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와 웰메이드 플레이, 그리고 그 극의 필수장면에 대해 배우면서 곧바로 떠오른 대상이 있었다. 바로 초등학교 시절 무척 즐겨 보던 인터넷소설(이하 ‘인소’)이다. 내가 말하는 인소는 지금의 인터넷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일종의 시초 격으로, 입체적인 등장인물과 일명 ‘사이다 전개’가 주로 나타나는 요즘 인터넷소설과 달리 전형적이고 유형적인 등장인물, 그리고 오해와 오해가 거듭되는 갈등이 중심을 이룬다.
이때 작품들은 대부분 비슷한 패턴을 가졌다. 우선 지나치게 선하고 착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악인이 존재해 주인공을 끊임없이 위기에 빠뜨린다. 악인의 성별은 대체로 여성이고, 주인공의 존재 목표는 일명 ‘남자 주인공’이라고 불리는 남성 캐릭터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여성 주인공 한 명뿐이라고 해도 될 만큼 남성 캐릭터의 비중은 적다.) 그 과정에서 악인의 방해가 무수하게 등장하고, 주변 인물들 역시 악인의 계략에 휘말려 주인공을 오해한다. 그러나 결국 조력자의 도움으로 진실이 밝혀지고, 모두가 주인공을 이해하게 되며, 권선징악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인소 <이상한 학교>, <담배피는 공주님> 등 수많은 인소가 앞서의 전개를 충실히 따른다.
전개 방식에도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주인공은 단순히 연속된 위기에 처하기만 하진 않는다. 하나의 갈등이 거의 해결되어 이제 좀 괜찮아질 것 같으면, 그 타이밍을 노린 듯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지금 돌아보면 이런 인소의 전형적인 패턴이 멜로드라마, 특히 웰메이드 플레이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혹은 독자)이 이미 진실을 알고 있고 인물들만 모른 채 오해를 키워 가는 구성, 그리고 필수장면에서 감정이 폭발하고 정화되는 구조가 그대로 겹쳐 보인다.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인소는 그저 ‘재밌기 위해’ 읽는 작품이었고, 독자는 익숙한 패턴 속에서 결국 다가올 권선징악을 기대하며 주인공에 이입해 다양한 감정을 경험한다. 인소가 유행하던 2000년대, 이 장르는 대부분의 여학생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때의 인기를 떠올려 보면, 같은 방식으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제공하던 멜로드라마가 당대 관객에게 어떤 위상을 가졌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필수장면’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모함과 진실을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른다. 이 사실이 결국 폭로되고, 모두가 뒤늦게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장면은 독자가 가장 간절하게 기다리는 순간이며,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이야기를 따라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그랬다. 마치 작법서라도 있는 듯 비슷한 패턴의 인소들을 손에서 떼지 못했고, 주인공의 서러움과 억울함을 함께 견디다가 필수장면에서 함께 통쾌하고 후련해지는 감정을 반복해서 맛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주인공에 대한 감정 이입을 통해 그 필수장면에서 얻는 감정적 고조와 정화가, 내가 수백 편의 인소를 섭렵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이후 인소의 계보를 잇는 인터넷소설들은 경향이 크게 달라졌다. 전형적인 선악 구도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이나 반동인물로 등장하는 경우는 줄어들었고, 결말 역시 권선징악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독자는 단순한 감정적 고양보다는, 그 안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며 사유의 즐거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에게 인소는, ‘멜로드라마’라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몸으로 익히고 있던 멜로드라마였다. 지금은 그 단순한 선악 구도나 과장된 감정 표현이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바로 그런 구조를 통해 처음으로 타인의 불행에 울고, 뒤늦게 찾아오는 정의에 안도하고, 감정이 고조되고 정화되는 체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멜로드라마를 개념으로 배우게 된 지금, 초등학교 때 새벽까지 몰래 핸드폰을 쥐고 인소를 넘기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시간이야말로 내 안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형성해 준, 가장 원형적인 관객 경험이었던 것 같다.
과제 목적 : 전공 과제
제출 시기 : 2025년 11월
주제를 주시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참 좋아하는 과제 시간이었는데 어제부로 10회의 글쓰기가 끝났네요^^ 이건 그전 거였는데 그다음 수업 때 교수님께서 무척 인상 깊은 과제가 있었다고 하시며 제 과제를 소개해주시고 '웰메이드플레이'도 제 과제 내용과 인소를 예시로 설명해 주셔서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