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에세이 <삶을 대하는 나만의 방식> 제9화.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고집이 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안 먹겠다고 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지 않겠다고 해도, 억울하게 혼날 때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고집 센 아이가 되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먹으면 체해서 며칠을 고생했고, 익숙하지 않은 곳은 낯가림이 심해서 불편했다. 하지도 않은 일로 혼나는 것도 억울한 데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고집이 아니라 내 의사를 표현한 것뿐이었다.
설령 고집이 세다고 해도 그게 비난을 받거나 혼날 이유가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대로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했고 변명 같았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며 고집 좀 꺾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신에게는 살갑고 착한 손녀가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듣지 않아도 될 나쁜 소리를 듣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내게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나는 얘가 자기주장이 확실해서 좋아.”라고 응수했다. 호불호가 분명한 내 성격을 외할머니는 고집이라고 생각했고, 엄마는 고집이 아니라 자기주장이 확실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외할머니의 걱정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을 맞았고, 엄마의 말처럼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평가를 무수히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나는 때론 고집 센 사람이, 때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설 자리가 없었다.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하고 비위가 약해서 피해야 하는 음식이 있는 나의 식성도, 체형에 맞춰 원피스를 즐겨 입는 개인적 취향도, 삶에 대한 소신도 고집으로 구설에 올랐다.
20대 사회 초년생 때, 가장 큰 고민이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는 회식도 많았고 회식 자리에는 고기가 빠지지 않았다. 고기는 먹지 않고 곁가지로 차려진 반찬을 먹는 나를 보고 “왜 이렇게 식성이 까다롭냐?” 거나 “고기 좀 먹지, 살찔까봐 그래?”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다. 딱히 내 대답을 원한 물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애써 웃으며 그 자리를 지켰지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사회생활 30년이 넘어, 몇 해 전에 “저는 가리는 음식이 많습니다.”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날 나는 참 멋졌다. 그날은 교육청에서 힐링 연수가 있었다. 조퇴를 달고 외부로 나가서 하는 연수였지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학교에서 아쿠아 식물 조경 만들기로 힐링 연수를 대신했다. 연수가 끝난 후, 교무실에 간식이 준비되어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아쿠아 식물 조경을 들고 교무실로 갔다. 샌드위치를 먼저 받은 동료가 “생 연어 샌드위치네, 너무 맛있겠다.”라고 했다. ‘연어 샌드위치라고. 그것도 생 연어’ 연어도 내가 못 먹는 음식 중 하나였다. 다른 때처럼 일단 도서실로 가져가서 다른 사람에게 줘야 할지, 아예 받지를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문득 ‘왜 이렇게 불편하게 살아야 하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게 불편해서 내가 아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가리는 음식이 많습니다. 연어도 못 먹는 음식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음료수라도 가져가라는 간식을 나눠주던 교감선생님 말을 듣고 음료수 있는 곳으로 갔다. 내가 마시지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저는 믹스 커피만 마십니다.” 그 말을 들은 교감선생님은 “거 참 까다로우시네요.”라고 했다. 역시 늘 겪어온 반응이었다.
“네. 제가 좀 가리는 게 많습니다.” 몇 십 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쑥 내려간 것처럼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이 한마디 하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인생에 무해한 경험은 없다고 하더니,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을 맞으며 내 마음의 근육이 단단히 다져진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젠 고집 센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