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케이블에서 방송 중인 <서브스턴스>를 보며 떠오른 단상.
영화의 주제는 고전적이지만 그 하드코어적 영상이 사유를 자극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사상과 생활 방식에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러하다: 외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 노병사(老病死)의 근원이다.
노병사는 존재가 내부의 결핍에 ‘파먹힌’ 결과이다. 외모, 인기, 물질, 결과물을 얻으려는 인간의 내적 결핍, 이것이 노병사라는 ‘몬스터’을 낳는다. 영화에서 욕망의 결과가 ‘괴물’을 거쳐 ‘죽음’으로 종결되듯, 결핍이 채워질수록 존재는 죽음에 잠식된다. 자기 존재가 타자화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부에 대한 욕망은 단순한 심리적 결핍이 아니라 자기를 좀먹는 실체(substance)이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수(Sue)는 ‘자기 자신’인 서로를 파먹으며 늙고 병들고 괴물이 된다. 하나는 젊음과 외모를, 다른 하나는 생존의 에너지를 욕망하며 ‘타자인 자기’를 갉아먹는다. 이는 존재가 분열되어 ‘자신이 곧 타자’가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육체적·정신적으로 붕괴를 맞는다.
둘 모두와 연결돼 있는 방송사 사장이 음식을 탐욕스럽게 삼키는 장면 또한 이러한 상징의 연장선에 있다. 외부를, 물질을, 타인의 인정을 ‘먹음’으로써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본체(substance)를 갉아먹는 행위이다. 먹는다는 것은 존재를 보충하려는 욕망인 동시에 존재를 축내는 일인 것이다. 결핍은 결핍을 낳을 수밖에 없다. 만사가 일체유심조의 원리 아래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외적 욕망의 식(食)에 중독되어 있다. 욕망의 식은 자기를 죽인다. 반대로 기식(氣食)은 자기를 생성하는 식(食)이다. 기식이란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을 외부의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 에너지에 두는 태도이다. 기식가 또는 이의 수행자는 외부를 먹지 않는다.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못하는 자는 외적인 뭔가를 먹음으로써 존재를 대체한다. 그리고 언급했듯 외적인 것을 먹는 일은 곧 자기를 파먹는 일이다. 이를 <서브스턴스>는 충격적인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