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그만큼 마시면 안돼요
서울 출신이 아닌 문과생에게 일자리란 대부분 서울에 몰려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서울로 가나 제주도로 가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으므로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은 육로로 가면 더 오래 걸리지만 제주는 항공으로 가니 오히려 더 가깝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다. 대학생 때부터 자취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제주에서 자취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익숙한 듯 혼자 지낼 원룸을 알아보고, 출근 준비를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회사가 있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첫 직장으로 제주에 살게 된 29살 청년이었던 나는 꽤나 의욕적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계약직이었지만 잘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었기에, ‘취직해서 잘 살았습니다.’로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다. 나의 첫 번째 임무는 시계 매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관광객이 고가 시계를 재래시장 나물 쇼핑하듯 사가던 때였으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속도였다. 손님 대부분이 외국인이어서 소통에도 문제가 없어야 했다.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브랜드의 역사나 디자인의 특징 같은 것도 설명할 수 있어야 했고, 사진으로 보아도 같은 물건이 무엇인지 금세 찾을 수 있어야 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매장을 한번 싹 정리하고 그날 환율을 확인한다. 손님이 자주 찾으시는 상품이 각 나라 화폐로 얼마쯤 되는지 머리에 집어넣는다.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면 동시에 여러 명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계산 실수가 없도록 치밀해야 했다. 현금으로 몇백만 원씩 가지고 오는 손님이 가끔 끼어 있었고, 수상하게 생긴 수표도 진위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관세법에 대해서도 숙지하고 있어야 했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교환을 원하는 손님도 상대해야 했다.
처음 몇 달은 정말 정신없이 흘러갔다. 퇴근하고 홀로 빈 집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잔 적도 많다. 저녁을 먹고 상품 카탈로그를 펴 생김새를 익히고 언어별로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하는지 숙지했다. 손님이 했던 말 중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있으면 메모해 두었다가 따로 공부했다. 정규직 사원이 되어야 했다.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누가 부르면 나갔다. 거래처를 만난다느니, 손님을 만난다느니 구실도 많았지만 대체로 집이 싫은 가짜 워커홀릭 아저씨들의 요청이 많았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소모적인 시간이 싫었지만 혹시나 인사상 불이익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내 시간을 내주었다. 연고도 없이 혼자 있는 내게 별달리 거절할 핑곗거리도 마땅치 않기도 했다. 바쁠 땐 점심도 걸러가며 일했다. 사람이 몰려드니 한가로이 점심식사를 하러 떠날 수는 없었다. 물론 이는 계약직 사원에게만 해당됐다. 오래 일해온 사람들은 우리에게 의무를 떠넘겼고, 우리는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알아서 눈치를 보며 생활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영혼까지 내어 줄 필요는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운 부분이다.
일은 금세 적응되었다. 어느새 익숙해졌다. 나를 찾는 손님도 생겼고, 고마움의 표시로 간식을 사다 주는 사람도 생겼다. 판매 상품도 눈에 익었고, 이제는 더 익숙하게 일했다. 다만 끝 모르는 회식자리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느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마셨다. 적당히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시간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만 바뀌고 늘 패턴은 같았다. 고주망태가 되어 유흥주점을 찾는 일을 보는 게 점점 지쳐 갔다.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사람, 죽도록 마시고 또 유흥주점에 가는 사람들을 억지로 달래서 택시에 태워 보내곤 했다. 소위 말해서 ‘현타’가 자주 왔지만 견뎌야 했다. 일 하려고 제주까지 왔고,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어야 했으니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다른 사람한테 맞춰준 대가로, 내 인격까지 헐값에 팔아치운 대가로, 정규직이 되었다. ‘아, 이제는 됐다.’라고 생각했다. ‘기한의 정함이 없이’ 고용되었으니 이제 정말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만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는 코로나 19로 인한 업황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실적이 좋을 때는 계약직 사원 모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 준다고 하였지만, 코로나 여파로 주춤하자 그중 절반은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정규직 전환이 된 나를 포함한 몇몇은 구두로만 약속을 받은 채 무기한으로 회사를 쉬어야 했다. 회사의 입장은 당장 업계가 어려우니 정규직 계약서는 다음에 쓰자고 했다. 문서로 약속해 달라고 했더니 구두 약속밖에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지만, 나는 출근할 수 없었다. 재계약 서류는 구경도 못한 채, 제주를 떠나야 했다. ‘언젠가’ 업황이 좋아지면 당신들을 부르겠다는 일방적인 약속만 믿고 기다려야 했다.
매출 실적이 좋을 때는 계약직 사원이라 과실을 덜 나누어 주었으면서, 어려움이 닥치자 제일 먼저 희생을 요구하는 모양이 아이러니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또 기약 없는 실직자가 되어 씁쓸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회사를 떠나고 싶었지만, 코로나 한파는 매서웠다. 다른 곳도 상황은 비슷했고, 또 한편으로 구두약속이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점이 나를 더 안심하게 만들었다. 또 구직활동을 하는 일이 엄두가 안 나기도 했고, 그냥 기다리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마음도 좀 있었다.
기약 없이 11개월이 흘렀고, 회사는 재계약을 통보해 왔다. 긴 기다림을 끝내고 다시 짐을 싸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개인 손님에게 시계를 판매하던 나는 거래처를 상대로 하는 영업부서로 배치되었다. 업무는 단순했다. 회사는 유통업을 영위하고 있었으므로 물건의 품질은 모두 같았다. 우리 부서의 임무는 회사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 물건을 원하는 곳은 많았고, 판매가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거래 가격이 적정한지, 현지 가격이나 경쟁사는 어떤지 알고 있어야 했다. 자연히 여러 무리의 사람들과 만남이 잦았고, 역시나 모든 만남의 매개는 술이었다. 우리로부터 물건을 사야 하는 사람은 이런저런 구실로 만남을 청했다. 몇 년 먼저 들어온 사수는 업무 권한을 쥐고는 내게 나눠 주지 않으려 했다. 다만 이런 자리 저런 자리마다 나와 같이 다니기를 원했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선심 쓰듯 당신들에게 물건을 팔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오곤 했다. 거래처에서도 내게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밤이 무르익으면 사수와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모든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 숫자 데이터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정에 치우쳤다. 정의 농도는 술의 도수와 비례해서, 진한 농도의 술을 같이 나눠 먹은 거래처에게 물건이 돌아갔다. 회사의 이익보다는 농도 진한 술을 한 잔 얻어먹는 게 담당자의 최우선 과제로 보였다. 현지 시장가격 조사를 하거나 경쟁사 가격에 대해서 알아보던 나는 회의를 느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남이가’로 진행할 거면 담당자가 왜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었다.
아무 권한이 없으니 노력을 할 수가 없었다. 자리 나 채우는 들러리가 된 것만 같았다. 술자리를 다니며 험한 꼴을 자꾸 봐야 하는 게 마음이 상했다. 업무가 바뀌면서 늘어난 술자리에 더해, 기존의 회식도 줄지를 않았다. 일을 하는 건지 술상무가 된 건지 헷갈렸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싫긴 했지만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 생각하고 버텼다. 정기 인사철이 되자 부서장은 내가 막내라는 이유로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게 기분이 나빴다. 잘하면 잘한 거고, 못하면 못한 건데, 미안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농도 진한 술을 잘 마시는 선임을 좀 챙겨줘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부서장은 유흥주점에 자주 다니던 그 선임에게 좋은 고과 점수를 주었다. 내가 열심히 해도, 순서를 뒤집을 수는 없다는 말로 들렸다. 작은 회의는 점점 커져갔고, 직장을 갖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건가 싶었다. 권한도 없고 책임도 없는 나날이 반복되며 회의를 키우던 무렵,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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