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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Aug 09. 2024

세 개의 발자국을 남기는 흰지팡이

인류가 지금껏 살아오며 수없이 많은 기념일이 만들어져 왔다.

우리를 잊지말아 달라며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기 위해  생겨 수많은 날들 중 시각장애인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는 대표적인 날이 바로 '흰 지팡이날'이다.

단순히 그 존재를 기억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적인 관심과 배려를 이끌어내기 위해 198010월 15일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WBU: World Blind Union)에 의해 선포된 날이다. 


'흰 지팡이....'

170~200g의 이 작고 가녀린 지팡이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왔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고대부터 시각장애인은 존재했을 것이고, 가장 손쉬운 보조 도구가 나무막대였을 테니 자연 그대로의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워서든 도구로 나무를 깎아서든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는 도구로 삼고 살아왔을 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맹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지팡이에 눈에 잘 띄는 흰색을 칠해 사용하도록 것이 오늘날 흰지팡이의 시초이다.

그것이 영국으로 건너가며 캐나다로까지 전해지게 되는데 1931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국제 라이온스 대회를 통해 지금까지 이용하고 있는 흰 지팡의 규격 기준이 발표 되었다. 

그러나 아직 세계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던 흰지팡이가 널리 알려진 것은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6년, 미국의 벨리포지 육군병원의 안과의사 후버 박사에 의해서다. 

이때 피오리아시에서 개최된 라이온스 클럽에서는 '피오리아시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흰 지팡이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흰 지팡이 사용 기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시각장애인 보행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고, '시각장애인 보행훈련사 교양강좌'가 설치되는 등의 진일보된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시각장애인의 기본 권리와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등의 국가적 차원으로서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사회적 관심이 발전하여 1980년 10월 15일을 '흰 지팡이의 날'로 제정하고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때 함께 선포된 '흰 지팡이의 헌장'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흰 지팡이의 헌장-


흰 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이 길을 찾고 활동하는데 가장 적합한 도구이며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를 나타내는 전 세계적으로 공인된 상징입니다.


흰 지팡이는 장애물의 위치와 지형의 변화를 알려주는 도구로 어떠한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도 시각장애인이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는 도구입니다.


누구든 흰 지팡이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흰 지팡이를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날 때에 운전자는 주의해야 하며 보행자는 길을 비켜주거나 도움을 청해 오면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힌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또 하나의 표시인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국민은 10월 15일을 흰 지팡이 기념일로 제정하여 매년 시각장애인의 권익옹호와 복지증진의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를 개회해야 합니다. 특히 시각장애인 시설과 단체는 흰 지팡이날에 즈음하여 운전자와 보행자가 시각장애인을 보호할 수 있는 인식 계몽의 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흰 지팡이가 상징하는 의미를 정확히 인식해야 하며 시각장애인의 신체를 보호하고 심리적 안정을 위하여 제반조치를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헌장에서 강조하듯 '흰 지팡이'는 동정, 무능의 시선이 아닌 자립과 성취의 상징으로서 시각장애인이 사회적 보호와 안전보장, 자립할 수 있도록 나라와 개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나라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며 눈이 멀어버린 부상자들이 늘게 되고 그에 따라 보조도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라에서 흰 지팡이에 대한 체계적인 규정과 법률이 제정되기까지는 1972년에 발표된 도로교통법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도로교통법 11조 (2)에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보행할 때는 흰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도록 규정한다.

동법 49조 (1)에서는 모든 차의 운전자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 흰 지팡이를 가지고 걸을 때는 일시정지하거나 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일반 지체장애인과 노인이 사용하는 지팡이는 흰색을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흰 지팡이는 손잡이(grip), 자루(shaft), 바닥(tip)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접이식 지팡이와 안테나식 지팡이로 나뉘는데 접이식은 105~135cm의 길이로 제작되며 3단~5단의 마디로 접히게 된다.

안테나형은 길이 108~145cm이며 7단과 9단, 두 종류가 있고, 성인용 흰 지팡이의 무게는 170~200g으로 제작한다.

캐나다 국제 라이온스클럽대회에서 표준화 기준으로 설정된 흰 지팡이의 규격은 무게 170g, 지름 1.27cm, 길이 117cm로 규정하였으나 각 나라 사람의 체형과 신장에 맞게 길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발전되었다.

흰 지팡이는 오랜 보행에도 잡기 편하고 피로를 느끼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야 하기에 손잡이 부분은 약간의 탄성이 있는 피복으로 감싸여져 있다. 특히 여기저기 부딪히고 찍히는 등 외부충격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기에 오랜 사용으로도 쉽게 변질되지 않는 튼튼한 내구성은 물론이며 팁과 자루를 통해 장애물을 탐지하고 지면의 상태를 알아내기 때문에 소리와 진동이 잘 전달되는 재질이어야 한다.

한때는 자루와 팁에 센서가 내장되어 장애물의 유무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는 제품이 나왔고 남편도 그것을 이용해 본 적이 있다는데 넓은 대로가 아닌 좁은 길, 노점상과 자동차가 뒤섞인 길에서는 한 발짝 옮길 때마다 '삑삑'대는 바람에 결국 센서를 꺼 놓고 사용하게 되어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한다.

흰 지팡이를 고를 때는 개인의 체격과 보폭이나 보행 속도에 맞게 선택하는데 일반적으로 명치와 가슴 높이의 길이가 적당하다고 하며  팔꿈치보다 낮은 것은 계단을 내려갈 때 불편함이 많아 사용이 어렵다고 하지만 남편은 팔꿈치 아래, 또는 배꼽 위치에 오는 지팡이를 이용하고 선호한다.

나이가 더 들어 자신의 반사신경과 운동 감각이 둔해지면 어쩔 수 없이 긴 지팡이를 사용하겠지만 지팡이가 길어질수록 거추장스러워 들고 다니기가 힘들단다.

지팡이의 팁은 아래의 사진처럼 각자가 선호하는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장착할 수도 있지만 남편은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싫어서 소리가 크게 들리는 금속성 재질의 팁이 아닌 본연의 것을 이용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이 기존의 지팡이를 그대로 이용한다.

남편이 맹학교에 입학했을 1970년대 후반엔 학교 내에 지팡이가 비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개의 지팡이가 전부였고 그나마도 접히는 기능이 없는 옛날식 지팡이만 존재했다는데 80년대 중반쯤 되어서야 전교생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되었다고 했다.

지팡이를 이용한 보행 수업을 처음 들은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는데 이론 수업을 마친 후, 실습 시간엔 학교에서 나누어준 지팡이를 들고 선생님과 함께 외부에 나갔다 오는 을 시작으로 다음 단계는 한 두명의 저시력 학생이 포함된 여러 그룹이 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학교로 되돌아오는 실습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각자 지팡이를 들고 정해진 곳을 방문하고 돌아오게 되는데 그러나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학생 대부분은 이미 지팡이 없이 학교 주변이고 어디고 안 다녀본 데가 없었으니 막상 지팡이를 이용한 수업에서는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더란다.

접이식 케인은 지팡이 내부에 탄성이 있는 줄을 넣어 지팡이가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며 접힐 때도 따다닥 소리를 내며 한 번에 접힌다.
우리 집과 사무실에 여러 개의 지팡이가 구비되어 있는데 갈색 손잡이의 것이 남편이 최근 이용하는 지팡이다.
앞에 두 개의 지팡이는 안테나형인데 첫 번째 것은 7단이지만 더 길고, 두 번째 것은 9단이지만 더 짧다. 남편은 짧은 것을 선호한다.

남편은 사진에서 보는 세 번째 접이식 케인을 몇 년 전까지 주욱 사용해 왔으나 안테나형에 비해 얇은 데다 마디가 접히는 형식이다 보니 자칫 차량이나 낮은 천장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위로 들어올리게 되면 휘거나 파손이 된다며 요즘은 굵고 탄탄한 안테나형 케인을 이용한다.

케인 이용 방법은 아래 사진처럼 자루(손잡이)에 검지 손가락을 길게 뻗은 뒤,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가볍게 감싸 쥐고 왼발이 나갈 때 지팡이는 오른쪽, 오른발이 나갈 때 지팡이는 왼쪽으로 엇갈려 짚으며 사물과 사람, 보도의 지형지물 상태를 확인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중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슈퍼 감각을 지닌 자타칭 슈퍼맹인인 남편은 아주 짧은 지팡이를 아래 사진처럼 껄렁껄렁 대충 잡고 보행한다.


정안인 대부분은 전혀 알 수 없겠지만 이렇듯 매년 10월 15일이면 각 지방의 도처에서 '흰지팡이의 날' 행사가 크게 열린다.

특히 서울지역엔 가장 많은 시각장애인이 거주하고 있기에 대체로 '서울숲 공원'에 수천, 수백 명의 시각장애인이 모이게 되는데 때마다 심청이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 있는 장님들을 모두 모아 잔치를 벌였다는 구절이 생각나며 그때쯤 모인 맹인 수가 이 정도가 됐었으려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날은 상금과 상품이 걸린 시각장애인 스포츠, 게임, 노래자랑을 비롯해 참가자들에게 제공하는 선물과 행운권 추첨을 통한 값진 경품이 준비되어 는데 이 날 만큼그야말로 남의 눈치를 안 봐도 되는 맹인들만을 위한 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남편은 뽑기 운이라고는 없어서 큰 경품을 타 본 적이 없지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보조공학기기를 타 가는 사람들을 보며 모두가 부러운 탄성을 지른다.

이 날은 도시락과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크고 작은 업체들의 고마운 후원금과 물품이 가득한데 특히 금호석유화학은 2008년부터 16년 동안 2만 개 이상의 안테나형 접이식 흰 지팡이를 무료로 후원하고 있으며 점자블록과 점자판에 이르기까지 기증 물품이 약 3만 개에 달한다.

작년 흰 지팡이의 날도 1390개의 케인을 후원한 바 있다. 그러니 우리 집에도 금호석유화학 글씨가 새겨진 지팡이가 몇 개씩 있어 따로 지팡이를 구매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많은 맹인이 한 장소에 모였어도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면 바로 옆에 오랜만에 만나게 된 죽마고우가 있어도 서로 반가운 인사조차 할 수 없는 서글픈 사람들이기에 나는 남편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시각장애인 사진과 이름을 내 스마트 폰에 저장할 수  있도록 명단을 달라 했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해놔야 남편에게  누구 아느냐 이름을 물어보고 사진과 같은 이에게 이끌고 가 서로 악수라도 시켜 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제 소리를 마음껏 낼 수 없기에 밟으면 밟히고, 때리면 맞아야 하는 '약자'라는 이름의 삶을 사는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흰 지팡이의 날'....

이 글을 통해 이런 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몇몇이라도 더 생겨났으면 하는 바램으로 소개해 본다.

위 사진은 남편이 몇 년 전까지 수족처럼 들고 다녔던 지팡이의 아랫부분이다.

한치도 보이지 않는 자가 갖가지 비난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살아내기 위해 종횡무진 홀로 걸었던 흔적이다.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어느 가장과도 같은 처절함이다.

생채기 나고 파손된 사진 속 지팡이의 바닥처럼 남편의 가슴속에도 어쩌면 저런 상처가 여러 곳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10월 15일 '흰 지팡이의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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