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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나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

정보라, 「흉터」, 『저주토끼』, 래빗홀, 2023.

by 장원희

모든 것이 끝나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


“결국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줄거리이다. 특히 주인공이 이야기 속 괴물을 무찌른 후 사랑하는 인물과 백년해로 하는 내용은 국적을 불문하고 흔히 쓰이던 소재다. 종종 주인공은 고난 속에서 몸 또는 마음, 혹은 몸과 마음 둘 다에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상처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남는 결말을 맞는 주인공에겐 흉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이런 소재의 작품을 접했을 때 정말 고난을 극복하기만 하면 쉽게 “고난에서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그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모든 것이 끝났음에도 고난의 흔적이 흉터로 남아버린다면, 흉터와 늘 함께할 인물의 생에는 어떨까. 정보라 작가의 단편 「흉터」는 바로 이러한 주인공을 통해 고난과 상처,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할 요소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강렬한 햇살 아니면 숨 막히는 어둠, 번득이는 대지 아니면 눅눅하고 축축한 동굴 안의 공기, 얼음같이 차가운 물 아니면 끈끈한 습기와 오물, 소년의 생활에는 그 중간이 없었고,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고도 없었다.”(186) 그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했던 동굴 속 생활 모습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 자신이 누군지 알기도 전 동굴에 갇혔다. 세계의 누구도 그를 몰랐고, 동굴 속에서 괴물의 먹이로써 살아가는 동안 당연히 그는 혼자였다. 긴 세월 간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기다림과 공포 그리고 고독뿐이었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씩 소년의 뼈를 찢고 골수를 빨아먹었다.”(187) 방치된 환경 또한 그에게는 고통이었으나 이 시절 동안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괴물에게 먹이로서 다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환경을 오랜 시간 견디다 보면 바라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당장의 고통에서의 탈출인 죽음 혹은 이 상황에서 탈출하여 다른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삶일지라도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 두려워 탈출을 꿈꾼다.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고통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어쩌면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주 어린 시절 속 자유로운 삶을 언젠간 다시 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자아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모르며 괴물에게 의도적인 반항을 한 적도 없다. 탈출을 소망하지만 무력했던 유년기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자신을 꺼내달라고 무작정 빌었으며, 청년이 된 후에는 스스로가 더 이상 무력하지만은 않음을 깨달아 탈출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지만 단순히 생각만 할 뿐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는 동굴에서, 그리고 괴물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갑자기 그는 동굴 밖의 세상에 던져지게 되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괴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친다. 동굴에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괴물의 식사 후 남은 흉터 120개를 통해 10년이 지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10년간 얻은 유일한 것도 바로 이 흉터뿐이었다.


“마을에 당도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를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알몸을 보고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눈을 가렸으나 뒤이어 그의 흉터를 보고는 벌리려던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오려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194) 고난 끝에 드디어 자유를 되찾나 싶었지만, 불운하게도 긴 세월 피해자로서 남겨진 온몸의 흉터는 그에게 낙인처럼 남아 또다시 그를 고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는 마치 어떤 피해자가 그 피해자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또 다른 상황의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 부분에서 사회가 떠올리는 피해자라는 이미지 속에는 그 피해의 책임 일부를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부분이 있지는 않은가 한 번쯤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싸움판에 서게 한 것은 흉터이지만 동시에 매 경기에서 그를 지켜주는 것 또한 흉터였다. 흉터에 공격이 가해지면 흉터는 단단해져 그를 보호했으며, 그는 정신을 잃었고, 다시 이성이 돌아온 뒤에는 처참한 몰골의 상대만이 남아있었다. 이 공백 속 그의 모습은 묘사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에 초점이 맞춰져 서술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아 이 순간 그는 ‘그’이지만 ‘그’가 아닌 무언가로 변모한다고 본다. 극도의 고난은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럼에도 평상시 그의 모습에서 눈에 띄는 트라우마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흉터가 위협당했을 때 보이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그에게 남은 트라우마, 정신적 ‘흉터’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 강도가 너무 세기에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이 ‘흉터’를 깊이 묻어둔 것이다. 신체의 흉터가 공격당하는 상황은 괴물의 행위를 연상시켜 묻어 둔 ‘흉터’를 드러나고 이로 인해 이성을 잃고 공격성이 나타나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했다고 보았다.


“대머리 남자가 주는 정체불명의 액체를 마시고 사람을 상대로 싸움하게 된 뒤로 그는 서서히 망가져갔다.”(217) 이렇게 평생 끌려다니는 삶에 고착할 것 같던 그에게 정체불명의 액체가 주어진다. 싸움판에서의 싸움을 감당하는 것은 ‘흉터’의 몫이므로 이때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으나, 이것을 마시면서 그는 맨 정신일 때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복합적인 고통을 겪는다. 이 액체는 그가 묻어 둔 정신적 ‘흉터’를 서서히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흉터가 건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조금씩 괴물이 남긴 정신적 상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흉터가 공격당했음에도 정신을 잃지 않아 자기 신체가 변형되는 모습을 최초로 확인하게 된다. 날개가 돋고 신체가 단단해지는 등의 신체 변형은 그에게 남은 정신적 ‘흉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흉터’를 조금씩 마주하게 되는 상황은 죽음을 예감하게 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전에도 그랬듯 죽음을 예상한 순간에 그는 다시 한번 탈출을 꿈꾼다. 하지만 이번 탈출도 그의 의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심하게 망가져 버린 그는 스스로 탈출을 계획하기도 전에 버려지게 된다. 다행히 액체의 섭취를 중단하며 그는 남은 액체마저 게워 내고 ‘흉터’는 다시금 흉터 속에 묻힌다.


또다시 목적지 없이 방황하던 그는 한 남매를 만난다. 남매 중 여동생인 여자는 초반에는 마을의 사람들처럼 그를 꺼렸다. 하지만 이는 그가 낯설고 신뢰할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눈이 안 보이는 여자는 그의 흉터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에게 흉터가 존재함을, 따라서 그가 괴물의 제물이었음을 알게 된 여자는 오히려 그에게 다가가며 호의를 보인다. “나는 이런 일들을 몰랐어요. 나중에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알았죠. 나도 아이였지만, 다른 아이를 나 대신 죽게 하고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이 언제나 괴로웠어요.”(239) 그는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은 왜 동굴에서 고통받아야 했으며 괴물은 무엇이었는지 드디어 진상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더 크게 다가온 것은 밝혀진 진실보다는 최초로 겪게 된 타인의 공감과 위로였다고 본다. 여자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평생을 먹이, 혹은 기르는 개 취급을 받으며 폭력 속에서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해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여태껏 살면서 느낀 고독, 괴로움 등과는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꼈을 거라 예상한다. “그는 쇠사슬을 땅에 내던졌다. 그리고 여자의 하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안고 여자에게 입 맞추었다.”(240) 그리고 그중에는 사랑도 있던 듯하다. 그는 이 행동을 통해 여자에게 호감을 전하는 동시에 더 이상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쇠사슬을 던지는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언제나 쇠사슬에 메여있었다. 쇠사슬에 메여 동굴에 갇혀있었으며 싸움판에서도 늘 쇠사슬에 끌려다녔고, 남매를 만난 후에는 스스로 풀 수 있음에도 그저 쇠사슬에 메여있었다. 이 쇠사슬이 바로 여태껏 그가 그저 수동적인 인물이었음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는 처음으로 쇠사슬을 자신의 의지로 벗어던져버린다. 여자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된 직후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드디어 수동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자아를 가지고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할 준비가 됐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최초로 한 결심은 바로 괴물을 죽이는 것이다. 이후 그가 괴물을 상대할 때 사용한 무기 역시 쇠사슬이다. 쇠사슬에 메여 그저 남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그는 이제 목적을 위해 스스로 쇠사슬을 휘둘렀다. 수동적이었던 과거에서 완벽히 탈피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태양 빛 속에 ‘그것’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했다.”(245) 또한 그는 마침내 괴물의 모습을 마주한다. 괴물의 모습을 알지 못했던 과거에 그에게 있어 괴물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체가 확인된 괴물은 더 이상 두렵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작품은 이를 통해 공포의 대상은 규명되지 못하고 상상 속에 머물 때, 무한히 두려워질 수 있는 반면 실체가 확인된 순간 현실로 끌어내려져 있는 그대로 인식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듯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괴물 앞에서 겁먹지 않는다. 이는 또한 그가 나약했던 옛날과 달리 괴물을 제대로 마주하고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거대한 새는 절벽에 부딪혀 목이 부러진 채 죽어 있었다.”(248) 영원할 것 같던 괴물은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강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이제 괴물은 ‘그것’이 아닌 ‘새’로 표현된다. 이 괴물은 미지의 ‘그것’으로 인식될 만큼 괴물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 실체 이상으로 과도하게 거대해지고 신격화되었으나 그에 의해 죽음으로써 사실은 그저 좀 더 강한 ‘새’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죽은 새를 계속 바라보았다. 새가 죽었으니 그곳에는 더 이상 그가 얻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었다. 새가 그에게 남긴 것은 먹이로서 살았던 시절의 흉터뿐이었다. 그 사실이 그는 한없이 안타까웠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기를,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그는 한참이나 그곳에 서서 죽은 새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248)


괴물에 의해 일생을 고통받던 그가 드디어 그 괴물을 무찔렀다. 그렇기에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까 막연히 예상했으나 그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지나지 않고 영원할 것 같은 어떤 순간들이 있다.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 고난이 그중 하나다. 바로 그가 겪었을 동굴에서의 시간 말이다. 그는 우연히 그 순간을 지나왔지만 단순히 벗어났을 뿐, 그때의 시간은 마무리되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듯했다. 하지만 괴물을 죽인 후는 다르다. 괴물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누군가는 겪고 있을 지모를 그 순간은 이제 없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순간이 끝나는 것은, 막연히 넘지 못할 것 같던 상대를 넘어서 상대를 거대하게 느꼈던 감정조차 잊는 것은 어쩐지 허무하고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 것도 같다. “나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겨우 이 정도였나? 그 세월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이런 마음을 그는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괴물을 무찌른 뒤 기뻐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비교하였을 때 이 작품은 그의 모습을 통해 실제로 고난을 이겨냈을 때 드는 감정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게 한다.


“클리셰”적인 전개를 다뤄보자면, 이제 괴물을 물리쳤으니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것이다. 실제로도 허무함에 빠져있던 그는 여자를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여자는 물방울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여자뿐만이 아니다. 괴물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 모두가 사라진다. 이 것을 목격한 여자의 오빠는 절망하여 그를 공격하고, 이 공격에 그는 오랜만에 정신을 잃어 ‘흉터’가 드러나며 여자의 오빠를 죽여 버린다. 모든 게 끝났음에도 ‘흉터’는 여전히 그와 함께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말로 그에겐 흉터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괴물과 괴물을 키운 모두에게 본의 아닌 복수를 하게 된 것이다. 긴 세월 착취당하면서도 악의를 가져본 적이 없던 그는 이러한 복수는 조금도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자신 때문에 그가 제물로 바쳐졌음을 알리고 사과하는 여자에게도 조금의 원망 없이 그것은 괴물의 잘못이라 여자를 위로했으며, 괴물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역시 괴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닌 괴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피해받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요소는 또한 그가 겪는 고통을 더 불합리하게 느껴지게 하는 장치로도 작용했다. 그를 불운의 피해자로서 부각하며 그의 상황과 그가 겪는 고난에 공감하고 집중하게 만든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행한 본의 아닌 복수의 피해자가 되었다. 고난을 이겨냈지만 남은 건 흉터뿐이고 사랑마저 잃었으며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큰 틀만 보면 어렸을 적부터 고난을 겪는 주인공이 작은 희망 하나로 견뎌내다가 사랑에 빠지고 자아를 찾아 결국 괴물을 무찌르는 내용은 흔하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 속에 담아내고 있는 정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작품은 이런 부분들을 통해 고난 속 다양한 요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특히 모든 것이 끝난 후 흉터와 허무함만이 남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고난은 벗어났다고 끝이 아님을, 그 흉터는 어쩌면 평생 남게 됨을 보여주는 듯했다. 우리의 주위에도 다양한 형태의 고난을 겪은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흉터가 남아있을 수 있다. 이렇듯 작품은 사회 속 고난을 겪은 이들의 흉터를 짐작하게 해 줌으로써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한다. 고난의 시절을 보낸 적이 있는가. 전부 지나와 지금은 단순히 옛일이라 여겨질지라도 마음 깊은 곳을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남아 있을 어떤 흉터를 마주할지 모른다.



과제 목적 : 1학기 인문교양 중간고사 대체과제

제출 시기 : 2024년 6월

인문대 입학 후 처음으로 작성한 과제글이기에 어떤 식으로 작성해야 할지 몰라 많은 고뇌를 거친 글이었습니다. 다시 보니 새롭네요.

정보라 씨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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