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에세이 <삶을 대하는 나만의 방식> 제16화.
지난주 월요일 딸아이와 당일치기 정선 여행을 다녀왔다. 긴 추석 연휴에 하루 종일 전 부치고, 열흘 동안 삼시 세끼 해댄 것에 대한 보상으로 서로에게 준 선물이었다. 기왕 선물하는 김에 제대로 하자 싶어 출발부터 기분을 낼 수 있는 열차를 선택했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특별 열차 정선아리랑호에 몸을 실었다.
하늘창이 나있는 열차는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가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사방이 시원하게 보이는 열차 창으로 펼쳐지는 가을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오십을 넘게 살면서 가을 단풍 여행을 가 본 것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마지막 단풍 구경도 거의 이십 년 전 일인데다, 천장까지 높이 뚫린 열차를 타고 가며 보는 단풍이 곱게 물든 풍경은 장관이었다.
아우라지는 낙석 위험으로 보수 중이라 민둥산역이 임시 종착역이었다. 한창 열리고 있는 민둥산 억새 축제를 잠깐 보고 정선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춥고 위험하다는 주민분의 조언에 정선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 여행지는 정선 오일장이기도 했고, 맛있는 먹거리도 많고 재미난 구경이 될 거라는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민둥산 역에서 정선까지 가는 버스는 1시간 후에 떠난다고 해서, 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타고 오일장이 열리는 장소까지 갔다. 마침 아리랑 공연까지 더해져서, 먹거리에 볼거리까지 기대 이상이었다. 메밀전, 메밀전병은 말할 것도 없고 수리취떡, 메밀 강정, 고추 부각을 비롯해 어느 하나 별미가 아닌 음식이 없었다.
고사리, 취나물 같은 건나물도 너무 좋아 보여서 욕심껏 샀더니, 준비해 간 장바구니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택배 서비스가 있어서, 무겁게 들고 오는 수고를 덜 수 있어 더 기분이 좋았다. 4시간 정도 머물다 민둥산 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30분 정도 기다려야 출발한다고 하는 말에 괜스레 급해져 택시를 불러보기로 했다.
택시 예약을 하던 딸이 “엄마, 아까 올 때 택시비 얼마였어?”라고 물었다. “글쎄, 자동 결제라 안 봐서 모르겠네.” “한번 확인해 봐.” “왜?” “엄마 혹시 40800원이었어?” “설마... 진짜네...” 민둥산역에서 3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였는데, 택시 요금에 정말 많이 놀란 나는 다시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딸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열차 출발 시간까지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가 도착하고 오일장을 보러 온 주민 분들이 탑승을 시작했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분들이 타기를 기다렸다, 딸아이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자리는 이미 어르신들로 다 차서 빈자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버스 앞자리에 서서 가기로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도에 접어들었다.
코너링이 어찌나 심한지,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도 흔들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불과 두 정거장을 가는데,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현기증이 일었다. 고관절 수술한 지 얼마 안된 왼쪽 다리는 근력이 약해진 상태라, 오른쪽 다리로만 지탱하니 힘이 갑절은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세지는 코너링 강도에 맞춰 힘은 가속도가 붙어 쭉쭉 빠졌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버텼다.
감사하게도 쓰러지지 않고 민둥산 역까지 무탈하게 도착했다. 그날 국도를 달리는 버스 탑승 경험을 통해, 딸아이와 나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시골길 특히 국도를 달려서 어딘가로 가야 할 때는 자리가 없는 버스는 절대 타면 안 된다는 것. 그곳에서는 택시비 40800원이 결코 비싸거나 아까운 돈이 아니라는 것. 마지막은 여행 며칠 후에 몸소 깨달았다.
지난여름 이후 더위를 핑계로 운동을 계속 미루다 보니, 고관절 수술한 왼쪽 다리의 가동 범위가 많이 좁아졌다.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상태가 다소 심각해져서 당일에도 걱정이 앞서 망설였다. 그런데 그날 국도를 키질하며 달리던 버스에서 장장 1시간 가까이 있는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고 왼쪽 다리마저 합세해 두 다리로 버텼던 결과는 뜻밖에 큰 선물을 안겨줬다. 내 왼쪽 다리의 근력을 단단하게 키워준 것이다.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재활병원에서 1달 반 동안 얼마나 강도 높은 치료를 받았는지 알겠어, 그 정도로 해야 근력이 생기는 거였네, 고생 많았어.” 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밥 먹기 전까지, 그렇게 힘들게 회복해 놓은 다린데. 너무 안이했구나.’ 반성이 들면서, 내 힘든 시간을 알아준 딸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정선 여행길에서 버스 탑승은 뜻하지 않은 귀한 선물을 안겨줬다. 여행을 통해 성장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한 달 후에 떠날 단양행이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