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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쫀쫀한 똘이

  똘이는 꼬리표를 하나 달고 우리반에 올라온 아이다.

꼬리표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나같이 온갖 풍파를 겪은 이십년지기 교사라면 금도끼, 녹슨 도끼 가리지 않는 나무꾼의 자질을 가져야 하므로 그의 전 담임선생님께 "이 꼬리표는 왜 달린 것이냐" 지 않았다.

(꼬리표 달린 똘이가 장차 금도끼가 될지 은도끼가 될지 지금 달린 꼬리표로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다.)


  몇 주를 지켜본 결과, 똘이는 또래보다 감정 솔직하게  표현하는 아이였고 노래와 랩을 좋아하고 박자도 잘 타는 아이였다.

가끔 친구와 마찰이 생기면 그의 랩 실력은 불편한 감정을 타고 여과 없이 표현되었는데 동그란 몸에 동그란 눈을 부릅뜨고 긴 시간 동안 눈을 깜박이지 않는 상태로 상대에 대한 날 선 불평을 다다다다 반복적으로 쏘아곤 했다.

상대방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불지핀 온돌방처럼 같이 달아오르기도 하고, 흔치 않게는 네가 먼저 시작했으니 나도 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발전하여 여의도불꽃놀이마냥 끝없이 팡팡 터지기도 했다.

종국에는 평화로운 중재를 위해 내가 개입하여 함께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엄중한 얼굴을 한 선생님의 개입이라는 긴장되는 상황에 똘이의 목소리는 '솔'톤을 넘어 '라'(때로는 '시')가 되어

"자! 선생님 들어봐요. 제가 이렇게 했는데 얘가 저렇게 했고 그래서 제가 요렇게 말했는데도 얘는 어쩌고 저쩌고... 그러니 제 입장에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리저리 하여 요렇게 된 거예요! 저는 진짜 잘못한 게 !!!요!" 

또박또박하지만 빠른 목소리에 특유의 강세가 들어 똘이의 말투는 내가 교사인지 그가 교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선생님 앞에서도 쫄지 않는 그의 강심장이란...


 나는 본디 아이들에게 사과를 강요 않고, 사과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을 만들어주는 편이다. (그게 그 말인가..)

그래서 아이들의 감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때는 상황을 쪼개고 쪼개 엿가락 늘이듯 질질 늘려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진 후 시간 따위에 굴하지 않는 태도로 길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똘이의 입장 정리가 2분이었다면 나는 10분쯤?

사태에 대한 각각의 행동과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와닿았는지, 그 행동의 대안이 될 수 있었던 다른 행동들은 무엇이 있으며 결국 서로의 입장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이 참담한 결과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유감, 둘만의 세계에 갇혀있느라 놓친 다른 친구들의 피해에 이르기까지.. 장황한 내 설명의 끝에는 꼭 이 말이 붙는다.

"자, 이제는 어떻게 생각해? 혹시 먼저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

십중팔구는 둘 다 손을 번쩍 든다. 똘이는 자존심이 세서 초반에는 고개를 갸웃하며 마지못해 사과를, 학년말엔 내 브리핑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사과를 하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똘이에게 특별히 더 잘해주진 않았으나 학년말이 다가올수록 똘이는 더 특별하게 느껴지고 헤어지기 아쉬워진다. 종종 갈등이 생겼던 똘이가 이제는 친구들과 둥실둥실 잘 어울리고 더 밝아졌기 때문일까?


  언젠가 음악시간에 따라 부르기 어려운 노래가 나왔을 때 다른 아이들은 처음 듣는 노래라 그냥 가만히 앉아 듣는데 똘이는 가사에 맘대로 음을 붙여 자신의 흥에 따라 작게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의 한 친구가 웃었는데 곧장 본인을 비웃었다며 기분 나빠 따졌고 내가 "선생님도 웃었어~선생님 웃으면서 너 쳐다보는 건 못 느꼈? 처음 듣는 어려운 노래인데 즉흥적으로 부르는 거 보니 너무 귀엽고 대견하던데? 그 친구도 그런 니 모습이 좋아 보였을 수 있지. 남들이 웃는다고 다 비웃는 건 아냐" 하자 또 고개를 갸웃하더니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10월에 있었던 학급발표회 때도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반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로만 하겠다는 나의 계획에 아이들은 모두 수긍했지만 유난히 어려웠던 스텝박스는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모모랜드의 '바나나차차' 노래에 맞춰 선글라스 딱 끼고 스텝박스를 오르내리면 그거야말로 발표회의 하이라이트라며 온갖 감언이설로 꼬셔보았으나 지원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결국 나는 모둠별로 친구들 앞에서 발표해 보면서 누가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자는 초강수를 두었으나 그럼에도 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또르륵..

하이라이트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하교길의 똘이를 살짝 불러 "니가 리듬감이 좋고 운동신경도 좋은데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안될까?"라고 최대한 비굴하고 불쌍한 표정으로 부탁했고 똘이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하고 가더니 다음날 내 부탁을 수락했다.

선글라스가 없는 똘이를 위해 나는 신혼여행 즈음 철 없이 산 하나뿐인 선글라스를 내어주었다. 그래도 모자란 것 같아 <바나나차차>란 노래에 맞춰 스텝박스에서 킥을 날리며 공연하는 모습이 돋보이도록 농심 바나나킥 과자봉지를 본뜬 펠트 소품도 만들어줬다. 남학생들의 최애브랜드 나이키로고까지 박아서...

어머니께 부탁드려 발표회때 입을 옷에 몇 군데 바느질로 꿰매면 된다고 했는데 처음엔 촘촘하게 바느질을 시작했다가 결국 10센티미터 간격으로 널찍하게 바느질한 그의 어머니조차 어쩜 그렇게 그의 솔직함닮았던지.. (아..그가 어머니를 닮은 거겠지...)

스텝박스 공연은 예상대로 대성공이었고 아이들은 정말 큰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어렵다고 도전하지 않으려 한 프로그램이었기에..


  똘이는 더위를 많이 타서 한겨울에도 교실에서 반팔 차림인데 체격이 커지면서 옷뿐 아니라 아빠의 티셔츠도 입고 엄마의 운동복바지도 종종 입는다.

거침없이 솔직하고, 흥이 많고, 또박또박 조리 있게 잘 따지고, 더위를 많이 타고, 체격은 있지만 몸이 탄탄하고, 처음엔 친구들과 자주 다투기도 했지만 이제는 꽤나 너그러워진 똘이..얼핏 까다로워 보이지만 엄마옷, 아빠옷 가리지 않고 몸에 맞으면 척척 잘 입는 순둥이 똘이..


  며칠 전 서예 시간, 한 여학생이 먹물을 쏟아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을 때..

점심시간이 다가온 시점이었고 여학생은 옷에 먹물이 튀어 꼼짝할 수 없었고 바닥까지 흥건한 먹물을 나 혼자 처리하고 있 !

  다른 아이들은

 "으악~ 선생님 책상다리에도 먹물이 흐르고 있어요"

 "바닥 틈에 먹물이 스며들고 있어요!"

 "어머! 옷에 먹물 튄 거 보세요!"

 "선생님 우리 밥 먹으러 못 가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 배고파서 속이 너무 쓰려요~"

  라고 아우성이었는데 똘이는 조용히 사물함에서 자신의 물티슈를 가져와 나를 도와 바닥을 닦다. 똘이의 물티슈는 내가 최고급이라 생각하는 베베숲 프리미엄이었는데 거의 새거나 다름없었던 그 물티슈를 너무 많이 쓴 것이 마음쓰여

"똘이야~ 그 물티슈 남은 거 선생님 줄래? 니 건데 너무 많이 썼네. 그거 그냥 선생님이 쓰고 내일 내가 새거 하나 갖다 줄게"

라고 말했으나

"싫어요. 전 그냥 이게 좋아요"하며 쿨내 진동하게 남은 물티슈를 자기 사물함에 다시 넣었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먹물을 닦아내느라 온 손톱이 새까맣게 물드는 것도 신경쓸 수 없을만큼 정신없었던 그때, 물티슈를 꺼내 다가온 똘이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거친 초원을 달려 내게 온 건강한 야생마 같았다.


빈틈없이 쫀쫀하게 나와의 년을 잘 보낸 쫀쫀한 똘이..

헤어지기 전이지만 벌써 그립다. 

내년에 똘이를 맡을 선생님도 그의 특별함에 감탄하는 일이 많았으면.. ^^ 똘이 스스로도 본인의 특별함에 자부심을 갖고 긍정적으로 잘 커나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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