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시절
7.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서울에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물었다.
“요즘도 피아노 치세요?”
안부 대신 피아노 치냐고 묻는 그녀는 마르타 아르헤르치를 좋아한다.
신혼 시절 남편은 카메라를 사고 그녀는 피아노를 샀다.
아르헤르치를 좋아하는 그녀는 아르헤르치처럼 아이가 많다.
많은 아이를 키우며 살다 보니 피아노는 악기가 아니라 가구가 되었다.
피아노가 없어진 거실을 볼 때면 나는 피아노와 그녀가 안쓰러웠다.
연주 안 하는 피아노와 연주할 여유가 없는 피아노 주인.
둘의 이별은 흔하지만 슬픈 멜로드라마다.
피아노를 치며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피아노가 있다고 되는 것도 피아노를 쳐야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초보자는 레슨까지 받아야 하는 부담도 있다.
인구 8만의 도시와 4만의 도시 사이에 낀 시골 마을에는 피아노 학원 자체가 없다.
여동생을 가르쳤던 피아노 선생님은 이제 주꾸미 식당사장님이 되셨다. 더는 가르칠 아이들이 없어서다.
피아노 치는 것을 계속하기로 정했으니 피아노 조율을 해야 했다.
“근디 피아노 누가 쳐유?”
조율사가 물었다.
“지유”
차로 1시간이나 걸려서 온 시골집의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중년 남자인 것이 낯설었나 보다.
“잘 쳐유?”
그의 질문이 지역에 안 맞게 직선적이다.
“레슨 할 거유? 내가 추천 좀 할려, 그류”
시골까지 조율하러 다니는 사람답게 시골 사정을 알아채는 재주도 있었나 보다.
피아노 선생을 소개해 주겠다고 나섰다.
감사하다.
방문 레슨이 가능한 사람이라서 더 감사했다.
하지만 소개받은 레슨은 단 1회로 끝이 났다.
늦은 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가 매주 드나드는 것이 불편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좋은 피아노 선생님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옆에서 직접 쳐 보이고, 시범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해요. 자꾸 불편해도 여기 좀 쳐주세요. 부탁해 봐요. 그러면 실력을 알 수 있어요. 칠 줄은 몰라도 들을 주는 알잖아요.”
피아노 요정이 알려준 감별법이었다.
충청도 사정을 모르는 요정이다.
“여기 좀 쳐 봐유.”
충청도에서 이것은 못 할 말이다.
너무 직접적인 말이다.
이 지역에서 이것은 결례도 큰 결례다.
부탁 안 해도 알아서 쳐주는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
소개받은 선생은 앉아서 말만 할 뿐 건반에는 손도 안 올리는 사람이었다.
“바빠유”
어렵게 구한 선생인데 쉽게 포기 못 하고 핑계를 댔다.
고민하느라 3주를 보내고 레슨을 포기했다.
다시 피아노 학원을 찾아 전화했다.
인구 4만의 도시에 클라라 피아노 교습소가 있었다.
차로 20분 거리였지만 다행히 성인반 레슨이 가능했다.
클라라 교습소 원장님은 내가 만난 유일한 필드 플레이어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배운 이후 처음으로 선생님의 공연에 초대받았다.
장소는 대전 예술의 전당 앙상블홀.
주제는 ‘쇼팽과 함께 나를 사랑한 시간’이었다.
열 분의 피아니스트가 열곡의 쇼팽 솔로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공연이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 정 가운데 있는 스타인웨이 앤 선즈 그랜드를 연주하는 피아노 선생님.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의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그려졌다.
어느 아마추어 피아노 도전기에서 우연히 피아노 선생으로 알프레드 브렌델을 만나 이야기가 나온다.
브렌델에게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이 부러웠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공연을 본 이후로 더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의 선생님이 브렌델이라면 나의 선생님은 클라라다.
충청도 사람답게 레슨 중에 조금만 버벅거려도 참지 못하는 클라라 선생님.
“이렇게. 이렇게. 봐요”
시범을 보인다.
“선생님 왜 표준어 써유?”
따지고 싶지만, 그럴 정신이 없다.
잠시 넋을 놓으면 틀리고 면박을 받는다.
오늘은 복수할 수 있다.
“여기 핑거링 틀려유. 왼손 안 유”
클라라는 꿈쩍하지 않는다.
“아니지. 여기까지 왼손. 여기는 오른손.”
다시 색연필로 그려준다.
그녀가 틀린 게 아니라 내가 틀린 것으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밭에서 일을 한다.
새싹이 볏짚을 뚫고 나오기 전에 지붕을 설치해야 한다.
나라를 태운 산불에 풀무질을 해대던 강풍이 여기도 분다.
겨우내 인삼 씨를 품었던 볏짚을 다 뒤집어 놓았다.
농부는 자연을 이길 수 없나 보다.
일이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뒷걸음친다.
뒤틀어진 일이 몸을 더 지치게 한다.
몸은 죽어나도 영혼은 살려 보려는 의지.
딱 한 장. 10분이라도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사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