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여행
캐나다에 오고 처음으로 3일 연휴를 맞이하면서 금요일 오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짐을 싸라고 한다.
이 저녁에 짐은 왜?
무작정 떠나는 거야.
뭐? 어디로?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지금 장난해? 아니 우리가 무슨 방랑자(放浪者)도 아니고 호텔이라도 잡아야지 어떻게 아무런 계획도 없이 길을 떠나냐구요.
나의 염려 가득한 말들은 아랑곳 않고 이미 마음을 정하고 뱉어낸 말이라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저녁을 먹고 대충 짐을 챙기고는 집을 나선다.
그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식해서 용감한 채로 어쩌면 험난할 수도 있는 낯선 여정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어둑어둑 해진 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만 바쁘게 움직일 뿐 고요하기만 하다.
차도 밥을 먹어야 움직일 테니 가다가 주유소에도 들러 기름도 넣고 가면서 입호강을 시켜줄 간식거리도 조금 집어든다.
하이웨이에 들어서니 드문 드문 서있는 가로등은 환하게 비치는 밝은 빛 때문에 동물들이 놀랄까 낮은 조명을 깔아 놓았는지 컴컴하기만 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커다란 나무들은 밤을 머금은 채 으슥 으슥하기만 하다.
주변이 깜깜하니 상향등을 켜야 겨우 앞이 보이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곰이라도 짠!~하고 나타나면 어쩌나?
가끔씩 길을 건너려고 지나가는 사슴 가족을 못 보고 그대로 달리면 어쩌지?
두려우니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가보는 여행(?)인데 기대감이나 행복함은커녕 걱정만 앞선다.
운전은 중간중간 바꿔가면서 하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절엔 내비게이션도 없던 때라 친절하게 방향을 알려주는 언니(?) 오빠(?)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달랑 넓은 종이 한 장에 그려진 지도 말고는 의지 할 게 아무것도 없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그걸 보면서 좌회전 우회전하면서 운전자에게 내비 대신 길 안내를 해 줘야 하는데 그림만 보고는 난 아무리 봐도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못한다.
남편이 운전하는 동안 몰려오는 졸음에 잠깐씩 깜빡깜빡 잠이 들었다 깨고 나면 끝없이 펼쳐지는 숲 속 산길에 무섭게 버티고 서 있던 키 높은 나무들이 어둠에 파묻힌 채 창가로 스쳐 지나간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여행제안에 잠도 못 자고 따라나서서 불편한 차 뒷좌석 시트 위에 커다란 키 잔뜩 쪼그려 뜨린 채 누워 잠들어 있는 아들은 무슨 죄야?
한국처럼 가다가 도로에 휴게소라도 있다면 배도 채우고 졸음도 쫓고 여행하는 맛도 날 텐데...
아무리 살려달라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찾아와 주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산속으로 우리를 실은 차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깜깜하기만 한 밤.
공포영화에 나오는 장면이 이와 다를까?
어쩌다 반대편 도로에서 한 대씩 보이는 자동차 불빛이 왜 이렇게 반가운지 저들의 동의도 없이 몰래 나 홀로 친구 삼아 안심하는 것도 잠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뒤로하고 밤새 달리고 또 달린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여명(黎明)의 빛이 환영인사로 눈가를 살짝 때려주니 그 빛에 함몰되어 저절로 얼굴까지 찡그려진다.
아직 도시에 닿지는 않았지만 험악한 산길은 벗어난 듯하다.
희미하게나마 날이 밝아 앞이 보이니 조금 낫다.
햇빛이 많은 여행하기 딱 좋은 날이 될 듯하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 남편이 안내자가 되어 Information Center가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Information Center는 우리 같은 초자 여행객들에게 그 도시의 이런저런 정보를 안내해 주는 곳이라 그곳엘 가면 우리가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 도움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가 보기로 한다.
겨우 도착한 그곳엔 이른 아침이라 직원들은 아직 출근전인지 굳게 문이 닫혀있다.
잠시 차에서 내려 쪼그라들었던 무릎을 펴고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둘러보다 바깥쪽에 있는 수도를 발견하고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른 세수와 양치를 마친다.
그때 마침 한 직원이 출근하면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너희 뭐 하니?" 하고 묻는다.
감쪽같이 하고 재빨리 증거인멸 했어야 했는데...
주인 없는 집에 맘대로 들어가 세수하다 들켜버린 사람들처럼 민망하고 어색한 웃음을 웃으며 "문이 닫혀 있어서.... 어쩌고 저쩌고..." 구차한 설명을 한다.
누가 보더라도 노숙(露宿)을 한듯한 불쌍한 몰골의 어린양들에게 다행히 친절을 베풀어 당장 문을 열어주니 화장실도 해결하고 이젠 대놓고 물을 받아다가 건물 밖에 있는 야외 벤치에서 당당하게 계란도 삶고 라면도 끓여 먹는다.
진수성찬은 아니어도 춥고 배고픔이 해결되니 살 것 같다.
멀쩡한 집 놔두고 와서 이게 무슨 고생이람...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떠나 시내로 들어가니 차들과 사람들이 조금씩 보인다.
차에서 쪽잠을 잔 터라 몸은 노곤하지만 그래도 낯선 도시에 온 만큼 그냥 갈 수는 없으니까 여기저기 다녀봐야 할 것 같아 남은 에너지 쥐어짜 내 방출하며 부지런히 움직여 본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식습관은 어쩔 수 없는지 밥은 한식당만 찾으러 다니고 보기엔 별 것도 아니지만 나름 그 도시의 명소라는 곳도 찾아가 피곤에 전 얼굴이지만 사진도 찍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다 되어간다.
M.T 를 가서 며칠씩 꼬박 밤샘을 해도 끄떡없던 젊은 시절과 달리 하루만 못 잤는데도 몸이 흐느적흐느적 늘어져버리니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는 바로 호텔을 찾아가 본다.
얼른 씻고 침대에 누워야지 하는 바램으로...
그런 단순한 바람조차 사치였나? 그 또한 우리 몫은 아닌가 보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3일 연휴를 그냥 치는 법이 없는 여행객들이 이미 다 차지해 버렸는지 방이 하나도 없단다.
그 사이 해님을 몰아내고 달님이 잠식해 버린 도시를 그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다른 곳 몇 군데를 더 찾아가 보았지만 같은 말만 할 뿐이다.
막연한 걱정이 현실이 되어버린 순간이다.
애초에 예약을 하고 떠났어야 했는데 안 했으니 누굴 원망할까?
괜히 시간 낭비만 한 듯하다.
더 지치기 전에 그만하기로 하고는 그대로 집으로 향한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떠날 때 보다 배로 힘이 든다.
구경하느라 많이 돌아다녀 지치기도 했겠지만 처음 길을 나설 때의 설레는 마음도 없어지고 낯선 곳에서의 전투적이었던 긴장감마저 풀리면서 쌓였던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일테다.
계획하고 떠난 여행도 그러한데 어떤 준비도 없이 무식하게 강행한 우리는 더욱이 힘이 빠진다.
뭣도 모르고 떠날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처음 와 본 길이 아니니 어떤 길이 펼쳐질지 잘 아니까 그 길을 다시 가야 한다는 사실이 떠나기 전부터 지레 지치게 한다.
더 많은 졸음과 싸워야 했고 같은 거리임에도 더 길게만 와닿는 길을 달려 아침이나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한다.
떠나보면 안다, 역시 집이 최고야!~
무박으로 아니 차박인가?
왕복 2000 km 이상을 달려 너무나 고단한 여행이었지만 평생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경험이긴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싫어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은 젊은 연인들이 가끔씩 떠나보는 무박여행은 낭만이 가득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겐 오히려 피곤하고 고생스러웠을 뿐이다.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추억을 논하고 싶지도 않고 또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본의는 아니었지만 젊은 시절에 해보지 못한 무박여행을 가족과 함께 그것도 캐나다에서 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아주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다시 해볼래? 하면 Never!!!
우리는 그 이후로 무박은 NO! NO!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제일 먼저 호텔부터 예약을 하고 동선체크를 잘해서 될 수 있으면 덜 피곤하게 움직이고 배고프면 더 빨리 지치니까 금강산도 식후경 식당도 좋은 곳으로 미리 알아보는 등 여행전반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없도록 계획을 잘 세운다.
이제는 더 이상 무대포로 떠나는 준비 없는 여행이 아닌 제대로 잘 짜여진 준비 있는 여행만 하기로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