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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Feb 12. 2024

코쟁이가 전해준 이야기

얼어붙은 손에 허연 입김을 불어가며 지나던 이곳 산기슭에도 이젠 제법 따뜻한 볕이 들며 겨우내 쌓였던 눈두덩이를 뚫고 여린 새순이 빼초롬 고개를 들이민다.

충청도 남자답지 않게 걸음도, 성정도 불 같이 급한 최 씨는 그날도 잰걸음으로 동네 둔덕을 힘겨운 기색 하나 없이 훌쩍 넘어 공주 장터로 향한다.

십리는 족히 넘는 그 길을 바쁜 걸음으로 장터에 도착했던 것과는 달리 딱히 큰 볼일이 있어 나왔던 것은 아니어서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좌판을 기웃거리는 최 씨의 도포 끝자락이 꽃샘바람에 한들한들 흩날린다.


'잉? 허는디 저기는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있댜?'


장터 가운데 약장사가 왔는지 두세 겹을 에워싼 사람들로 가득하다.

최 씨 또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맨 뒷줄에 자리를 잡고 서 있는데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컸던 최 씨 눈에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아니 코쟁이 아니여? 시방 코쟁이가 조선말을 는겨?'


"시방 코쟁이가 뭘 파는 거래유?"


"아니 뭘 파는 것 겉지도 않고, 뭘 믿으라고 허는거 겉은디 들어도 당췌 뭔 소린지 모르겄네유..."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 곁에 살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순간 최 씨의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번개가 내리 꽂히는 듯했다.

단지 처음 보는 코쟁이가 유창하게 하는 조선말이 놀라워서도,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다 알아들어서도 아니다.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예수, 하나님'이라는 말에 최 씨는 세상에 태어나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코쟁이 선교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웅성대며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있지만 최 씨는 이대로 코쟁이를 보낼 수는 없었다.

흩어지는 사람들을 급하게 비집고 들어간 최 씨는 왠지 모를 이상한 감정에 곧 눈물이 떨어질 듯한 얼굴로 코쟁이 선교사 앞에 섰다.


"선생님이 말씀허신 그분을 내가 믿고 싶은디 나는 어쩌면 되겄어유? 이대로 집이 가먼은 나하고 우리 식구들은 어쩌면 된대유? 아까 그 사람을 믿으면 구원인가 뭔가 받는다고 혔는디 어쩌면 된대유?"


"아... 주님,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선생님을 위해 영접 기도를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기도가 끝나고 아멘이라고 할 때 같이 아멘.. 이라고 하면 됩니다."


선교사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려는데 최 씨는 왠지 시장바닥에라도 무릎을 꿇어야 할 것만 같았다.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이 귀하고 귀한 것을 뻣뻣이 선 채로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기도가 끝나고 '아멘'이라고 하자 최 씨도 익숙지 않은 '아멘'을 급하게 따라 외쳤다.


"제가 며칠 안으로 선생님 댁으로 가서 예배도 드리고 가족들에게도 영접 기도를 하겠습니다. 선생님 집이 어디이고,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나는 저 너머깨 도천리 사는 최씨유, 도천리에 호두나무집이라먼 다 알어유.."


"선생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보여..... 최보여..."


"네, 고맙습니다. 곧 선생님 댁으로 직접 가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틀쯤 지나서였을까? 최씨네 동네 초입에 검은색 지프차가 힘겹게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막 눈이 녹기 시작해 땅이 물러져 푹푹 꺼지는 진흙 길을 그 무거운 자동차가 들어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결국 뒷바퀴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며 옴짝달싹을 못 하던 그때였다.


'잉? 저게 머여? 우리 동네에 차가 드루와?'


태어나서 자동차라고는 한 번 볼까 말까 한 그 시절, 그 깡촌에 생각지도 못한 것이 진흙 바닥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광경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는 더욱 놀라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언능 나와봐... 언능.... 지금 코쟁이가 우리 동네에 왔어..."


"먼 소리여? 코쟁이가 오다니?"


"꿈지락거리지 말고 언능 나와봐... 호두나무집 최씨네 집에 간담서 차를 갖고 왔다니께... 차가 빠져서 움직이덜 못혀"


소식을 들은 여러 장정들이 큰 나무 기둥을 자동차 바퀴 아래에 끼워 넣고는 바퀴가 빠져나오도록 힘을 쓴 지 수 분이 지났을 무렵 가까스로 바퀴가 빠져나오고 흙탕물을 튀기며 마른땅을 밟을 수 있었다.

코쟁이 선교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허리를 넙죽 굽히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호두나무집 최 씨 집으로 향했다.


"이번 판은 내가 이긴겨... 돈이 없으먼 다덜 다른거라도 내놔..."


"아니.. 동네 노름에 사정도 안 봐 주고 이런게 어디 있댜? 한 판만 물러"


"시방 머라는거여? 뒷간 들어갈 때허고 나올때 허고 말이 다르잖어...."


"다르긴 머가 달러!! 아까 내가 한 판 물러준거 몰러?...... 쉿!!! 이거 언능 딴디다 숨겨... "


"갑자기 뭔 수작질이여... 돈을 내 놓던지 물건을 내놓던지 허라니께..."


"보여 온다.. 저 멀리 보여 온다니께"


"잉? 최씨가 온다고? 언넝 치워, 언넝..."


"아이구... 안그래도 성질머리가 지랄 맞어서 무서웠는디 예순가 먼가 믿는담서 담배도 끊고, 술도 안헌댜... 시방 돈 내고 노름 허는거 보믄 아주 불호령을 헌다니께..."


"아니 지가 순사여 뭐여?"


"그 전께 코쟁이가 왔다 감서 그 집이서 기도를 했다나 머를 허고 나서는 제사도 그날 이후로 싹 다 없앴댜"


"그라믄 명일에 제사 안허고 뭐 헌댜?"


"식구덜찌리 모여서 그니가 준 책 펴놓고 그것을 읽어감서 기도허고 그런다고 허지 아마?"


"조상님을 안 모시고 그게 무슨 천벌 받을 짓이여?"


"모르겄어... 그래도 멋이 저래 좋다고 빙구맹키로 천날만날 웃고 댕겨..."


"그것뿐만이 아녀... 그 집 식구덜 전부 십리도 넘는  예배당을 매일 새벽마다 눈비가 와도 간댜..."


"애덜은 그날 예배를 빼먹으먼 아침밥을 안준다잖어...."


나의 시댁의 증조부님이 공주 장터에서 미국 선교사님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된 이야기를 각색하여 글로 옮겨 보았다.  


그야말로 한 집안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선교사가 집에 찾아와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영접 기도를 한 이후부터는 제사를 없애고,

처음 공주에서 선교를 시작한 맥길 선교사에 의해 1903년 세워진 공주읍 감리 교회에 애어른 할 것 없이 매일같이 새벽 예배부터, 평일 예배, 주일 예배를 다니셨다.

첫 믿음의 시초인 시증조부님은 물론, 시할아버지, 시아버님까지 모두  교회의 장로님이 되었고, 각각의 형제, 누이들까지 장로와 권사가 되었으며 그 아랫 세대까지 목사, 장로, 권사를 수없이 배출하며 선교사님이 예배를 드리러 왔던 그 집은 교회가  것이다.


남편 또한 매일 듣고 것이 그렇다보니 어린날 소꼽놀이 보다는 이집사, 김집사 하며 구역 예배를 다니고 집회하는 놀이를 했다니 말이다.

남편 말에 의하면 명절날 각지에 흩어진 친척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숫자가 98명쯤 되었다고 하니 그 친척들만 합쳐도 작은 개척교회 하나를 능가하는 숫자다.



공주시 중학동에는 선교사들이 포교 활동을 하며 머물던 선교사 가옥이 있다.

공주 지역 최초의 서양식 주거용 건축물이며 등록문화재 제2333호로 지정된 이곳은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처음 시작한 맥길 선교사 후임으로 1905년 부임해 온 샤프 선교사의 설계대로 1921년 10월, 중국인 목수가 시공한 주거 시설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로 지어진 건물이다.

샤프 선교사는 일 년 남짓 논산과 강경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1906년 3월 5일 발진디프스 감염으로 순교하였고, 그 후 테일러 선교사가 1916년부터 1925년까지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동상은 201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선교사 가옥 입구에 있다. 왼쪽은 유관순이고 그 옆으로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부인인 앨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이다.


선교사들이 머물던 선교사 가옥으로 공주 최초의 서양식 주거 건물이다.

선교사들은 포교를 하는데만 그 목적을 두지는 않았다. 샤프선교사의 아내인 애리시 선교사는 교육자로 활동하며 충청도 최초의 여학교인 명선 여학당과 명설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로 불리며 2020년 3월 공주의 역사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샤프 선교사님의 죽음으로 사애리시 선교사도 귀국하게 되면서 학교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윌리엄스(한국 이름 우리암) 선교사가 영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암 선교사는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되며 학교도 폐교를 당했으나 인도로 파송되어 영국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는 한국광복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통역관으로도 일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우리나라로 돌아와 교육과 농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영명학교를 다시 재개하였기에 2022년 8월 공주역사 인물로 선정되었다.

공주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광복, 흥복, 규복 중 장남인 우광복은 대한민국의 광복을 염원하여 지은 이름이라 하는데 그 또한 광복 후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미군청정 하지 중장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한미동맹과 정부수립에 기여했다고 하니 공주라는 도시가 개신교와 근대 교육의 근간을 이룬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도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시증조부님이 이 중 어떤 선교사님을 공주 시장에서 만나게 되었고, 믿음을 받아들여 집으로 찾아와서까지 예배를 집도하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선교 가옥에  있던 공주읍교회를 1930년 시내 중심부로 이전하였으나 1955년 폭격으로 파괴되어 재건하였다. 공주제일감리교회이며 지금은 공주기독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연히 장터에 가서 보았던 외국인 선교사의 입술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된 그날부터  지난날 우리의 조상들이 믿고 따랐던 신앙은 그저 순수했고, 열정적이었으며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것이었지만 세대가 거듭하며 그 순수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이전엔 아무리 어렵고 힘들 때라도 오직 신앙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것에 위로받을 것이 얼마나 많아 보이는가...

당장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감각적인 세계가 얼마나 즐비한가....

비록 그것이 허울뿐인 허상이라 할지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줄 만한 데 쉽게 이끌리는 세대가 되어 가는 것만은 사실이지 않은가....

나 또한 그렇고 말이다.

우리 아이들까지 5대째 지켜지고 있는 믿음이 잘못하다 남편과 나로 인해 끓어지지는 않을지 때로는 조바심이 날 때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설날이 되어 항상 그렇듯 우리 가족이 모여 이제는 정신이 깜빡깜빡 하시는 아버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모습에 다음 차례인 우리 부부가 가문의 명맥을 잘 지어갈 수 있을지....

여러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구전이 되어가는 지난날 우리 선조의 역사적 사건을  잘 보존하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모자란 글솜씨를 빌어 기록 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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