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연일 무더위가 가시지 않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오징어 볶음을 한가득 차에서 내려주었다.
그야말로 한가득....
정확히 표현하자면 양념국물과 건더기가 큰 김장비닐에 묶여 족히 20킬로쯤 되니 시중에 나와 있는 김치통에는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양이었다.
이 많은 것은 어찌 주느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바쁘다며 휭 떠나버린 나의 지인...
멧돼지처럼 살만 쪘지 힘이라고는 없는 나로서는 그걸 혼자 들 자신이 없었고, 그나마도 잠옷 차림으로 따라 나온 아홉 살 막둥이가 함께 들어서 캐리어에 싣고 올라올 수 있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어쩌다 잠 때를 놓친 막내아이를 재워야 했기에 소분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었다.
4개의 문이 있는 냉장고 중에 오른쪽 아랫칸을 김치 냉장고로 사용하고 있는데 김장철이 한참 지나며 김치통들이 비워져 가는 상태였던지라 맨 아랫칸에 오징어볶음을 비닐채로 일단 넣어두기로 했다.
물컹물컹 형체도 없는 것이 어찌나 무겁고 많은지 간신히 욱여넣고는 급히 아이를 재우다가 자정 넘어 나도 잠이 들어버렸다.
한참 꿈을 꾸며 자고 있는데...
꿈인 듯 생시인 듯
"엄마!, 엄마, 큰일 났어!!... 일어나 봐!!!"
".... 으응? 응? 왜?"
큰 딸이 안방 문을 열고 서서
"엄마, 오징어 볶음이 냉장고 문을 열었어!!"
"뭐? 무슨 소리야?!"
"아까 이모가 준 오징어 볶음 말이야... 나도 자는데 자꾸 무슨 알람 소리가 나는 거야..
그래서 무슨 소린가 싶어서 밖에 나와 봤더니 오징어볶음이 너무 무겁고 많아서 걔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니까?"
"뭐라고? 지금 몇 신데?"
"지금? 새벽 네시 반..."
"그럼 언제부터 저랬다는 거야?"
"아이, 몰라! 일단 나와봐"
한창 단꿈을 꾸고 있던 중이라 쉽사리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지만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냉장고 문을 비죽이 열고 시뻘겋고 물컹물컹한 비닐의 모서리 일부가 바닥에 축 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눈에는 잠이 그득했지만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아이처럼 냉장고 문을 열자 나머지 오징어 볶음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냉장고 속은 이미 물방울로 가득했고, 오징어 볶음의 상태를 보니 비닐 속으로 하얀 잔거품이 일고 있었다.
"어쩌지? 이거 그냥 다 버려야 할 것 같은데? 더운 날 차 안에 넣고 오다 보니 상태가 안 좋아진 데다 더 악화된 것 같아... "
"그래, 엄마 그냥 버리자..."
"나 이거 무거워서 못 들겠는데 어쩌지?"
"내가 같이 들게.. 있어봐..."
물컹물컹 차가운 비닐 속의 오징어 양념이 팔에 닿으니 잠이 확 깨는 듯했다.
일단 그것을 싱크대 안에 넣어두고, 2리터짜리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여러 장 준비해 살짝 접어서 입을 크게 벌려주었다. 그리고 오징어 볶음의 비닐 뭉텅이를 가위로 자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와르르 오징어와 양념들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시큼한 냄새가 주방을 꽉 채웠다.
양념 국물은 싱크대 3분의 2나 올라왔고, 열일곱 딸과 나는 둘이서 손바닥 가득 차게 오징어를 올려두고 다른 손을 포개어 양념과 물기를 꼭꼭 짜서 쓰레기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팔의 팔꿈치 언저리까지 기름진 오징어 양념으로 코팅되어 흡사 빨간 고무장갑을 낀 듯했고, 우리 둘은 번갈아가며 연신 신세 한탄을 해댔다.
"아니 이게 자다가 무슨 봉변이야... "
"그러니까.... 하아...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엄마!!"
"야, 우리 무슨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같지 않니?"
"그러게... 근데 꿈도 희망도 없이 이 일만 해야 한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
"그런데 이거 한 번쯤 버리고 와야겠다"
"엄마, 내가 양손에 한 봉지씩 들고 버리고 올 테니까 엄마는 계속 쓰레기봉투에 넣고 있어 봐"
그 당시 우리 집은 음식물처리기가 없기도 했고, 그 수없는 것을 지금 당장 처리하기엔 불가능하기도 해서 양손에 오징어볶음만 가득 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큰딸이 서너 차례 왔다 갔다 했다.
물기를 어느 정도 제거한 오징어볶음이 약 10리터쯤 되는 양이었다.
"엄마, 밖에 해 떴어.."
"그래... 수고했어.. 정말 너무 고맙다..
엄마 우리 딸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이런 일이 내가 사춘기 한창일 때 벌어졌다면 우리 엄마 어땠겠어. 아예 날 깨우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뭐가 힘들다는거냐며 누워만 있고, 엄마 혼자 이 일을 다 처리했을 거 아냐..."
오징어 볶음의 건더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지만 고춧가루 양념이 싱크대 망을 가득 막아서 좀체 내려가지 않는 것이 흡사 핏물 같았다. 그걸 본 엉뚱한 우리 딸은..
"아니, 다 절단된 오징어 볶음도 이렇게 치우기 힘든데 살인자 걔네들은 사체 유기를 귀찮아서 어떻게 하는 거야? 미친것들..."
거의 두 시간에 걸친 오징어볶음과의 사투가 끝나고, 우리 둘은 이른 아침을 싱크대에 서서 맞이하게 되었다.
혹시 지인이 서운해할까... 나는 아직 오징어볶음의 사건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과유불급....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절실하게 와닿은 하루...
뜻하지 않게 하루를 일찍 시작한 탓에 많은 집안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일찍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 준
오징어 볶음....
시큼한 오징어 볶음의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 오는 듯...
불현듯 이러한 일상이 생각나며 오늘 저녁 메뉴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오징어 볶음...
오징어는 7월부터 1월까지 제철이라 하는데 오징어찜으로 먹기 좋은 시기는 크기가 작은 5~6월이 적당하고, 크기도 적당하고 질감도 부드러운 회, 물회 요리를 하기에는 7~8월이 적당하다.
9~10월엔 오징어가 성체가 되는데 12월과 1월까지는 그 크기를 제법 유지하며 2월 말부터는 냉동 오징어가 아니고서는 제법 큰 오징어를 만나기가 어려워진다.
그중 오징어찜으로 섭취하는 총알 오징어는 오징어의 한 종류가 아니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새끼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 어획과 불법판매라고 할 수 있다.
수요가 줄면 공급이 줄지 않겠나 싶은 생각에 나라도 소비를 자제하고자 한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오징어의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12~15cm 이하의 오징어를 포획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동해에서 많이 잡히던 오징어가 최근 몇 년 전부터 지구 온난화로 인해 수온이 높아지며 어획량도 대폭 줄어들어 예전에 비해 가격도 그만큼 올라 '금징어'라고도 한다.
그래도, 마른오징어, 찜, 숙회, 물회, 국, 볶음, 오징어순대 등의 그 수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모양과 식감으로 변신하며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 주니 사랑받지 않을 수 없는 식재료.... 아... 살아있는 생물이다 보니 식재료라는 표현을 하기가 조금 미안해지기는 하다.
그러나 최상위 포식자로 태어난 인간으로서 어쩌랴...
이 또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사는 섭리라며 대충 합리화하고 다시 오징어의 영양성분에 대해 알아보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