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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Feb 05. 2024

원치 않는 동거

점점 더 숨통을 조여 오는 듯하다.

이젠 작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그것과의 힘겨운 싸움을 겨우 이겨내고 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기척도 없던 그 녀석이 방금 전부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에 쫓기며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나는 더욱 속도를 높여 걸으면서도 나를 구해 줄 장소가 있는지 빠른 눈으로 훑으며 걷고 있다.

그러나 어딜 둘러보아도 나를 도와줄 곳은 없는 듯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눈앞에 파출소가 보인다.


'그래... 저곳이야... 저곳이라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거야.

내가 수치스럽지 않게, 내가 더 고통스럽지 않게....

숨조차 쉴 수 없는 이 절망 속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곳은 저곳뿐이야...'


나는 잠시라도 그 녀석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온몸의 촉수 하나하나까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점점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차려가며 내 몸속의 모든 감각기관을 곧추세운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돼....'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곧장 문을 열고 마치 뭔가가 빠른 속도로 던져지듯 들어가 가쁜 숨을 헐떡인다.

얼굴에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하얗게 질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앳된 아가씨를 모든 경찰들이 발딱 일어서서 주시하고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 헉헉헉.... 제가 지금...."


"네, 말씀하세요. 혹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중인가요?"


"저... 죄송한데 지금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네???!!!!"


"제가 지금 너무 급해서 그러는데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지금 너무 급해요..."


"아.... 예... 예.... 이 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습...... 니다......"


내가 살이 찌고 나서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얘기이겠지만 나도 한 때는 길을 지나면 '한 번 만나 줄 수 있냐, 전화번호를 알고 싶다'며 뭍남성들이 따라오던 시절이 존재했었다. 분명히.. 있었다...

그런 젊고,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아가씨가 경찰서에 무작정 뛰쳐 들어가 급똥이 마렵다며 화장실을 찾으리라고는 좀처럼 생각지 못한 눈치다.


급한 일을 해결하고 나올 땐 한결 여유로운 얼굴로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맙습니다~~!!"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그들의 눈길을 머리 뒤꼭지로 느끼며 그곳을 빠져나간다.

정신이 들고 나면 좀 창피해지기 때문에 더욱 당당한 척 연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따져보자면 뭔가에 쫓기고 있냐는 말이 꼭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다.  


어느 날엔 방학을 틈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때였다.

백화점 판매 일을 맡은지라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 약간 굽이 있는 검은색 구두와 머리를 한가닥으로 가지런히 넘겨, 검은색 큰 망사 리본핀으로 고정한 채, 세상 조신하게 꾸미고 버스를 탔다.

하아... 그런데 이게 또 찾아온다...

또 정신이 혼미해지고 땀이 흘러 이마에 살짝 내려온 잔머리카락이 피부에 쩍쩍 달라붙었다.

이러다 버스 안에서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던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내가 원치 않는 목적지에서 내려야만 했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안개 낀 이른 아침, 거의 상가 문이 닫혀 있어 여기서 낭패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며 조금 더 걸어가자 미닫이문 형식의 오래된 미용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뭘 더 따지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기에 다급하게 문을 열자 첫 손님인 줄 알고 반가워하던 미용실 사장님께서는


"어서 오세요..."


세상 밝은 목소리로 첫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저.... 죄송한데 제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이른 아침, 첫 손님을 받기도 전에 이게 웬 재수 없는 방문인가 싶었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던 사장님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지금 대수인가...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더 큰 사태를 맞이할 수 있었기에...


"제가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그러는데 좀 안될까요?"


더욱 비굴한 모습으로 몸을 굽신거린다.


"아유~ 바깥에 돌아가면 화장실 있어요. 열쇠는 이거 가지고 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사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쇠를 건네주는데 별대꾸도 없다.

다시 목적지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칫, 좀 친절하게 대해주면 안 되나? 내가 구걸을 하러 간 것도 아니고... 역시 사람은 그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감할 줄 모른다니까.... 쳇!!'


주변에 문 연 곳도 없어 음료수라도 살 곳이 없었고, 아르바이트 시간도 늦을 것 같아 사례를 못 한 데 대한 죄송함도 있고, 다시 얼굴을 비치며 인사할 용기도 없는 숫기 없던 아가씨 시절이었다.


그렇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 몇 분이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원치 않은 동거를 하며 살고 있으며 이 병증이 발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던 애송이 시절 있었던 일들이다.

음... 이것이 어떤 증상을 가졌는지 궁금해할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것이 어떤 병인지 네이버 선생님을 통해 한 번 알아보자....


-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과민 대장 증후군'으로 병명이 바뀌었으며 관련 신체 기관은 대장이다.

진료과는 소화기내과, 가정의학과, 소아청소년과에서 다루고 있으며 기질적 이상 없이 만성적인 복통 또는 복부 불편감, 배변 장애를 동반하는 기능성 장 질환이다.  

전형적인 증상으로는 복통과 배변 습관의 변화를 들 수 있는데 복통이 심하더라도 배변 후에는 호전되는 특징을 보인다.

점액질 변, 복부팽만이나 잦은 트림, 방귀, 전신 피로, 두통, 불면, 어깨 결림 등의 증상도 나타나지만, 이러한 증상이 수개월 또는 수년간 계속되더라도 몸 상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이것의 특징이다-


스무 살이 조금 지나며 생기기 시작한 이 증상은 아무 일 없다가도 길을 걷다가 또는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학교 가는 길, 첫 아르바이트 가는 길, 다이소에서 쇼핑을 하다가도, 갑자기, 불쑥, 예고도 없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지하철의 평균 속도가 60~100km이라는데 설사의 최대 속도는 70km라고 한다. 십이지장, 소장, 대장의 길이를 거쳐 바깥으로 배출되는 속도는 대략 0.44 초라니...

그 어마어마한 속도의 것이 내 장기의 대부분을 훑고 폭풍처럼 나오려는 것을 막는 데는 엄청난 정신적, 물리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더 선호하고, 고속버스보다는 기차를 더 좋아한다.

사람들이 일렬로 주욱 앉아야 하는 교회, 극장에서는 가운데 자리보다는 언제나 움직이기 쉬운 끝자리를 선호한다.

앉아 있는 그 사람의 허벅지 위에 금방이라도 어떤 일을 벌일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일이 양해를 구하며 나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가는 장소의 어느 빌딩이 화장실 시설이 잘 되어 있는지, 비밀번호나 열쇠가 없어도 되는지, 화장지가 구비되어 있는 곳인지 없는 곳인지 줄줄이 꿰고 있다.

어느 곳은 화장실 문이 열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면 야박하게도 화장지가 하나도 없는 곳도 있다.

내가 화장지를 미처 준비해 놓지 않았을 땐 근처 편의점이나 다이소에 한 번 더 들러 내 몸속의 그것과 사투를 벌여야 하기에 그것 또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러한 까닭에 주로 지하철 노선이 있는 쪽을 따라 걷기를 좋아한다.

한 번의 큰 고비만 넘기면 또다시 나를 괴롭히는 일은 아주 많이는 없기에 거사를 치른 후엔 공원 길도 걷고, 천변을 걸을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일명 급똥의 명약이라 불리는 일본 제품의 스토파라는 약이 있는데 나는 아직 이것을 사용해 본 적은 없고, 간간히 이것을 사용한 사람들에 의하면 20분~1시간의 지속 효과가 있다는 후기를 보았다.

정식 수입이 되지 않아 직구로 구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효과가 괜찮은가 보다.

그러나 자주 복용 한다면 자율신경계에 문제가 생기므로 너무 잦은 복용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또 급똥을 참는 여러 혈자리가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새끼손가락 아래쪽에서 손목 밑으로 약 9cm 부분을 5초 정도 눌렀다 뗐다 10-15회 정도 반복해서 눌러주는 장문혈, 주먹을 쥐었을 때 주름이 생기는 새끼손가락 옆에 가장 큰 주름이 생기는 곳을 누르며 심호흡을 해 주면 된다는 후계혈, 엄지와 검지 사이의 완만한 곡선을 지압해 주는 합곡혈, 검지 손가락 옆 부분의 상양혈 등이 존재한다.

또 출근 시 지하철에서 신호가 왔을 때 빠른 대처가 가능하도록 화장실이 개찰구 안쪽에 있는 역을 각 노선별로 잘 정리해 둔 정보도 있는데 동그라미 친 부분이 개찰구 안쪽에 화장실이 있는 역이라면 반대로 개찰구 밖에 화장실이 있는 역도 중요하다.

예전에 신정역 주변을 걷다 급한 신호가 왔는데 안타깝게도 화장실이 개찰구 안쪽에 위치해 있어 지하철 요금을 지불하고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 해결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조금이나마 터득한 방법은, 변비가 오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외출 전 아침마다 찐쾌변에 성공하는 것이 관건이다.

급똥으로 인해 오늘 하루 내 인생에 난처한 일이 생긴다던지, 자존감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던지 하는 곤란함이 없으려면 아침에 일어나 외출하기 전까지 정말 시원한 볼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산균의 먹이로 알려진 프로바이오틱스나 프리바이오틱스 등이 함유된 건강 보조제 또는 미역, 다시마 등의 해초류를 평소에 자주 섭취 하여 아침에 쾌변을 할 수 있는 장 속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걷기가 정말 중요했다.

언젠가 하루 이만보씩을 걸으며 13킬로의 체중을 감량한 적이 있었는데(물론 유지는 못 하고 있다) 이게 걷기 시작해야 신호가 오기 때문에 중간중간 화장실이 있는 장소를 잘 체크하고 걸어야 한다.

다른 근력 운동보다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걷기가 가장 효과가 있었다.

웬만하면 피치 못할 때와 장소에서 난리를 만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쩔 수 없는 이 녀석과의 동거가 불가피하다면 잘 어르고 달래서 순응하며 살아야겠지..

약도 없고 치료법도 없다면 불평만 하지 말고 잘 지내봐야지 않겠나...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우님들은 각자 어떤 방법으로 이 무례하고 제 멋대로인 이것으로부터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시는지...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직 길바닥에서 큰 일을 치르지 않았다는 게 더 없는 축복이다.



언젠가 나의 황당한 방문을 받게 될지도 모를 업주님과 관공서 직원분들...

곤경에 처한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친절을 베풀어 주셔서 제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게 하신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미리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나는 쾌적하고, 안락한 개방 화장실을 하이에나처럼 찾아내며 이 아이와의 동거가 불편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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