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극사에 있어 물리적인 첫출발은 1902년 ‘협률사’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어 1908년 ‘원각사’로 재개관한 극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고종 재위 40주년 기념으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실내극장인 ‘협률사’는 비록 본 목적이었던 의례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그 시기, 한국 연극사 변천에 있어 선두에 있던 존재임은 확실하다. 1907년의 광무대와 연흥사, 1908년의 장안사 등 20세기 초반은 한국 연극사의 근간이 되는 그 토반이 다져지는 시기였다.
극장이라는 실내 공간의 설립은 어떻게 새로운 문화를 이루어 내었는가. 우선 그 시절 우리 국민에게는, 근대적 공간에 들어선다는 경험 자체가 새로운 현상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교육의 영역에서는 서당, 종교 생활에서는 개인의 집 등에서 모임이 이루어지며 현대의 학교나 서양식 교회, 성당 같은 근대식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때부터 어떤 목적을 위해 건립된 건축물을 통해, 그 공간의 목적에 맞는 행동 양식을 취하며 함께 모인 사람들과 일시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입장료를 내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 극을 관람하는 일, 모르던 사람들과 한 공간에 나란히 앉아 무리 속 일원으로 머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이 모든 건 근대적 일상을 처음 맞이한 인물들에게는 무척 생소하고도 특별한 경험이었으리라 예상된다.
특히, 그 시절 사회 속 자리 잡기 시작한 근대적 시간 개념에 주목할 만하다.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전, 조선시대 우리 민족에게 시간이란 지금과 다르게 인식되는 기준이었을 수 있다. 해가 뜨면 만나자, 해가 질 즈음 만나자, 등의 자연 현상을 활용한 시간약속이 익숙한 시기였다. 극 장르의 뿌리가 된 판소리 또한 조선 후기 장터, 양반집 마당, 너른 공터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야외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공연되며 그 시작 시간은 정확한 시각으로 예고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다르다. 강의 내용 중, 극의 시간에 맞추어 모이는 사람들 부분에서 이전에 수강하였던 ‘한국일상생활의역사’라는 우리 민족의 생활사를 다루는 강의의 내용이 연결되어 떠올랐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개념이란 무척이나 익숙하다. 1분 단위로 이루어지는 현상들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요소이다. 하지만 처음 전차가 도입되고, 처음 극이 공연되며 정확한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건 그때의 사람들에겐 무척 낯선 일이었을 것이다. 비단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뿐 아니라, 왕족이든 고위 관리이든, 그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우리 일상생활의 근간이 될 근대적 시간 개념이 도입된 데에는 단순한 시간개념의 확립을 넘어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신분제가 정말로 과거의 유산으로 사라졌다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 근대에 새로이 시작된 극의 양식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문화적 변화뿐만 아니라 이 시간 개념의 측면에서도 근대 시민의 의식을 바꾸는 데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 극장이 생겼으니, 새로운 근대적 공간에서 ‘수행’을 이루어야 했다. 당시 가장 적합한 형태는 판소리였다. 다만 전통 판소리는 한 명의 창자와 고수가 청중과 함께 소통하는 1인 서사극으로, 앞서 언급했듯 야외를 무대로 하며 실내 공간에서의 공연은 그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입장료를 지불한 유료 관객이라는 개념과, 그들이 가만히 객석에 앉아 무대를 응시하는 새로운 관극 형태가 등장하며 이전보다 볼거리가 더해진 연희 양식을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이 서로 대화 형식으로 창을 주고받는 형식의 대화창, 더 나아가 여러 명의 창자가 등장인물의 역할을 나누어 맡아 분장을 시도하는 분창 등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발전 속에서 등장한 형태는 소리 중심의 장르라기보다는 창극이라고 부를 만한 극의 형태에 가까워졌다고 보았다. 이 변화의 흐름에서 창극은 판소리의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되, 극 구조와 무대 연출의 필요성을 수용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사실, 창극이라는 명칭은 그 당시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그때에는 ‘신연극’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새로운 연극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신연극’의 최초는 무엇일까. 2008년은 한국 근현대 연극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첫 극장 ‘협률사’는 1902년에 설립됐음에도 어째서 1908년을 근대 연극의 기점으로 보는 것인지, 그 이유는 바로 최초의 ‘신연극’ 이인직의 <은세계>가 1908년에 새로이 단장한 ‘원각사’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극장이라는 새로운 근대 공간의 출현은 누군가에겐 비도덕적인 풍속을 조성할 수 있는 요소로 우려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극장과 객석 분위기의 건전함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극의 내용까지 건전하고 유익한 예술로 발전시키자는 ‘연극 개량론’으로 이어졌다. 재개장한 ‘원각사’는 그러한 사회적 목소리를 의식했을 것이고, 이때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 한 경험이 있는 이인직은 일본의 연극 개량운동과 근대극 형성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기에 새로운 극을 제작하는 데 있어 알맞은 인물로 보였을 듯하다.
이인직이 만든 신연극 <은세계>는 신소설 <은세계>와 나타난 시기가 같다. 연극의 대본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내용 또한 동일하다고 예상된다. 둘 중 무엇이 선행했는지에 대한 연구도 긴 시간 이루어졌다. 연극에는 소설의 전반부만을 공연했다는 추측이 있고, 소설에는 판소리 ‘최병도 타령’과 연결되는 내용과 문체 등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그런데 신소설 <은세계>의 표지를 살펴보면, 그 제목 속에 ‘신연극’이라는 문구가 함께 함을 알 수 있다. 이 두 매체에서 나타난 <은세계>는 위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무엇이 절대적으로 선행하여 하나에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동시에 작업되어 처음부터 다 매체로의 공연 및 출판을 기획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가 더 팽배한 지금에 와서 보면 이 선택은 꽤 전략적인 계획으로 보인다. 소설의 전반부만이 나타난 연극을 본 후, 그 뒷내용과 결말에 궁금증이 생긴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소설로 향할 것이다. 만약 그때 소설이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도 희석되어 보다 작은 유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연극 또한, 만약 먼저 소설을 접했다면 소설을 알기 전보다는 더 적은 확률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즉, 이 둘은 동시에 세상에 등장함으로써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를 맺었다. 일본에서의 경험이 그의 상업적 시야를 넓힌 것인지, 다른 의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꽤 현명한 선택으로 보였다.
이인직은 신소설 <은세계>의 결말에서도 알 수 있듯 친일적 면모를 강하게 보이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더욱 작품 <은세계>와 그가 주요 인물로 자리 잡은 한국 근대 연극사 기점을 조심히 다루게 되는 부분이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한국 문학의 영역 변천 과정에서 한 때 한문문학을 배제하던 시기가 떠올랐다. ‘한문’을 중국의 언어로 여겨 일제의 침탈 이후 주권의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기 오로지 국문만이 우리의 정신을 담아낸다고 여겼을 때였다. 지금은 그때의 ‘한문’을 동아시아 공동 언어로 보아 보다 유한 영역을 설정하게 됐지만 당시의 첨예한 기준은 우리가 한 때 <은세계>를 쉽게 다루지 못하고 연극사의 출발을 축하하지 못하던 모습과 유사하다고도 느껴졌다. 다만, 이인직은 실제로 친일을 했던 인물이므로 ‘한문’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겠다. 그저 시간이 갈수록 그때의 감정이 점점 민중에게 희석되고 그 시기의 문물을 보다 다른 시각으로 수용하게 되며 <은세계> 또한 단순히 친일의 잔재를 넘어 우리의 문화 역사를 담은, 그때의 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자료로 바라보게 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은세계>를 단지 친일파의 문제적 작품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겠다.
희곡 대본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신연극 <은세계>가 꾸준히 조명되는 이유는, 이 작품이 단순한 판소리의 재현이나 전통 연희의 반복이 아닌,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새로운 창작 서사로 무대에 오른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이 아닐까. 신소설과 신연극이 동시에 작업된 듯한 다매체 기획, 그리고 관객을 유도하는 전략적 방식은 이후의 문화 산업의 단초로도 읽히며, 내용적으로도 봉건 권력의 부패를 비판하고 근대적 구국 담론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 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메시지는 철저히 편향되어 있고, 후반부에 드러나는 친일적 시선은 분명한 한계로 남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이 작품을 더욱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이처럼 20세기 초 한국 연극의 형성 과정은 단지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 아닌, 근대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연극은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기능을 수행했다. 새로운 질서에 익숙해지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방식을 학습하는 장치였으며, 신분과 계층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의 장이기도 했다. 그 출발이 되는 신연극은 예술과 사회,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복합적 현상인 셈이었다. 이 시기의 연극사는 단순히 무대 위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에서 근대 한국 사회로 변화해 가던 방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문화사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과제 목적 : 1학기 전공선택 중간대체과제-1
제출 시기 : 2025년 10월
이번에 처음으로 희곡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희곡이나 연극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무척 재밌는 영역이더라고요. 희곡이라고는 '햄릿', '인형의집' 등만 생각해 온 제게 요즘 배우고 있는 근대 희곡은 새로운 장르로도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