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보양식, 오늘의 일상: 우유에 관한 작은 역사
오늘날 물 다음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음료를 고르자면 그 후보로 우유를 빼놓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우유는 각종 요리의 재료부터, 음료의 바탕으로 쓰이며, 다른 첨가물 없이 그 자체로 음용하는 일도 매우 흔하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평생에 걸쳐 권장되는 이 우유는, 초‧중‧고에서 학생들에게 우유급식으로 아침마다 배부될 만큼 오늘날 굉장히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현대 우리나라에서 우유 없는 삶은 쉬이 생각하게 어렵다. 라떼 류의 음료, 각종 디저트,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치즈, 한창 유행을 타고 있는 요거트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우유를 필요로 한다. 우유 없는 삶을 생각해 보자. 당장 생일에 관습적으로 먹는 케이크부터 존재할 수 없다. 우유는 이제 우리 삶과 너무나 밀접해진 대상이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우유가 이처럼 보급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유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소의 젖’이라는 정의로 기재되어 있다. 인류에게 소는 굉장히 쓸모가 많은 동물이다. 특히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소는 더욱 유용한 가치를 지녔다. 그렇기에 그 당시, ‘맛’을 추구하는 듯 보이는 행위들은 삶의 근간이 되는 농업보다 불필요하게 느껴졌고, 농사의 핵심 동물인 소는 자연스레 우유보다 귀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우유보다 소가 귀함은 보편적인 인식이겠으나, 이때는 우유를 생산하는 행위로 인해 소가 피로를 겪고, 송아지가 피해를 겪는 사태 자체가 인류가 우유를 얻지 못하는 상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일이었다. 이에 더하여 과거 조선에는 젖소가 드물기까지 하였으니 이 시대의 우유는 구하기 어려운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우유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가 하면,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기재된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선나사주(善那使主)가 고도쿠왕(孝德王)에게 처음으로 우유를 바쳤으며, 우유를 일본에 전파시켰다는 내용을 통해 드물지만, 그래도 분명히 고려와 조선에서도 우유가 존재했으며 이를 음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기, 우유는 드물고 무척 귀한 약재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후 원나라와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원의 주식이었던 우유가 자연스레 고려의 식문화 속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풍속은 우왕 때 설치된 국가 상설기관 ‘유우소(乳牛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실과 특수층을 위한 우유를 생산해 내는 기관으로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에 다음과 같은 때의 기록이 있다. “우왕이 호곶(壺串)에서 사냥하다가 환관 20여 인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였다. 길을 가던 중 유우소(乳牛所)를 지나다가 파리하고 약한 소를 파는 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어 궁중에서 반찬을 만드는 사람[膳夫]에게 우락(牛酪)을 올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때는 우왕 11년, 1385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 시설은 고려를 지나 조선의 설립 후에도 명목을 이어갔다. 태종 대에 설치된 유우소가 바로 이것이다. 초기 왕실에 우유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이 시설의 전담 아문은 오늘날의 국방부와 같은 역할을 했던 병조의 산하에 위치하였다. 이 유우소는 우유와 말린 연유의 일종인 낙소를 만들어 공급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가 조선이 되었어도 유우소는 변하지 않았다. 우유가 더 이상 없어서는 안 될 대상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태종 16년, 1416년 3월에 조선에 기근이 들게 된다. 기근은 농업과 주식이었던 쌀의 우선순위를 높였고, 이때 유우소는 기관의 소들을 목장에 방목하였다. 식량난 앞에서 유우소의 쇠퇴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비교적 그 순위가 밀리기 시작한 유우소의 상황은 세종 20년, 1438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유우소는 폐지됐고, 폐지된 유우소는 동부학당이 되었다. 여기서 이 시기 유우소의 위치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데, 동부학당은 흥인지문 바로 안쪽에 위치하였고, 유우소 또한 같은 자리에서 명색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우소가 폐지된 후 더 이상 조선에서 우유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사실 우유가 필수적인 대상이 되었음에도 유우소가 사라질 수 있던 까닭은 이를 대체할 타 관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우소가 사라진 후 사복시(司僕寺;太僕寺)에서 그 역할을 이어나갔다고 전해진다. 사복시는 임금의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는데, 말뿐만 아니라 일본이 선물한 코끼리, 물소, 원숭이 등도 이곳에서 맡았던 모습을 보아 소도 함께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우소가 폐지된 후 왕실의 우유 담당은 이곳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복시에서 우유를 관리, 담당한 부서는 타락색(駝酪色)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소를 관리하던 왕실 직영 목장이 낙산 일대에 위치해 있어 낙산은 타락산(駝酪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타락색에는 타락직(駝酪直)이라는 전담 관리가 있었으나, 생우유를 짜는 일은 왕과 왕족의 치료를 담당하던 정 3품 관청인 내의원 의관들이 맡았다고 한다. 다음은 우유 짜기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조영석이 그린 풍속도 <우유 짜기>이다.
작품에는 어미 소의 젖을 짜기 위해 네 명이 동원된 모습이 나타난다. 두 명은 소의 머리와 다리를 붙들어 고정하고, 한 명은 그 사이 젖을 짠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어미 소의 앞에서 송아지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어미의 젖을 짜는 동안 방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혹은 젖이 나오게 할 유인물로 추측된다. 어느 쪽이든 모녀, 혹은 모자의 소는 상당히 안쓰러워 보인다. 그리고 이런 감상은 영조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영조실록』에는 영조 25년, 1749년 10월 6일에 “내의원(內醫院)에서 전례에 따라 우락(牛酪, 치즈)을 올렸다. 하루는 임금이 암소의 뒤에 작은 송아지가 졸졸졸 따라가는 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가엾이 여기며 낙죽(酪粥)을 올리지 말도록 명하였다.”라는 기록이 존재하니 말이다.
당시 우유와 관련된 풍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기근과 유우소의 과잉 인원근무로 인한 폐해 등을 고려하여 결국 유우소를 폐지한 후, 줄어든 우유의 생산량에 따라 세종은 우유 음용을 줄일 것을 명했다. 그러나 성종, 중종, 숙종, 영조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은 꾸준히 우유를 찾았으며, 섭취 양 또한 조선 초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절 우유의 인기를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앞의 기록에서 우유의 수요를 알 수 있었다면, 우유의 위상과 귀함이 나타나는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명종 20년, 1565년에 대사헌 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이 명종의 외삼촌이었던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봉서를 올렸다. 봉서의 내용 중 윤원형의 사치를 고발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다음과 같다. “사복시의 타락죽은 상공(上供)하는 것인데 임금께 올릴 때와 똑같이 낙부(酪夫)가 기구(器具)를 가지고 제 집에 와서 조리하게 하여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바로 그 귀한 우유를, 심지어 임금에게 바칠 때와 같은 형태로 온 식구가 함께 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윤원형은 파면되었다. 앞에서 언급된 ‘낙부(酪夫)’란 우유 조리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사람으로 파악된다. 이 또한 우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우유를 어떤 형태로 섭취했을까? 대체로 바로 앞의 문헌에도 언급되었던 ‘타락죽(駝酪粥)’을 만들어 먹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전해지는 타락죽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언뜻 보면 죽이나 스프의 형태에 가까워 보이는 이 타락죽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먹던 건강 보양식 중 하나로, 그 목적 역시 건강 증진의 측면에 있었기 때문에 음식을 조리하는 수랏간이 아닌 내의원에서 만들어 바치던 일종의 약이었다. 앞에서 생우유를 짜는 일 또한 내의원 소속의 의원들이 맡았다고 하였다. 즉, 생산되고 제조되는 것까지 모두 의원의 손을 거친, 그야말로 보양에 목적을 둔 ‘처방’ 약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구하기 어렵고 왕족에게 주어지는 진귀한 음식이었으나 만드는 법은 매우 간단했다. “쌀을 담가다가 무리(물에 불린 쌀을 매에 갈아 체를 밭치어 가라앉힌 앙금)를 정갈하게 갈아 밭이고, 생우유가 한 사발이면, 무리는 조금 적게 하되, 묽고 되기는 잣죽 무리 심만큼 하여, 먼저 쑤다가 만약 익으려 하거든 우유를 부어 화합하여 쑤나니, 이것이 내국의 타락법(駝酪法)이니라.” 이는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에 기록된 타락죽 만드는 법이다. 여기에 취향에 따라 설탕과 소금, 혹은 꿀이나 생강 등으로 간을 하기도 했다. 상당히 간단한 조리법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재료 본연의 맛과 영양이 두드러질 수 있었다고 추측된다. 최소한의 재료로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끓인 타락죽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건강과 보양을 담당하던 진귀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이 귀함에는 당대 우유의 위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맛과 영양으로 많은 사랑을 받던 우유, 현대에 이르러 아침으로 우유가 들어간 음료를 마시고, 간식으로 우유가 들어간 빵을 먹는 우리에게 이토록 친숙한 우유는, 사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제한된 방식으로 생산되고, 특정 계층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귀한 재료였다. 조선시대 왕실의 보양식이자 약재로, 때로는 사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우유는,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식문화에 스며들었다. 지금 우리의 식탁 위에 놓인 우유 한 잔에는, 그 지난한 여정의 흔적이 조용히 담겨 있다.
<참고문헌>
김영조, 「조선시대 왕실의 보양식이었던 소젖(우유)」, 『우리문화신문』, 2018.11.07.,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15487, 접속일 2025.05.27.
이동고, 「"장수한 영조가 즐겨먹은 타락죽"」, 『울산저널』, 2018.05.23.,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95394, 접속일 2025.05.27.
이하나, 「麗末鮮初 乳牛所와 우유 생산」, 『역사와경계』 제122집, 2022, 부산경남사학회, 143-168쪽.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 접속일 2025.05.27.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main/main.do, 접속일 2025.05.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접속일 2025.05.2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https://db.history.go.kr/goryeo/main.do. 접속일 2025.05.26.
과제 목적 : 1학기 교양 과제
제출 시기 : 2025년 5월
일상사를 배우는 교양이었습니다. 조선의 직업부터 주거 환경, 먹을거리 등 다양한 생활사를 배웠어요.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배우면서 가장 크게 든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느끼고 생각하는 건 대부분 똑같구나, 였네요.^^ 참 수강하기를 잘 한 교양 같습니다. 웬만한 주제가 나오면 유식한 척 아주 얕게 아는 지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