌그러진 거야 타고 다니는 데 문제없으면 됐고, 다친 사람 없으니 됐고, 임시로 락카로 칠해놓으면 되니까. 어쨌거나 덕분에 한바탕 웃을 수 있으니 오히려 이득이다.


이십 대 중반 무렵 우리에게 온 두부는 지금까지 8년간 우리 부부의 발이 되어 주었다. 두부와 함께 전국 팔도 안 간 곳이 없다. 아내와 나의 추억의 절반쯤은 두부와 함께다. 쓰다 보니 나도 두부를 다치게 한 일이 생각난다. 두부에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컵 홀더가 있고, 그 뒤쪽으로 조그마한 함 같은 게 있어서, 잡동사니를 보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마 대부분 차가 가지고 있는 그런 수납공간일 것이다. 결혼하기 한참 전인데, 수납함 뚜껑이 위로 젖혀져 열려 있었다. 뚜껑이 최대로 열리면 정확히 수직이 된다. 그게 다 열린 건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뚜껑을 뒷좌석 쪽으로 더 젖혔다. 그 결과로 수납함 뚜껑이 날아갔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는 쿨했다.


“괜찮아.”


이쯤 쓰고 보니 양쪽 긁어먹은 아내를 놀린 내가 좀 치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그래도 수납함 뚜껑 부셔먹은 거랑 양쪽 문짝을 찌그러트린 거랑은 다르지, 암.


크고 작은 파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8년간 안전하게 잘 탔다. 큰 사고 단 한 번도 없이 필요할 때마다 나와 아내의 발이 되어 주었다. 20대 중반의 나와 아내는 차를 타고 다니며 우리의 세상을 더 넓혔고, 함께 같은 곳을 가고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 안에서 나누었던 우리의 대화와 함께 보낸 시간이 지금 우리를 만드는 데 꽤 많은 기여를 했다.


벌써 두부를 산 지 8년이나 되었다. 첫 주인이 새 차를 주문한 게 그보다도 8년 전이니, 두부가 완성된 지는 16년째가 되었다. 지금 두부는 나를 매일 회사로 데려다주는 발 역할을 하고, 주말이면 나와 아내를 제주 곳곳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 이제는 곧 둘이 아닌 셋을 태우고 다니게 될 것 같다. 아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호꼼이 까지 두부 덕을 좀 보게 될 것 같다.


근래 두부가 잔고장이 많다. 지난달에는 수리비가 60만 원이나 나왔다. 차량 가액의 몇십 퍼센트나 되는 금액을 자꾸 수리비로 써야 하는 건 아닐까 살짝 우려가 되기는 한다. 최근엔 아내와 제주 남쪽 바다로 휴가를 다녀왔는데, 갑자기 차에 시동이 안 걸렸다. 배터리 문제인가 싶어 카센터를 가 보아도 별 문제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뭐 다른 문제일 수는 있다고 하던데, 당장 바꾸기에는 금액이 많이 나올 것 같았는지 정비소 사장님은 “일단 타는 데까지 타 보세요.”라고 했다. 타는 데까지 타라니, 고장이 났으면 고치는 거고, 아니면 말 것인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하다. 아예 망가질 때까지 타고 수리를 하든지, 아니면 거기까지만 타고 차를 바꾸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


다행히 그 후로 2주 정도는 멀쩡하다. 두부가 조금만 더 힘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앞서 얘기했듯, 두부는 양쪽이 찌그러져 있다. 살짝 녹슨 곳을 락카를 뿌려놔서 아주 멀리서 힐끗 보면 몰라도, 조금만 자세히 보면 녹슨 것이 아주 잘 보이고 곳곳이 찌그러져 있다. 만약 차 외관만 본다면 매우 험하게 사는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다. 오래된 차, 험한 회관, 게다가 머리만 검은색인 두부를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두부의 차종은 기아 포르테이다. 최근에 왕복 2차선 도로를 다니고 있는데, 큰 덤프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요리조리 차선을 변경해 가며 질주해 오는 게 옆쪽 거울로 보였다. 내 옆쪽 차선에 차가 있어서 그랬는지, 옆 차선보다 속도가 조금 더 빠른 내 뒤에 아주 바짝 붙어서 따라왔다. 트럭을 보내주려고 가속을 해서 옆 차선으로 비켜주었다.


“운전을 뭐 저렇게 하냐.”


혀를 쯧쯧 차면서, 자리를 비켜주고 트럭을 쳐다보는데 재밌는 상황이 벌어졌다. 포르테를 추월한 트럭 앞에는, 흰색 포르셰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흥미가 생겼다. 저렇게 급해 보이는 트럭이 과연 포르셰 뒤에도 바짝 붙을 것인가? 정말 급하다면 포르셰 뒤에도 바짝 붙어서 차선을 옮기며 추월해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


트럭은 안전거리를 50M쯤 유지하며 멀찍이 떨어져서 차를 몰았다. 왜인지 웃음이 났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난폭운전 급으로 차선을 바꿔 가며 급히 다니더니, 비싼 차 뒤에서는 좀 정신을 차렸나 보다. ‘아니 그럼 뭐 포르테는 부딪혀도 되고, 포르셰는 안되나?’


트럭 기사가 갑자기 심신의 안정을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포르테는 되고 포르셰는 안 되는 거면 좀 슬프니까 말이다.


두부는 오늘도 열일 중이다. 주말을 맞아 아내와 나를 카페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검정 머리로 뜨거운 햇살을 다 받아 가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쏴 주기도 한다. ‘타는 데 까지.’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함께 하게 될 것 같다.


일상이라고 부르는 내 삶 속에는 소중한 것들이 참 많이 있다. 매일 숨 쉬듯 밥 먹듯 만나고 만지고 보는 것들이어서 종종 ‘일상’이라는 상자에 욱여넣고는 잘 꺼내보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매일의 삶 속에 있는 일상을 소중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기 위해 글을 쓴다. 나의 일상 상자에는 매일의 소중함들이 들어 있다.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을 기록하는 만년필, 아내가 해주는 밥상, 이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신식 핸드폰, 창 너머로 들려오는 정다운 새들의 지저귐 같은 것들 말이다.


검열관 녀석은 때로 이렇게 말한다.


‘그게 뭐 대단한 글감이나 되겠어?’


대단한 것, 특별한 경험만이 글감이 될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일상의 풍경들은 하나둘씩 흑백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매일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며, 매일의 삶의 요소들을 채색하고 있는 중이다. 일상이 소중하지 않다면, 일상이란 그저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일 뿐이라면, 특별한 경험만이 글로 써낼 가치가 있다면,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처럼 ‘우리는 당장 원자폭탄에 의해 전멸당해도’ 싼 것이다. 나는 나의 일상 속에 있는 매일의 것들을 사랑한다. 지극히 평범한 내 삶의 모든 부분을 긍정하는 것,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글쓰기의 목적이다.


당신의 삶에 일어나는 매일의 것들, 너무 자주 일어나거나 반복되어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한번 꺼내 보라. 이들을 한 군데 모아 놓고, 하나씩 이름을 불러 가며 글을 써 보라. 매일매일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듯한 하루가 어느새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소중한 것을 재발견 할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펜을 들고 써 보자. 나의 하루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을 노트 속에 불러와 보자. 지금부터 일상은 반짝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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