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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Sep 03. 2023

헤어질 결심


이별을 두려워한다. 그래서인지 사람을 좋아해도 선뜻 옆자리를 내어주지 못한다. 친구든, 연인이든. 멀어지면 가까웠던 시간 이상으로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라기보다는 과거의 다정함을 간직하려는 버릇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서로의 방향이 달라 결국 우리는 헤어졌지만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로 똘똘 뭉친 이였다. 제법 세월이 흘러도, 자주 같이 가던 공원을 마주치면 잠시 당신의 생각에 잠겼다가 당신과 같이 들었던 노래를 습관처럼 듣고 나눴던 대화와 서로를 챙겨줬던 순간에 잠긴다. 참 좋았지 하면서.


사람뿐만 아니라 공간과 헤어질 때도 정리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스무 살 때 부산 동래의 재수학원을 다녔다. 아침 7시에 학원에 도착해 밤 10시까지 공부를 했다. 주말도 없이 학원에서 제법 오래 시간을 보냈는데 이상하게 수능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제 이 공간,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함께 못하겠구나는 아쉬움이 커졌다. '수능 끝, 이제 행복 시작'이 아니라 눈만 뜨면 당연하게 가던 공간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이 서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수능 날로 향하는 디데이가 짧아질수록 집에서 학원으로 오가는 길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고 애썼고 자주 다니던 편의점, 카페를 찾아 나름대로 이별 인사를 건넸다. '힘들 때, 기쁠 때 언제든지 자리를 내어줘서 고마워.'라고.


지금은 22년을 함께 보낸 집과 이별을 앞두고 있다. 당장 내일이면 이 집이 우리 집이 아니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이 집은 우리 가족의 첫 우리 집이다. 부모님이 구매한 첫 집. 부모님 모두 30대 중반 즈음 방 하나, 거실 하나 있던 주공 아파트를 떠나 현재 사는 이 아파트에 입주하게 됐다. 입주할 때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기존에 알던 친구들이 아닌 처음 보는 친구들과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지만 나만의 방이 생긴다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책상은 어떻게 배치하고 노트들을 어떻게 꽂을지, 인형들은 어디에 둘지 등등 머릿속이 바빴고 입학 이후 친구들을 자주 집에 데려와 놀았다. 인형 놀이, 선생님 놀이를 하자고 하며 친구들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놀고 싶은 마음보다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이 이사 간다는 사실에 동네 사람들이 많이 아쉬워한다. 이사가 확정된 1년 전부터 엘리베이터에서, 상가에서 만난 동네 사람들은 "언제 이사 간다고? 아쉬워서 우짜노."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면 나는 "너무 아쉬워요. 이제 못 봬서 어떡해요."라고 답하고 그럼 그들은 "그래도 잘 됐지. 부럽다!"라며 나의 아쉬움을 토닥여준다. 1년 전에는 이사라는 게 당장의 일처럼 다가오지 않았는데 이사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22년 동안 함께 했던 우리 동네와 우리 집 구석구석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아파트 화단에는 나와 동생이 초등학생 저학년 식목일날 심어둔 동백나무가 있다. 우리에게 추억을 쌓아주기 위해 아빠가 동백나무 묘목을 사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허락을 받고 나무를 심었다. 그때는 우리 키의 절반 정도 됐던 나무가 22년이 흐른 지금은 아파트 1층을 훌쩍 넘을 정도로 커버렸다. 꽃송이도 해를 거듭할수록 어찌나 화려하게 피는지, 겨울이면 올해도 무사히 잘 버텼는지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이 안부를 올해는 당연하게 못 묻는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슬플까.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작은 터널이 있는데 그 터널은 6월부터 바쁘다. 능소화가 얼굴을 내미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연례행사처럼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능소화를 담는다. 작년보다 꽃이 많이 폈네, 올해는 적게 폈네, 올해는 앞쪽이 활짝 폈네 하며 능소화의 건강을 살핀다. 능소화의 건강을 살피려면 이제 귀갓길이 아니라 굳이 찾아와야 한다는 게 시큰하게 다가온다.


집구석구석에도 추억거리가 가득하다. 집 입구에는 막냇동생의 두세 살 때 발 모양의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막냇동생이 학습지 선생님과 헤어질 때 서서 인사했던 자리다. 그 스티커를 보고 있으면 식탁 밑이 자기 자리라며 앉아서 우유를 먹던 막냇동생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큰 동생의 방문에는 못이 박혀 있다. 방 팻말을 붙이기 위해 박아둔 건데 그 못을 보면 동생이 한창 공부에 열이 올랐을 때 '서울대생의 방. 아무도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적어둔 A4용지가 생각난다. 그 결심 이후 동생은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찾아나갔던 게 떠오르면서 새삼 대견스럽다. 나의 화장품 서랍에는 ‘소솔’이라고 적혀있다. 인터넷 소설을 한창 즐겨보던 초등학생 6학년 때 인터넷 소설 여자 주인공 같은 가명을 만들었다. 그때 글씨체와 지금 글씨체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도 참 신기하고, 글을 나직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함께 뭉쳐 다니던 누님팸 친구들의 안녕이 궁금해진다. 큰 방 벽에는 인터넷 연결해 주는 기사님의 전화번호가 적혀있고, 입주 때부터 함께한 나무 장롱이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장롱은 엄마 아빠의 30대부터 60대까지 모든 걸 지켜봤을 테고 우리 가족의 희로애락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농의 겉면을 만지는데 엄마손처럼 따뜻하고 보드랍다.


내일이면 떠난다. 더 이상 우리 집 주소는 이곳이 아니다. 엄마 아빠의 청춘을 함께 한 곳, 나와 동생들의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쳤던 장소와 내일이면 헤어진다. 이 집에서 좋았던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 가족 구성원이 '집'하면 떠올리는 다정한 공간이었기에 완전한 이별을 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문득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면 습관처럼 이 집 근처를 맴돌 수도 있겠지.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동생들도 공간이 주는 아늑함이 필요해 이 집을 찾을 수도 있다.


우리 가족의 첫 보금자리가 되어줘서 고마워. 나만의 공간이 되어줘서 고마워. 우리 가족의 희로애락을 느껴줘서 고마워. 문득 네가 그리우면 불쑥 찾아올지도 몰라. 왔구나 하고 그냥 맞아줘. 그리고 이 집을 찾는 새로운 가족에게도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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