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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감과 거리감

안국진(감독),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한국영화아카데미, 2015.

by 장원희

몰입감과 거리감

오늘날 작품은 악역을 포함한 등장인물 대부분이 입체감 있게 그려져, 이들에게 공감과 몰입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구성이 일종의 트렌드이다. 예전에는 보다 평면적인 악역이 많이 등장했다고 느꼈는데, 이럴 경우 대개 주인공에게는 쉽게 몰입이 되고 악역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져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주인공의 편에 서서 악역의 몰락을 바라는 게 지배적인 감정이 됐다. 주인공이 범죄자인 경우에도 그렇다. 나는 특히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강하게 몰입되는 주인공과 입체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개념적인 악으로만 인식되는 주변 인물들의 구조가 잘 느껴졌다. 이 영화는 심지어 주인공이 본의는 아니지만 연쇄살인을 저질렀고, 계속해서 살인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에도 영화를 시청하는 동안 내내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더욱 주인공에게 느끼는 몰입감이 뚜렷하게 체감됐다.


한국 영화에는 기구한 삶을 가진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일 것 같은 주인공 수남은 정말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불우한 일이 끊이지 않는다. 남편의 손가락 절단 사고에 수남이 경황이 없어 당황할 때, 동료가 수남의 주머니에 손가락을 넣어둔 것을 몰라 결국 봉합하지 못하고, 이 때문에 수남은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 후 다시 죽도록 일하던 수남은 많은 대출을 끌어안고 남편의 소원인 집을 산다. 그러나 이미 폐인이 된 남편은 집에서 자살 시도를 하게 되고, 수남이 발견하고 절규하며 겨우 구조하였으나 남편은 식물인간이 된다. 이제 엄청난 대출 빚과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수남은 집도 세놓고 고시원에 들어가 다시 죽도록 일을 한다.

영화에서는 이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수남이 오래 우울해하거나, 극도로 낙담하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지 않는다. 남편의 사고가 났을 때도 어수룩하게 당황하고 절망하는 모습만을 잠깐 비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수남이 더욱 안쓰럽고,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그 내면의 지옥이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 악역들이 등장한다. 수남의 집 재개발을 반대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재개발 찬성 서명을 받으러 밤낮으로 돌아다니는 수남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합법적으로, 누구보다 성실히 일해 빼곡하게 채운 서명지를 찢고 수남을 폭행하고, 수남을 납치하고 감금하여 고문하기도 한다. 그때의 악역들은 그저 악독하고, 연약하고 불쌍한 수남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위협하는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몰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닌 ‘악’으로만 느껴지며, 이때 가졌던 감정이 바로 거리감이라고 생각한다. 서명지를 찢은 인물도, 수남을 납치하고 세탁기에 돌려버리기까지 한 인물도 결국 수남에게 죽는다. 그러나 이 살해의 과정 또한 고의성은 없다. 한 번은 어쩌다 불을 내 가스 폭발이 났고, 다른 한 번은 정말 죽기 직전, 만장일치로 정당방위 판결이 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무슨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때까지 수남은 악독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 또한 처음 수남에게 가졌던 판단과 공감이 유지되는 요소라고 본다.

그런데 이후에는 조금 다르다. 수남은 반대 시위 주도자인 동네 상담사를 납치해 복어를 먹여 죽인다. 그 과정에서 수남이 상담사에게 전체 내용을 구연해 주는 방식으로, 이때까지의 실상이 드러난다. 회상이 끝나고 현재가 드러나는 시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현재에서는 수남의 의지로 상담사를 죽인 것이다. 그러나 이 상담사 또한 그저 실리적이고 자기의 이득만을 위하며, 앞서 사망했던 인물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최종 악’의 형태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수남과 마찬가지로 상담사의 죽음을 바라게 되며, 그저 수남이 경찰에 적발되지 않기를 걱정하게 된다. 그 후 수남을 취조하러 찾아온 경찰도 죽인다. 이때에도 두려움과 악의에 의해 죽인 건 아니다. 자신을 의심하는 건 괜찮았으나, 재개발을 취소시킬 수도 있다며 수남을 압박하는 경찰에 그만 우발적으로 죽여 버리고 만다. 이쯤 되면 관객은 수남과 작품 전반을 함께 해왔다. 그 기구하고 안타까운 일생을 따라온 것이다. 경찰은 불쌍한 수남을 핍박하는 장애물로 느껴진다.


수남이 죽인 인물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직접적인 악행의 수위가 낮아지며, 경찰의 경우에는 거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과 같은 감정으로 수남에겐 더욱 몰입감을 느끼고, 이들에게는 여전히 거리감을 느낀다. 이 구성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수남의 불우한 일대기에도 늘 성실하고 순수한, 어떤 악의도 없는 모습을 주변 인물과의 대비를 통해 세밀히 보여주어 더욱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던 듯했다. 반면 그 주변 인물들은 악의적이고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모습만이 강조된 채 관객이 몰입 중인 수남을 위협하여 그 거리감을 강화한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 인물에게 몰입하게 하고 다른 인물들과는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장치를 아주 계산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남에게는 실패와 죄책감, 노동과 책임의 과정을 촘촘하게 붙여 두고, 감정 표현을 절제된 수준에서 멈추게 함으로써, 관객이 그 공백을 스스로 채워 넣도록 만든다. 반면 악역들은 하나의 입체적인 인간이라기보다 ‘폭력적 재개발 세력’, ‘이기적인 이해관계자’라는 표지로만 등장해, 수남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만 보인다. 이 구도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남을 응원하게 되고, 그녀가 저지르는 범죄조차도 이해하고 싶어진다. 결국 이 작품에서의 몰입감과 거리감은 이야기의 내용뿐 아니라 어떤 인물에게 시간과 시선을 얼마나 내어주는가,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우는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까지가 함께 드러내는 장치였다고 느꼈다.




과제 목적 : 전공 과제

제출 시기 : 2025년 11월

10번째 마지막 과제였네요 ^^ 희곡 수업이었는데 앞으로 다른 희곡 전공 수업이 없다는 게 아쉬울 만큼 너무 즐거운 수업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희곡을 보았는데 저는 그중 오영진의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와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가 가장 기억에 남더라고요... 이 영화도 몇 년 전 참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입니다. 그 당시 수남이가 너무 불쌍해서 한참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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