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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 Jul 20. 2023

가방에서 물티슈 생략하기

그 누구를 위한 사람도 아닌 그냥 ‘나’

  당신의 가방에 항상 들어있는 물건은 무엇인가? 혹은 매번 잊지 않고 챙기는 물건이 있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가방에는 별의별 것이 다 들어있다. 작은 장난감, 사탕, 비타민, 물, 손수건, 휴대용 티슈, 물티슈, 때로는 선크림에 여벌 옷까지.. 이런 다양한 것들 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를 뽑으라면 단연코 그것은 물티슈이다. 물티슈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환경에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이 아이와 외출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없는 나 홀로 외출을 하게 되었다.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는 첫날이었다.

  글쓰기 수업. 처음에는 그저 나를 위한 시간 부여의 의미였다. 자꾸만 늘어나는 잔병치레가 왠지 스트레스를 받기만 하고 풀어내지 못하는 몸이 나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가 아닐까 싶었고, 무언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운동을 할까, 새로운 것을 배워볼까 하다가 평소 가끔씩 끄적여보는 메모장이 생각나서 글쓰기 수업을 찾아낸 것이다.


  첫 수업에 가던 날 필요 없는 것들은 두고 가려고 손가방을 열었다. 크지도 않은 그 가방에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가 나왔다.  아이들을 위한 뽀00 비타민(막내 입막음용), 작은 자동차 장난감, 뭘 접었는지 모를 꼬깃꼬깃한 색종이, 그리고 물티슈가 들어있었다. 다 빼고 내 물건만 남겨둔 가방 앞에서 물티슈를 들고 고민했다.

  ‘아이들이 없으니 필요 없긴 한데.. 혹시라도 수업 마치고 바로 아이들을 데리러 갈 수도 있고.. 그래도 굳이 가져갈 필요는 없는데.. 혹시라도 거기서 누군가 뭘 쏟으면.. 그래도 카페니까 거기에 티슈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물티슈가 나를 완전 애엄마로 만들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나의 본캐가 엄마이고 부캐가 나인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어 나는 얼른 물티슈를 빼버렸다.


  오랜만에 나 혼자 하는 외출인데 온전히 나만을 위해 가방을 꾸리고 주어진 시간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데에 의미를 두었다. 그 결심으로 과감히 (그때의 나는 정말 비장한 표정이었다.) 물티슈를 빼버렸다.

  ‘물티슈 따위 거기에도 있겠지. 내가 굳이 거기서 애엄마 티를 낼 필요 없지.’

  갑자기 뭔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물티슈 하나가 뭐라고 사람 마음을 이리 들었다 놨다 하나 싶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다른 경우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이 아닌데도 챙기곤 했다. 학교에서 퇴근할 때도 혹시나 싶어 노트북 가방을 들고 집으로 왔었고, 출근하는 가방에도 아이들 물건과 그놈의 물티슈가 항상 들어있었다. 그렇게 나의 여러 부캐들 사이에도 경계가 없었고, 당연히 그 부캐들과 나라는 본캐 사이의 선도 어느새 거의 지워지고 있었다.


  물티슈를 빼버리던 그날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처음으로 내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모두 들켜버리는 것 같아 무척 부끄러웠지만 내 글을 다른 사람 앞에서 소리 내어 읽고 나니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온전한 내가 되어 세상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 경험이 나를 브런치로 이끌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혼자서 끄적거리기만 하고, sns에는 계정만 있을 뿐 유령처럼 존재하던 내가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기쁘지만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그다음 날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날부터 글을 써나갔다. 그렇게 내 세상을 다른 한쪽에 슬그머니 만들어가는 것이 나에게 자유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처음은 웃기지만 물티슈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나를 위한 외출에는 의도적으로 물티슈를 빼버린다.    나만 이런 거에 의미를 부여하나 싶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개의치 않는 다른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겠지.


  나만을 위한 가방을 들고 외출한다. 누구든 그래봤으면 좋겠다. 가벼운 외출에도 그 순간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가방을 마음에 꾸려보고 기분 좋은 자유로움을 느껴보면 좋겠다.


  다시 첫 글쓰기 수업날로 돌아가보자면 자유로움을 느낀 나는 그날 한결 여유로운 사람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일 수 있고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엄마만이 아닌 ‘나’가 있었고 그래서 엄마를 조금 놓을 수도, 조급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위한 사람만이 아닌 ‘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또한 곁에 있는 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음을 알았다.


  아직도 종종 내 안이 엄마의 자리만으로 가득 차게 되어 팍팍한 하루를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물티슈를 보며 숨을 한 번 쉬어낸다. 물티슈를 조금만 멀리 두고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며 ‘나’의 자리를 만든다.

  “엄마!”하는 소리에 그 자리가 금방 쪼그라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글을 쓰며 나에게 ‘나’의 자리를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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