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형(감독), <#살아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2020.
좀비 사태 속 집 안에 갇혀 살아남는 상상을 해 본 경험이 있는가. 한국에는 천만관객을 넘긴 영화 <부산행>, 조선시대의 좀비 이야기를 다룬 영화 <창궐> 등 다양한 좀비 영화가 존재한다. 그중 2020년 개봉한 영화 <#살아있다>는 노골적인 PPL 등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주로 들은 영화이지만, 한국의 좀비 영화 중 유일하게 좀비 사태 이후 ‘생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된다. 좀비라는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라 하더라도 영화 <부산행>처럼 좀비 사태에서 살아남기 위한 액션과 생존자와의 갈등이 주가 되는 작품과 달리 좀비 사태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생존’이 핵심이 되는 작품은 그 양상이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고독하게 살아남아 다른 생존자와의 물자에 관한 갈등 없이 집 안에 갇혀 연명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살아있다>를 살펴보려 한다. 작품에서는 ‘생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주인공 준우가 갇혀 있는 지역 외부의 공간은, 좀비 사태가 벌어진 지역의 격리에 성공해 평범한 일상을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즉, 준우는 구조를 기다리며 ‘생존’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좀비 사태 속 고립된 공간에서의 ‘생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 막히는 긴장감을 갖게 한다. 이러한 소재는 관객에게 극한의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도 확실한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으며 꾸준히 소비되는 요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저 이 극단적인 재난에서의 ‘생존’에 이렇게 매료되는 것일까. 그 이유를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정신적 요소에 연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좀비 사태 속에서는 계급도, 재화도, 아무런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출신지, 직업, 소득은 모두 좀비가 되는 데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원천인 화폐란 무용지물이 된다. 더 정확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권력이 기호화된 위계와 대상이 전복된다. 영화의 장면 중 좀비 사태가 한창인 와중에 송출되는 티브이 광고는 상황에 맞지 않게 느껴진다. 영화 속 준우 역시 이를 무척 어이없게 느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고와 상업같이 자본주의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요소가 무가치해지는 상황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살아있다>의 생존기를 담은 서사에서 기존의 사회 법칙은 완전히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종종 계급과 재화에 대한 부조리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기존 질서가 해체된 세계는 계급과 자본의 모순에 환멸을 느낀 이들에게 대리적 해방감을 제공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설정이 충분히 매혹적인 판타지로 다가올 수 있다.
같은 특징을 보여주는 예로 영화에서는 제한된 식량으로 연명하던 준우가 양주를 따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고급 양주를 마시는 모습은 높은 계급과 부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양주를 마시는 장면은 기존의 이미지보다는 ‘비효율적인 행위’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식량같이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이 중시되는 상황에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사치품은 그 의미가 약해진다. 양주는 바로 이 사치품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수를 쏟고 절망하는 준우의 모습과 양주를 제한 없이 아끼지 않고 마시는 준우의 모습의 대비는 더욱 부를 나타내던 사치품이 이제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사치품의 가치는 본질이 아니라, 소비를 둘러싼 기호와 이미지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기호화된 권력’의 전형이다. 사치품이 그 지위를 잃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본래 특별한 효용을 가진 물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영화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당장 생존에 직결되는 대상이다. 안식처, 식량 등이 그 예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기존 위계의 전복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수한 자본주의의 상징이 도처에 존재하며, 이에 의해 많은 이들이 종착점 없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한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어 느끼는 만족감은 일시적이며 곧 이 감정은 다른 욕망으로 대체된다. 현대 사회는 결코 만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의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새로운 욕망이 그 자리를 메운다. 그러나 이 재난의 세계에서는 정반대다. 냉장고에 남은 식량, 닫힌 창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느낀다. 갈망이 멈추는 세계. 그것이야말로 현실에 지친 이들이 꿈꾸는 유일한 환상 아닐까. 충분한 식량과 안전한 안식처를 통해 생존이 보장되는 것만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보통 최우선 목표다. 삶 속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은 이제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통장에 찍히는 엄청난 잔고가 아니라, 꽉 찬 냉장고가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게 이 세계의 가장 큰 풍요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극한의 상황에서 오히려 정신적인 요소는 강조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영화는 보통 두 가지 갈래로 사람의 본성을 나타낸다. 이기적이고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며 악해지거나, 이타적이고 자신의 생존보다 주변을 챙기며 관객에게 바보같이도 느껴지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살아있다>의 주요 등장인물인 준우와 유빈은 후자의 인물로 등장한다. 이 후자의 경향은 영화의 매력 요소 중 하나에 일조한다. 영화에서 많은 시간을 홀로 버텨내던 준우는 좀비에의 위협도, 물자의 고갈도 아닌 알게 된 가족의 절망적인 소식에 의해 처음으로 삶의 의지를 잃는다. 이러한 장면은 여러 차례 더 등장한다. 준우는 외부에서 좀비 떼에게 습격당하는 경찰에게, 그를 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울분에 차 소리를 질러버려 위험에 처하도 하고, 유빈 또한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자신의 식물에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종종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몰된 비효율적인 가치에 관해 얘기한다. 돈보다 사람을, 효율보다 사랑을, 같은 이야기를 하며 이에 쉽게 감동하고는 한다. 돈과 효율이 우선인 사회에서는 무척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더욱 삭막한 효율 중심 사회의 현대인들이 열망하게 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어떤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신문 기사를 보고 매료되듯이 생존과 직결된 극한의 상황 속에서의 비효율적인 행동에 우리는 이끌려버린다.
준우와 유빈은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성을 갖는다. 가족의 소식에 절망하여 자살하려는 준우에게, 건너편 아파트에 갇혀 있던 유빈은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려 다시 살아갈 의지를 주었다. 단 둘만이 살아남았다고 여기는 둘에게, 둘의 행동에는 재고 따짐이 없다. 유빈은 굶주린 준우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그 과정에서 위험에 처하기도 하며, 준우는 유빈을 돕기 위해 자신의 드론을 일말의 미련 없이 희생한다. 이후에도 준우의 아파트로 건너오기 위해 서로의 아파트 사이를 맨 몸으로 돌진하여 좀비 무리를 상대하는 기행을 보이는 유빈을 돕기 위해 분명히 위험한 상황임에도 망설임 없이 도우러 밖으로 뛰쳐나가는 준우와, 서로가 구조 신호를 보낼 것과 무사히 옥상으로 올라올 좀비를 막을 것을 믿고 각자 맡은 일을 하여 옥상까지 향하는 여정을 통해 서로 간의 신뢰와 유대가 절대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함께한 시간도, 쌓인 신뢰도 없다. 그럼에도 준우는 유빈을 위해 목숨을 건다. 되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인연을 나누면서도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는 순간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이 모순이, 오히려 영화 속 유대에 더 끌리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극단적인 배경을 설정하며 이를 납득 가능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속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인 것이 우선시되는 사회에 현대인들은 종종 대가 없이 서로를 온전히 믿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어떤 ‘진정한’ 관계를 소망하고 이에 관한 환상을 갖는다. 그리고 준우와 유빈의 관계가 바로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절대적인 유대감은 관객에게 그들의 이상을 보여주어 정서적 충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성별적인 관념에서 벗어난 장면 역시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보통의 재난영화에서는 성별에 따른 역할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난다. 영화 <부산행>에서 몇 가지 대표적 성별 의식을 찾을 수 있다. 여성은 보호가 필요한 임산부, 여자친구, 딸 등으로 등장하며 남성의 보호가 필요하고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남성은 이를 지키는 남편, 남자친구, 아빠 등으로 등장하여 주도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고 여성을 지키며 이를 위해서라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 <#살아있다>에서는 이러한 요소가 비교적 약하게 나타난다. 유빈이 준우의 아파트로 건너오는 장면에서 준우는 안전하게 서로의 베란다를 통해 건너오는 방법을 제안하지만, 유빈은 듣기도 전에 무기 하나만을 든 채 맨몸으로 수백 마리의 좀비가 있는 밖으로 향한다. 급히 준우가 도우러 내려가긴 하지만 준우보다는 유빈 혼자만으로 대부분의 좀비를 소탕하는 다소 판타지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렇듯 준우는 전형적인 남성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용맹함보다는 불안, 결단력보다는 우유부단함이 먼저 드러난다. 반면 유빈은 남성적 보호를 기대하는 인물이 아니다. 좀비 무리 사이를 단신으로 돌파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구조하며, 동시에 타인을 구조하는 주체로 선다. 이러한 역전은, 성별에 따라 역할이 정해지는 관습에 익숙했던 관객에게 의외의 쾌감을 준다.
영화 <#살아있다>에서 준우와 유빈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사람으로서 죽고자 한다. 좀비가 된 자기 아내를 위해 둘을 먹이로 주려 한 남자도 등장한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상황에 놓인 듯 선택에 관해 고민할 수 있는 상상적 기회를 제공한다. 특별히 좀비를 소재로 다룬 영화는 다른 재난 영화와 달리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대상이 이전에는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 어쩌면 우리의 가족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더욱 극적으로 우리를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한다. 좀비가 된 가족을 마주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살기 위해 싸우는 대신, 사람으로 남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 모든 질문을 관객의 마음 한가운데 던진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본성. 우리는 그 불편한 상상을 통해, 스스로의 윤리와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러한 기회는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상황을 탈피하여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다. 그렇게 자본이 관여되지 않았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어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을 안겨준다. 바로 이러한 요소 역시 관객이 느끼는 기묘한 해방감과 즐거움에 일조한다.
좀비 영화에서의 ‘생존’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확립된 인식에 느끼는 문제의식이 바탕이 되며, 자본주의적 사고를 넘어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대상, 비일상적인 경험을 찾을 수 있다. 영화 <#살아있다>에서 또한 이런 점들이 나타나며, 다른 좀비 영화들과는 다른 경향을 가진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모습과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역할에 다소 어긋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이것들이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관객에게 동시에 기묘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좀비 사태 속 생존자의 삶을 보며, 뒤집힌 세계에서 오히려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기호가 무력한 곳, 살아남는 것이 곧 존재의 증명인 그 세계. 현대 사회의 피로에 지친 우리는, 그 무너진 세계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끌림 또한 느낀다.
이 모든 상황을 뒤엎은 세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좀비는 두려운 상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야말로 더 인간다워진다.
기호 없는 삶, 질서 없는 거리. 그곳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남는가?
과제 목적 : 2학기 전공선택 중간고사 대체과제
제출 시기 : 2024년 10월
콘텐츠의 서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교수님이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이 교수님 수업은 모두 다 들었었네요.
좀비물을 많이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부산행>, <창궐>, <워킹데드>처럼 사람과의 갈등이 주인 내용보다는 이후의 생존만이 주목되는 게 더 취향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