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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Aug 23. 2024

길 위의 길

길 위에 길이 있다.

다정한 연인이 손 잡고 걷는 길, 아이와 함께 공원에 가는 길, 출근길을 서두르며 바삐 걷는 길, 지친 퇴근길 쉼을 얻기 위해 집으로 가는 길.....

수없는 세월동안 매일 걸어온 그 길 위엔 또 다른 길이 있다.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적나라게 드러내는 노란색 그 길...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채 제 갈길 가기 바쁘지만 알고보면....

길 위에 길이 있다.


도시의 길을 걷다보면 빤히 보인다.

노란색 점자 유도블록이....

점자 유도블록이란 시각장애인이 발바닥을 통한 촉지보행 또는 흰 지팡이를 통해 느껴질 수 있도록 돌출형으로 만들어진 입체형 노란색 블록이며 주로 인도와 건물 내부에 설치되어 있다.

점자블록의 시초는 1967년 일본 오카야마 시내에서 여관업을 하던 '미야케 세이이치'에 의해서다.

친구인 이와하시 에이코우가 실명되자 오카야마현 맹인협회 회장을 수차례 찾아가 설득하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오카야마현 타치키오카산 맹아학교 부근 횡단보도, 그와 가까운 국도 2호 주변 교차로에 230매가 설치된 것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일본에서는 3월 18일을  점자블록의 날로 지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 9월 개관한국시각장애인복지회회관에서 최초로 점형블록이 설치되었는데 이후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설치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점자 블록은 직선이동, 방향전환, 목적지 발견의 3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어 설치되는데 크게 점자 블록인 점형 블록과 유도블록인 선형블록으로 구분한다.

점형 블록은 보행분기점, 대기점, 시발점과 종료지점 등의 위치를 표시하며 그 밖에 위험지역을 경고할 때 설치 되는데 주로 장애인용 승강기, 화장실, 횡단보도, 지하도, 선형블록이 시작, 교차, 굴절되는 지점, 육교와 계단의 시작과 끝지점의 30cm 전면(보행 시 적절한 폭)에 설치하여 발바닥과 흰 지팡이로 감지할 수 있도록 한다.

30cm×30cm의 규격판에 지름 3.5cm, 높이 0.6cm, 1.5cm의 간격으로 된  36개의 원뿔돌출구가 박혀있다.

위에 언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블록 설치 공간인 시각장애인복지회회관도 현관입구, 화장실과 사무실 입구에 점형블록만을 설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선형블록은 유도표시용으로 30cm×30cm의 같은 규격에 폭 3.5cm, 높이 0.5cm의 길쭉한 원뿔절단형 직선을 네 줄로 나란히 제작한다.

보행로의 시작, 교차, 굴절되는 지점에서 목적지로 향하는 방향으로 설치하기에 그 길을 주욱 따라가면 주요 목적지가 나오고 점형 블록으로 그 시작과 끝을 알린다.


그렇다면 색상은 왜 노란색일까?

보통시각장애인이라면 한 치 앞도 못 보는 나의 남편과 같은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시각장애인의 범주는 그 보다 훨씬 넓다.

오히려 전맹의 비율은 12%를 밑돌고 있으며 저시력 장애인의 수가 훨씬 많은데 그 기준은 안경, 렌즈, 약물치료나 수술적 치료에도 최종 교정시력이 0.2 이하 또는 시야가 30도 이내인 이들을 말한다.

저시력인들도 천차만별이어서 전방 30cm밖에 볼 수 없거나, 흐릿하게 보이거나, 명확하지만 밥공기 정도의 지름만 보이거나 색상과 형체만 보이거나 정말 정말 다양한 저시력인들이 있다.

그중 노란색이 파장이 길고, 주목도가 높아서 인도의 색상과 확연히 대비되는 노란색을 점자블록으로 규정한다. 시야가 좁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저시력인들이 그나마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색상인 것이다.

국토교통부의 '도로안전시설 설치 및 관리 지침'에도 점자 블록의 색상은 황색을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물론 아직도 버스터미널이나 공항 등은 은색 스테인리스 점자 블록이 설치된 곳이 많다.  

그러나 스테인레스 특성상 자칫 미끄러지기 쉽고 빛에 반사가 되어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이유 때문에 모두 황색으로 교체 설치 되어야 한다.


그럼 유도블록은 어떤 재질로 만들어질까....

고무: 부착식으로 사용되어 시공이 간편하고 가격이 저렴하지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 뒤틀리는 등 모양의 변형이 있으므로 실내에 시공하는 것이 좋다.

고무+아연: 겉은 고무재질이지만 중간은 아연이며 피스를 이용해 고정하여 매우 견고하지만 고무에 비해 가격이 더 높다.

스텐+고무: 과거에 많이 사용하던 재질이다. 시공이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은색의 스탠 재질이 빛에 반사되어 저시력인의 시야를 해치거나 안전사고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아 최근에는 사용되지 않는 편이다.

ABS합성수지: 플라스틱재질로 제작되고 반매립식이지만 충격에 쉽게 깨질 수 있다.

자기질: 두께가 15T, 18T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표면이 매끈하여 미관상 보기가 좋지만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콘크리트: 두께는 30T, 60T 두 가지가 있는데 두꺼운 만큼 튼튼하며 3분의 1의 깊이로 매립하여 외부의 충격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주로 도로옆 인도 위에 많이 시공되며 학교, 관공서에서도 많이 이용하는 재질이다. 그만큼 시공비도 고가이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지대한 역할을 하는 이 유도블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용도에 맞지 않게 설치된 사례도 많고, 파손 된 채 그대로이거나 느닷없이 중간에 길이 끊겨버리는 황당한 경우도 보게 된다.

내가 살던 동네의 지하철역 안내 블록이 그랬었는데 설치하다 돈이 부족했던 건지 하기가 싫었던 건지 10여 미터쯤 되는 거리 앞에서 길을 안내하다 말고 설치가 멈춰져 있다.

이쯤 알려줬으니 알아서 가라는 얘긴가보다.

사진처럼 변색이 되며 색상 구별이 어려워지게 되었거나 중간에 푹 파이고 파손된 길이 있지만 오래도록 방치되는 경우도 많다.  

매해마다 예산이 남는다 하여 멀쩡한 아스팔트를 뒤집고 엎어 새로 시설하는 경우도 꽤 있던데 유도블록 보수도 신경 써 준다면 좋겠다.

요즘은 전체 색상을 노란색으로 제작하여 파손 되어도 색상의 변질은 잘 일어나지 않는 제품도 많이 나온다.

위 사진은 잘못 설치된 유도블록의 예이다. 점형 블록으로 스크린도어 앞에 설치하여 사고는 막을 수 있지만 어디에 출입문이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제대로 된 유도블록 설치는 아래 사진과 같다.

그리고 요즘 여기저기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거리의 무법자 킥보드가 역시나 유도블록 안에 무단주차 되어있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길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유도블록만큼은 확보해 주면 좋겠지만 유도블록에 대한 의미나 중요성 또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이런 일이 생긴다.

더군다나 실제 어떤 건물이나 길 위에 설치된 점형 블록을 미관상의 이유로 바닥과 같은 색상으로 덧칠한다던지 검은색으로 칠하는 상황도 종종 발생하는데 유도블록의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다.

 

나 또한 예전엔 유도블록에 대해 별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었다.

남편과 연애를 하며 헤어지던 어느 날 지하철까지 바래다주며 개찰구 앞에서 혼자 잘 갈 수 있겠느냐 물으니 지팡이를 주르륵 펼쳐들며 유도블록을 따라가면 된다고 걱정 말라고 했었다.

그제야 유도블록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팡이를 이리저리 엇갈려 탁탁 짚어가는 것이 맞지만 유도블록 길을 따라 갈때는 양옆으로 왔다갔다하며 주룩주룩 훑거나 주우욱 밀면서 보행하며 점형인지 선형인지 구별하는 경우도 많다.

그 이후엔 혼자 걸을 때도 그 길을 괜히 걸어보기도 한다.

시각장애인이라고 모두 다, 계속 유도블록만을 밟고 가지는 않지만 유도블록만 밟고 걷다 보면 돌출형이라 발바닥이 금방 피곤해지곤 한다.

그래도 어쩔수 없는 자신의 숙명이라 여기며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위급한 상황일 때나 혼자 단독보행을 할 때면 꼭 필요한 기능 중 하나인 것이다.


세상은 내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매일 걸었어도 별생각 없던 노란색 그 길을 이제는 한 번쯤 자세히 살펴보며 걷는 어느 날도 그리 나쁘지 않을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채 걷는 그 길 위에 나도 길이라며 외치는 노란색 길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노란색 길이 다정한 연인과 함께 걷는 길, 아이와 함께 공원에 가는 길, 출근길을 서두르며 바삐 걷는 길, 지친 퇴근길 쉼을 얻기 위해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길이 있었다.

오래전 부터 내가 걷던 그 길 위에 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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