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그로스만 <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를 읽고
내 연재 시리즈를 보는 독자들은 ‘이 사람은 정말 직업 만족도가 최상이구나.’라는 생각을 할 것 같다. 책을 다루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 때로는 무게감에 짓눌리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사서는 사서 고생하는 직업”이라고 전공 시간에 교수님이 강의할 정도로,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공공 도서관처럼 사서가 여럿 근무하는 곳이 아닌 혼자 근무하는 학교 도서관이나 기업체 자료실 같은 경우에는 존재 몰이해와 외로움이 더해져 오랜 근속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정년을 맞는 선배들을 종종 본다. 그 가운데 30년 가까이 근무하고 몇 해 전에 퇴직한 후, 기간제 사서로 다시 일하는 선배가 있다. 내가 학교 도서관이라는 생소한 곳에 발을 들이고 처음 간 교육청 연수에서 만난 선배로, 고마운 스승이자 참 소중한 인연이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선배의 행적을 통해 배우고 ‘교육청 사서 협의체’ 모임 속에서 모습을 보며 느끼고 깨달았다.
인생은 ‘고(孤)‘라는 말이 있듯이, 살아가는 일이 내게는 참으로 쓸쓸하고 막막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옆에서 발맞춰 함께 걸어주고 앞서서 길을 밝혀 주는 사람들이 있어, 살아가는 일이 해 볼만한 설레는 모험이 되었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만나 짧은 회포를 풀었다. 바쁘다는 합리화로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나와 달리 선배는 이런저런 경로로 내 근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내 미흡함이 미안했고 챙겨주는 마음이 고맙고 반가웠다. 퇴직 후에도 열정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후배들을 알게 모르게 살피는 나이 든 선배에게서 몇 년 후 내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만난 지 15년이 다 되어가니, 팽팽한 중년을 지나 노년을 향해 간다. 얼굴 여기저기 생긴 주름이 세월을 가늠하게 하는 나이가 되었다. 초등학교 도서관 근무 초기, 나를 당황하게 한 나이에 관한 충고가 생각났다. 유전적으로 검버섯이 생기는 체질이라 젊어서부터 자외선 차단제를 떡칠을 하고 다녔다. 하루 종일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느슨해졌다. 한 해 두 해 방심했더니, 한쪽 손목에 두 개 정도가 생겼다. 그것을 본 그 이는 “어린 학생들이 그걸 보면, 할머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방학 때 성형외과 가보세요. 추천해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그 상황을 모면했고, 내 손목과 손등에는 그 이가 보면 기절할 정도로 많은 검버섯이 피어올라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이런저런 현상들을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편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오래된 단독 주택이 많다. 우리 집 또한 그렇다. 그런 까닭 때문인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산책길에 만나는 동네 어르신들은 오십이 넘은 나를 여전히 ‘새댁’이라고 부른다. “아이고 저도 이젠 나이 많이 먹었어요.”라고 민망함에 한 마디 해보지만, 더 큰 민망함으로 돌아온다. “무슨 소리야, 아직 엄청 젊은데.” 이런 정이 그리워 영영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이 좋아진다.
삼십 대 중반에 연이어 두 차례 상실을 겪었다. 하나는 남편의 배신으로 인한 상실이었고 하나는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막막하고 깊은 절망감에 도저히 살아갈 힘이 나지 않았다. 그때 지금 사는 동네로 들어왔다. 동네를 다니는 어르신들을 보며 ‘내게도 저 나이가 올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를 버티고 한 달을 보내고 한 해를 살아내는 일이 너무 벅찼던 내게 그분들은 어느 순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은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었다’라는 말이다. 누구도 하는 일 없이 나이 들지 않는다. 사는 일은 바다를 메우고 태산을 옮기는 일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 싶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기적을 만드는 일, 그게 삶이고 나이 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한다.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10월 9일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발표된다. 그에 앞서, 인터넷 서점에서 예상 후보 투표 이벤트가 있어 참가도 하고 마음으로 응원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몇 권 구입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제럴드 머네인의 ≪소중한 저주≫, 미국 작가 돈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 ≫, 서인도제도 앤티가 출생 미국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내 어머니의 자서전≫, 중국 작가 찬쉐의 ≪오향거리≫, 이미 구입해 읽은 좋아하는 작가 위화의 ≪원청≫과 파울로 코엘료의 ≪다섯번째 산≫, 그리고 품절도서로 구입 예매해 놓은 이스라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 이렇게 6권이다. 이 가운데 다비드 그로스만의 책은 나이 듦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낸 그림책이다.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작가. 이스라엘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이스라엘 정부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는 평화 운동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작가. 이스라엘과 레바논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여든이 넘은 작가는 “국가적 갈등 상황이라는 외줄 위에서 끊임없이 비틀대며 중심을 잡으려는 줄타기 곡예사"(영국 가디언)라는 평가를 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할아버지 얼굴에 있는 주름은 어쩌다 생긴 거예요? 주름이 어떻게 하다가 생겼냐고? …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구나." "그렇고말고 너는 내 첫 손자잖니. 그때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단다. 내내 웃음이 나왔지. 걷다가도 웃음이 나고 자다가도 웃음이 나더니 결국 이렇게 주름이 생겼구나. 평범한 주름은 아니야. 꼭 보조개처럼 생겼지."
그는 평생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평화를 주장하고, 사랑하는 아들마저 그 전쟁으로 잃었지만, 멈추지 않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행복한 웃음이 때론 슬픈 눈물이 만들어내는 주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나이 듦의 아름다움과 삶의 의미를 전한다.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나이 듦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보여준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의 ≪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는 나의 나이 듦의 철학이자 또 한 권의 인생책이 되었다.
이제 나이 든 이의 얼굴에 생기는 주름을 보면, 그 사람의 나이를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궁금해질 것 같다. 나이 듦은 늙는 것이 아니라 인생 이야기가 쌓여가는 것이니까. 보조개 같은 주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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