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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Mar 25. 2024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참 서글퍼...

한 달 전쯤 아버님을 모시고 치매안심 센터를 다녀왔고, 2차 검사까지 마친 후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아버님이 기억을 점점 잃어가던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약 1년 전부터 유독  옛이야기만 반복하시니 그저 연세가 드는 과정인 줄만 알았다.

그러던 몇 달 전 어느 날부턴가 자꾸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크게 달라진 생활패턴도 없었고, 알뜰하신 아버님이 돈 쓸만한 데가 딱히 없는데 갑자기 생활비가 부족하다 하신다.

어느 날 아버님댁에서 학교를 다니는 큰아들이 학교에 가기 전 자신의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 없더란다.

명절에 받은 세뱃돈이며 용돈까지 제법 많은 돈이 들어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어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내가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네가 내 돈을 훔쳐 간 것 같아서 니 지갑에서 다 가지고 왔다'라고 하셨다.


유순한 기질에 화도 없으신 분인 데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다 한들 손자의 지갑을 몰래 열어 돈을 몽땅 가져가실 분이 아닌데.......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토요일쯤 느닷없이 집에 오셔서 큰손주인 우리 큰아들이 내 돈을 몽땅 다 가져가서 내가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다며 내일이 주일인데 헌금이 없어 은행을 갔지만 저번주부터는 토요일엔 은행이 영업을 안 하는지 은행문이 닫혀 있다며 찾아오셨다.

큰아들이 아버님댁에 같이 있었다면 의심이라도 해 볼만 하지만 방학이어서 집에 와 있던 상황이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건 은행은 십수 년 전부터 주말엔 영업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에서야 알았다는 듯 말씀하신다.

게다가 cd기에서 돈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다.

누가 봐도 심각한 상황이다.

아버님이 쓰시는 가계부를 뒤적여 보니 혼자 계신 분이 한 달에 김치만 몇십만 원어치를 사셨단다.

사실 일리가 없다...

아무래도 헌금을 또 하고 또 하고 그러시나 보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아버님께 별말씀도 안 드리고 무작정 치매안심센터에 모시고 갔다.

아버님은 나이가 들면 통과의례로 받는 검사인줄 아셨는지 '아이고 너희들은 늙지 말어... 늙으니까 귀찮게 이런 검사도 받아야 되고...'라신다.

1차 검사 소견이 이상해서 2차 검사까지 마치고 검사자와 보호자 면담을 하는 중이었다.

검사자도 진행 상황이 의심스러웠던지 혹시 검사결과가 나올 때 의사 선생님과 면담 시 위치추적장치를 신청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버님의 모습이 계속 나타나는 걸 보면 언젠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러겠다고 했다.


아버님은 묵묵히 교회 일만 하셨던 분이다.

다른 이와 언쟁이 붙은 적도 없고, 미움을 산 일도 없는 그저 유순하신 분이었다.

8년 전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냈던 그때도 굳은 신앙으로 그 세월을 묵묵히 보내오시며 담담하게 살아오셨다.

7년 전쯤 우리 가정에 엄청난 고비가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감정과 상황, 현실과 비현실.... 그 어느 것도 정상적인 것이 없던 그때였다.

남편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무너지고 쓰러지며 그가 믿는 신을 향해서도 화풀이 대상이었던 나에게도 부모에게 대드는 사춘기 애들처럼 마구 울부짖었다.

자주 집에 들르시며 아들의 이상함을 감지하게 된 아버님이 나에게 넌지시 물어보셨다.

나는 아이들을 피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인적 드문 벤치로 모시고 갔다.

사실을 다 말씀드리면 걱정이 더 하실 것 같아 지금 아비가 많이 힘들다 했고, 아버님은 내 등을 쓸어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나도 모르게 가게로 찾아가 두툼한 봉투와 함께 간단히 쓴 메모를 함께 주고 가셨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남편은 읽어볼 수 없는 글이었지만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본인의 심정을 글로 옮기셨는가보다.

아버님이 체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남편에게 가득하기를 원하셨던 그야말로 사랑 많으신 우리 아버님...

남편에게 글을 읽어주며 울컥하여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내 지갑 속에 넣고 다니며 때때로 읽어보곤 한다.

그저 무슨 일에도 말없이 미소만 지으시던 분이 어쩌다.....

하고 많은 노병 중에 어쩌다 기억을 잃어가는 몹쓸 것이 찾아오는 걸까....

뒷짐을 지고 창밖을 내려다보던 아버님의 모습이 그리도 슬퍼 보였던 것은 이런 몹쓸 병이 찾아오는 중이어서 그랬던 걸까?

나도 저만치까지 다다르면 내 모습이 그다지도 외로워 보일까?


아버님의 노년을 보며 나 또한 나의 늙음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야 할까..

내가 설정한 방향대로 세월이 흘러가 주기는 할까...


그나저나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이 정도로 지내실 수만 있다면 그래도 다행일듯 한데....

어떤 처방이 내려질런지도 알 수 없다.

요즘은 약을 복용 하는 듯도 하던데 현대 의학의 힘을 믿어 볼 뿐이다.


아버님....

사는 모습이 아직은 많이 서투른 우리에게 오랫동안 건강한 모습으로 사랑을 가르쳐 주세요.

새벽마다 쌓으시는 당신의 기도가 허투르지 않다는 것 압니다.

그 날을 함께 많이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되었을 때....

아버님 소원대로 며느리 고생시키지 않고, 존엄한 모습으로 그렇게 천국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해처럼 밝은 모습 되어 또 그렇게 우리 가슴 속에 남아 계시기를 소망합니다.

항상 존경합니다.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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