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같은 여성에게 가장 많은 비난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여성 집단 중 하나는 프로아나 (proana, 이하 ‘프아’)라 할 수 있겠다. 프아는 그 명칭부터가 proanorexia의 준말로, 찬성을 의미하는 접두어(pro-)와 거식증(anorexia)의 합성어이다. 이름을 통해서는 단순히 거식증을 찬성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극단적인 마름과 효율적인 다이어트를 위해 거식증의 증세를 모방한다는 점을 보았을 때 이들의 거식증에 대한 감정은 ‘동경’에 가깝다.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이상적인 여성성으로 추구되는 ‘마름’을 선망하고 그를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수행하는 모습은, 언뜻 보면 가부장제의 논리에 순응하여 적극적으로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행위 로도 여겨진다. SNS상의 많은 여성이 규범적인 여성성에 저항하여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현재에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정신 질환인 거식증을 동경함으로써 실제 거식증 환자에게 실례라는 점도 더해진다.
식욕은 생존의 근본이 되며 허기에는 굉장한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기본 욕구를 이성으로 억압하여 늘 허기 속에서 머물겠다는 프아는 보통 의지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노력하여 욕을 먹는 것일까. 이들을 향한 비난은 주로 프아의 ‘마름 추구’라는 목적에만 집중된 경향이 있다. 프아가 겪는 고통의 측면에서 왜 그토록 스스로를 억압하고 이를 감내하는 것인지를 포함하여 프아라는 대상 자체에 관한 부분은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개 프아는 “살 빼는 게 모든 걸 해결해 준다.” 등의 미성숙한 사고를 하고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집단 정도로 여겨진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프아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목적에만 집중하여 이들을 다소 납작하게 바라보는 행위이다. 여기서는 프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 프아만을 다룬다. 남성 프아는 다음에서 제시할 바람직한 여성성인 ‘마름’에서 벗어남으로 혐오받는 여성과 다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왜 프아 중에는 여성이 절대다수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프아를 향한 흔한 비난 중 하나는 “네 사고가 이상한 것을 사회 탓하지 말라.”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프아는 자신이 프아가 된 까닭은 ‘마름’을 추구하는 사회 때문이며 사회가 자신을 ‘조이는’ 것이라 한다. 앞서와 같은 비난에는 “네가 ‘마름’을 추구하여 여성혐오를 재생산하 므로 결국 네가 탓하는 사회는 네 스스로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프아는 대체로 사회의 ‘마름 추구’에 의해 혐오적인 시선을 받은 경험이 있으며 이를 다이어트의 계기로 삼는 경우가 다수이다. 즉 프아는 사회에서 추구하는 마름을 갖지 못해 당한 혐오를 제거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혐오를 견디다 못해 살이 쪄서 혐오의 상황을 겪게 만드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로 이어져,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도 다수 존재한다. 실제로 SNS상에서 ‘프아자극짤’로 여겨지는 대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살이 찐 모습에 대한 혐오를 담은 미디어가 흔히 나타난다.
개별적인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프아가 이토록 극단적인 행위를 취하게 된 까닭에는 혐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는 상황이 많다. 그러니 이들도 알고 있다. 사회의 ‘마름 추구’가 부적절함을. 그러나 그로 인해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으므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사회 인식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을 규범에 맞추어 혐오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사회를 욕하는 맥락에는 이러한 배경을 참고하여 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기에서는 왜 평범하게,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고 극단적인 행위를 수행하는가 하는 비판이 존재할 수 있다. 프아의 대부분은 프아가 되기 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다이어트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극단적 다이어트를 접하고, 효율의 차이를 느낀 경우가 다수이다. 최소 10킬로는 빼고 싶은 상황에서, 자신은 한 달에 3킬로를 겨우 빼는데 한 달 만에 15킬로도 뺄 수 있는 최고 효율의 방법을 알게 된 이에게 건강은 소비재가 된다. 혐오에서의 탈출이 이미 대부분의 행동 목적이 됐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최고 효율로 최고의 성취를 낼 수 있는 방식을 따르게 되는 결과는 자명해 보인다.
혐오를 피하기 위한 행위이기는 하나 ‘마름 추구’를 통해 부적절한 규범적 인식을 강화하지 않는가 하는 의견 또한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마르지 않아 겪은 혐오에 저항하여 인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다수이니,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전략을 택한 프아에게 이 같은 비판이 향하는 상황은 자연스럽다. 어떤 사회적 인식에 저항할 때 이 특성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규범적 여성성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규범성을 배척하는 상황은 특별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외부의 억압이 내재화되어 스스로 선택했다 착각하는 상황이더라도, 자율적인 선택의 부정은 잘못된 방향의 배제가 될 수 있다.
또한 프아가 추구하는 ‘마름’ 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규범적 여성성으로 여겨지는 ‘남성에게 선호되는 요소’와는 다소 차이가 존재함도 고려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뼈말라’는 프아가 흔히 쓰는 용어로 ‘뼈만 남을 정도로 마름’을 뜻한다. 이 단어가 바로 프아의 강박적 도착지를 잘 나타내준다. 이 ‘마름’은 분명히 ‘남성에게 선호되는 마름’과는 다르다. 또 ‘마름’을 위해서라면 탈모, 생리불순 등도 불사한다. 이는 남성에게 선호되기 위한 여성성이나 사회가 긍정적 여성성으로 여기는 인류 재생산의 과정은 안중에 없음을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자신을 말리는 행위는 사회에서 추구되는 여성성을 손실하면서까지 이루어진다는 점을 볼 때 스스로를 사회에서 규정한 여성이나 어떤 대상이 아닌 다른 존재로 탈피하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프아가 선망하는 규범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마름’은 기존에 추앙받는 여성의 ‘마름’ 인식에 균열을 낼 수도 있음을 고려하여 논할 수 있다면 좋겠다.
프아는 ‘평범하게’ 마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비정상적으로 말랐다고 인식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종종 전략적인 방법으로 아픔을 드러내기를 택한다. 아플 때 별다른 이유 없이 학교에 빠질 수 있는 게 그 예이다. 이 관점에서 프아의 비정상적으로 인식되고 싶은 욕구는 내면이 지옥임에도 그 아픔이 간과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외부가 이를 인식했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는 ‘자해계’의 성격도 띤다. 프아의 극단적인 행위가 자기가학적인 특성을 보이기에 더욱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자해계’도 다수에게 비난의 대상이기는 하나, 관심을 얻기 위함이라는 욕 뒤에는 대상의 아픔을 인정하는 면이 있다. 무턱 대고 개인을 탓하기보다는 그의 배경을 고려하려는 시도가 따른다. 프아에게도 같은 사고를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프아의 행위와 이상은 고통의 표출이다. 이 고통을 인식하고 고찰할 때 이들을 둘러싼 요소를 더욱 깊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
프아를 향한 비난 중에서는 “저러는 애들 실상은 뚱뚱하다.”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살찜에 대한 혐오가 선명하게 담겨있는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프아가 될 정도로 강박을 가진 이유를 잘 보여준다. 프아는 거식증을 환자에 대한 배려 없이 다루기도 하고, 섭식장애의 폐쇄적인 특성으로 인한 고독과 허기를 참으며 느끼는 고통, 혐오에 대한 아픔을 견디기 위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의도와 다르게 이를 접한 여성들을 프아로 만들기도 하는 등 분명 문제가 되는 현상은 맞다. 그러나 비난이 오롯이 개인에게 향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이들이 프아가 된 배경과 심리를 사회적인 시각에서 접근했으면 하는 의도로 고찰해 보았다. 그렇기에 주로 표면적으로만 다루어지는 프아의 좀 더 다양한 특성을 살펴보았지만, 여기에 기재된 프아의 형태도 모든 프아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윗글에 드러나는 모습과 같은 프아가 있을 수 있고 다른 경향을 가진 프아도 있을 수 있다. 당연하다. 그들은 어떤 평면적인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아는 집단이며 집단의 개개인은 모두 입체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이다. 이 글이 단순히 ‘미성숙한 사고’나 ‘적극적으로 가부장제에 동참’을 하여 ‘마름 추구’를 한다고 여겨지는 프아를, 사회적으로 함께 논의가 필요한 대상으로, 그리고 대상의 복잡함과 다양하게 엮여있는 사회 맥락적인 측면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어떤 관점에 맞추어 그들을 틀에 넣기보다 한 발짝 다가가 살펴보는 행위가 필요할 때이다.
과제 목적 : 2학기 전공선택 기말고사 대체과제
제출 시기 : 2024년 12월
미디어와 콘텐츠에 관해 탐구해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좀비 레포트와 같은 좋아하는 교수님이었어서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제출일이 크리스마스 즈음 이었어서 연휴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있네요. 각주를 어떻게 옮겨야 하나 고민하다가 전부 제외하여 용어 설명 등에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17일)에 팝업 구경 가려 합니다.^^ 오시는 분이 계시다면 인사 나눌 수 있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