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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 Mar 11. 2024

나의 주량 협상

- 아, 진짜 어쩌란 말인가

  대학 시절부터 나는 술이 셌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들이 권하는 막걸리를 열 잔쯤 마셨는데도 술에 취하지 않아 선배들은 나를 '철인 28호'라고 불렀다. 부모님께서도 술이 세셨다니 아무래도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나 싶다. 

  적당히 마셨으면 좋았을걸. 20대 땐 안주를 안 챙겨 먹고 술만 마신 탓에 자주 취하곤 했다. 그렇다고 필름까지 끊긴 적은 없었지만, 비틀거릴 때까지 마시고 오는 통에 엄마께 자주 혼이 났었다. 그러다 고시 공부를 하겠다며 부모님께 선언하니, 엄마께서 한 달간 술 한 모금도 안 마시면 시켜주시겠다고 해서 딱 한 달 금주를 한 적이 있다. 결혼 후 임신 사실을 안 후 또 모유 수유를 하는 9개월 동안도 금주를 했다. 그때 끊었어야 했나?

  그러나 끊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열심히 마시고 있다. 요즘은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과음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2, 30대와 달리 점점 안주발을 세우고 있어 술을 한껏 마시기도 전에 배가 불러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다이어트 최대의 적은 뭐니 뭐니 해도 음주다. 일단 술을 마시는 시간대가 최소 저녁 시간이고, 그 저녁 시간에 술 자체에 당분이 있음은 물론이고 곁들이는 안주가 고기 또는 전, 탕 등 고열량 음식인 것. 맥주 한 캔, 소주 한 병에서 끝날 술자리도 안주가 남았다는 핑계로 "한 캔 더, 한 병 더"를 외치게 된다. 아, 생각만 해도 취기가 오르고 속이 더부룩하다. 

  이번 연휴에는 맥주, 소주, 막걸리까지 종류도 다양하게 마셨다. 이러니 역대급 체중증가를 경험하는 중이다. 그런데도 이번 연휴 일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술’이다. 또 이렇게 알짜 연휴를 술상 밑에 숨어 헛되이 보내는 꼴이라니, 역시 나는 아직 멀었다. 계획 따위 무색하고 충동적인 내가 과연 방학 내내 뒹굴며 나태한 아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나. 내가 아는 작가님께서도 "책 쓰기를 결심한 사람은 술은 끊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비단 책 쓰기 위한 사람만이 아니라 다이어트를 결심한 사람도 술은 끊는 게 맞다. 

   음주나 흡연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람도 있다. 흡연했던 내 여고 동창 친구는 지금은 건강을 위해 끊었지만, 확실히 일이 잘 안 풀리고 생각이 잘 안 떠오를 때 담배를 피우고 나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고 한다. 내 경우엔 담배 대신 술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폭음으로 이성을 잃을 정도만 아니라면 맥주 한 캔 정도는 기분 전환하기에 딱 좋은 수단이다.           


이 정도니까 술이야

  기분이 좋아서 한 잔, 우울해서 한 잔. 술을 마시는 핑계는 다양하다. 지난 2월 27일에 도서관 사서 도우미 기간제 근로직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기간이 정해져 있는 단기 일자리이지만 앞선 총 3년여 근로기간 동안 비교적 익숙한 업무인 데다, 근무지가 집 근처로 직주근접 조건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자리가 어디 있을까 싶다. 또한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평일에 일도 하며 업무 중 자투리 시간에 책도 읽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물론 글을 쓰기는 힘들다. 글쓰기는 하나의 주제로 풀어내야 하는 창작활동이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도 하고 좋아하는 독서도 하며 근로계약이 종료될 때까지 매월 급여를 받을 수 있으니 최소한 내 자기 계발비는 스스로 부담할 수 있게 되었다. 뿌듯한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 좋은 소식에 어찌 술 한 잔 안 하고 넘어갈 수 있겠나. 가뜩이나 삼일절인 3월 1일 금요일부터 3일 일요일까지 사흘간 연휴이니 기분 좋다고 술을 마셔댄 것이다. 

  연휴가 끝나고 나는 도서관으로, 아이는 고등학교 입학식을 위해 각각 출근하고 등교했다. 남편은 아직도 낯가림 심한 외동아들이 걱정되어 입학식 참관을 위해 휴가를 내고 비정규직 첫 출근인 나를 대신해 아이를 차로 등교시키고 다시 시간에 맞추어 입학식에 참석했다. 회사에서 삼일절 연휴 앞뒤 중 택일하여 전 직원 휴가를 쓰라는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아이 입학식만 마치고 서둘러 근무지인 부산 숙소로 다시 내려간 남편. 덕분에 나는 긴장하고 피곤한 첫 출근을 마치고 퇴근해서 아이의 길고 긴 푸념을 들어야 했다. 

 “엄마, 2차 예비 소집까지 마친 우리 반 애가 유학 갈 거라며 자퇴했대요.”

  아이는 중학교 2학년 코로나 종료 선언으로 매일 등교하던 그 시절부터 줄곧 검정고시 타령이었다. 그러더니 오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같은 반 아이의 자퇴 소식까지 접하고 나니 또 마음에 폭풍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아랫배가 꾹꾹 쑤신다며 칭얼대더니 퇴근 후 집에 와서 보니 영어 학원 간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 준비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선 아이의 첫 마디는 “엄마, 나 추워요. 아무래도 몸살인가 봐.”였다. 

  아, 진짜 어쩌란 말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일명 ‘신학기 증후군’이 찾아왔다.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징징거림을 받아줘야 하는 걸까. 이렇게 우울하고 답답할 땐 역시 한 잔 술에 괴로움을 타서 꿀떡 삼켜야 한다. 그러나 아직 업무 초반이고 올해부터 매일 시작된 상호대차 시스템에 당분간 적응하려면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니 술은 안 된다. 좋지도 않은 머리, 뇌세포가 더 파괴되지 않도록. 평일 근로가 끝나는 금요일은 토, 일 주말 이틀간 쉴 수 있으니 그때 기분 좋게 술을 걸쳐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 술 생각은 금요일 밤으로 미루자. 

 그러나 우리 금쪽이는 나의 이 처절한 결심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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