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안 변한다
-2018년이나 지금이나 진상 이용자님은 안 변하셨다, 그러는 나는?
디지털 자료실에 전세 낸 것처럼 특정 자리만을 자신의 고정석인 양 이용하시는 분이 계신다. 오늘은 본인 그 지정좌석에 먼지가 많다며 서가에 책을 꽂으러 다니는 내게 "저기요? 혹시 제 자리에 먼지가 많아서 그러는데 드라이기도 먼지 좀 털어도 되죠?" "저 플러그가 선생님 자리에선 꽂을 데가 없을 텐데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기어이 내가 돌아서자마자 플러그를 출입구쪽에 있는 배선 장치를 찾아 기어이 의자를 입구 가까이 들고 와서는 "여기 꽂으면 돼요. 잠깐만 쓸게요." 하신다. 그래서 너무 오래 하시지 않도록 테이프 잘라서 마저 좌석의 먼지까지 털어드렸는데도 등받이 뒤쪽까지 기어이 드라이기로 먼지를 날리신다. 2018년엔 잘 차려입고 와서는 "나 이대 문정과 나왔어?언니, 신입이구나?"라고 하시며, 당시 내가 잘 모르던 컴퓨터 기능을 물어보시며 이용자들 앞에서 면박을 주셨다. 덕분에 나는 기어이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을 취득했다. 어차피 재취업을 위해선 필수자격증이니 말이다. 수년 전부터 초췌한 행색으로 도서관에 매일 방문하신다.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영상을 보시는 건지 직원들 전언에 따르면 혼자 소리내어 웃는 일도 잦으시다고.
나이는 잘 모르지만, 이 좋은 날 굳이 이 도서관 디지털 자료실에 앉아 컴퓨터랑만 종일 노시는 것도 힘들 듯한데, 어쨌든 그 꾸준함만큼은 인정한다. 그보다 더 나에게 큰 깨달음은 '아름답게 늙어가자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월이 흐르는대로 나이를 먹는다. 속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노화를 겪는다. 한 세기를 넘어 올해로 만 103세-어쩌면 생일이 지나셨다면 이제 만 104세가 되셨을 것-가 되신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님은 비교적 최근인 2022년 2월, 이미 만 101세가 지난 시점에서도 <김형석의 인생문답>이라는 책을 출간하셨다. 책을 읽기도 힘든 연세에 책 출간이라니. 책을 낼만큼 평소에 꾸준히 글을 쓴 원고가 있으니 책도 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일년전쯤부터 책을 쓰겠다고 공언하고는 여지껏 신문에 칼럼 한 편도 기고를 못한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같은 책쓰기 모임의 문우들은 평소 정성들여 원고를 쓰다보니 출판사로부터 하나둘씩 출간제의도 받고, 이미 책출간을 목전에 두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의 어르신의 유난스런 행위에 정나미가 떨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꾸준한 습성은 본받을만 하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오전 과업을 수행하던 중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여 여태 이번 도서관 평일 근무 후 안하던 실수를 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아무래도 내일 발표할 '서평쓰기 노하우' PPT도 만들지 않고 어제 졸린 눈을 비비며 꾸역꾸역 도서관 매거진 글을 발행한 내가 후회되었고, 내일 발표 전 나의 글쓰기 멘토이자 삼삼아씨 커뮤니티 리더이신 통쌤이 눈건강이 극도로 안 좋아진 것에 대한 걱정, 그런 선생님께서 친히 내일 발표 리허설 제안을 먼저 해주셨음에도 바로 응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실망이었다. 분명 아들도 2박3일 일정으로 학교에서 주최하는 수련회에 다녀오느라 월, 화요일 이틀 간 저녁 시간에 비교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무얼 하느라 PPT는 생각도 못했단 말인가. 유명 정신과 의사선생님은 방송에서 '무엇인가를 자꾸 미루는 것은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게으른 완벽주의자를 위한 심리학>의 부제에서도 "당신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잘하고 싶은 사람입니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내가 오디오북으로 만났던 <아주 작은 시작의 힘>에서도 '일단 미루지 말고 시작하라'는 진리를 전해주었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진상 이용자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할 작정이었으나, 그 이용자분을 보고 문득 든 깨달음이 결국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과연 정말 내가 꼭 잘하고 싶어서 미루는 것인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어쩌면 미루는 것이 습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맞다. 나는 이성보다 감정에 능한 것 같다. 그래서 나와 타인에 대한 시선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늘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대고 변명을 늘어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치열하게 고민할 시점이다.